19
19. 또, 장원
방울 소리가 파루보다 먼저 골목을 깨웠다.
과장으로 가는 길목에 무당이 앉아 있었다. 소반에 쌓아 둔 부적을 곁의 사내가 행인들에게 나눠 주었고, 받지 않고 지나가면 소매에라도 꽂았다. 부정 타지 말라는 말에 어떤 유생은 종이를 받아 품에 넣고, 어떤 유생은 손사래를 치다가도 주변을 보고 받아 갔다. 그 틈으로 지나던 예지는 제 팔 앞으로 내밀어진 누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하나 지니고 가시오. 오늘 계집이 시험을 보러 온다 하오."
"그 사람 오면 이게 뭘 해 주는데?"
"요술을 막아 주지. 과장에서 붓이 혼자 움직였다지 않소."
"붓이 혼자 글을 쓰면 나도 하나 사고 싶은데. 어디서 파는지 들었소?"
사내가 입을 벌린 사이 권신이 예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비를 길게 할 자리가 못 된다며 낮게 재촉하는 바람에 예지는 더 묻지 못하고 걸었다. 미복으로 길목을 돌아보자고 한 사람도 자신이었지만, 정작 저 말을 듣고서 관복부터 갈아입고 싶어졌다. 정은에게 할 소리를 저렇게 모르는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하는구나.
"저자도 잡을까?"
"무슨 죄로 잡으라 하시겠사옵니까."
"시험을 방해하고 있잖아."
"문을 막거나 응시자를 붙들면 군졸에게 떼어 놓으라 이르겠사옵니다. 지금 끌고 가시면 부적이 두려워 잡았다 할 것입니다."
"들어 보니 그렇게도 말하겠네. 참 편하게 사는구나, 저 사람들은."
"저하께서 저 길로 또 나가시면 소인은 편하지 못하옵니다. 이제 안으로 드시옵소서."
권신은 사내의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예지를 안으로 들였다. 담 밖에서는 지난 별시 이야기가 계속됐다. 계집이 붓을 쥐기도 전에 시권이 채워졌다는 말까지 붙고 있었다. 본 적도 없으면서 아주 자세했다. 예지는 감독석으로 갈 옷을 갖춰 입으며 옷고름을 거칠게 잡아당겼다가, 매무새를 봐 주던 내관에게 손을 맡겼다.
'내가 저기서 같이 싸우면 시험은 누가 봐. 오늘은 정은이 보겠다고 한 시험이야.'
담 안의 자리는 지난번과 달랐다. 예조에서 나온 시관들과 재시험을 요구한 문중의 시관들이 서로 마주 보게 앉았고, 그 사이에 선유명이 자리를 잡았다. 예지는 어느 쪽에서 추천한 사람이냐고 물었다가, 양쪽 모두 이견이 없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저 어른을 싫어하는 쪽에서도 시관 자격을 시비 삼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대감께서는 오늘 어느 글부터 읽으실 것이오?"
"거두어들이는 순서대로 읽겠사옵니다. 먼저 눈에 든 시권이 있으십니까?"
"봉미도 하기 전에 어떻게 알겠소."
"그러니 소인에게도 미리 물으실 것이 없사옵니다. 자리에 드시지요. 녹명을 마친 자들이 기다립니다."
선유명은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지를 맞았다. 틈을 주지 않는 대답이었다. 조금 얄밉다가도, 오늘 저 사람이 저 태도를 끝까지 지켜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석에 앉자, 앞줄의 젊은 유생들이 일제히 몸을 바로 했다. 누가 어느 대감의 아들인지 미리 전해 들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다들 제 앞의 종이보다 문을 더 자주 보고 있었다.
정은은 녹명이 진행되는 동안 들어왔다.
지난번처럼 뛰지 않았다. 보퉁이를 안고 문을 넘어서는데 허리를 완전히 펴지 못했고, 녹명소 앞에 멈춰 서서는 받침대를 짚었다. 예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관이 무슨 명을 기다리듯 다가오자 그제야 등을 붙이고 앉았다.
"물을 두었는가. 응시자들이 마실 물."
"문 안쪽과 마당 끝에 두었사옵니다."
"부족하면 더 놓아라. 누구든 다녀올 수 있게 하고."
내관이 물러간 뒤에도 예지의 시선은 정은에게 돌아갔다. 얼굴이 평소보다 희었다. 몸 관리를 먼저 적어 두었다더니, 약은 먹고 왔을까. 따뜻한 물을 마시면 좋을 텐데.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정은은 서리가 가리킨 자리를 보고, 보퉁이를 옮겨 앉았다. 누구의 도움을 기다리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요망한 것이 또 왔구먼."
곁의 벗에게 하는 말치고는 목소리가 컸다. 정은이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낸 유생은 정은이 볼 줄 몰랐는지 웃던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턱을 들고 마주 보았다. 정은은 그에게 환하게 웃어 주었다.
"아는 사람이오? 왜 날 보고 웃소?"
"말씀을 하시기에 보았소. 더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시오."
"누가 그쪽한테 말을 했소."
"그러면 벗분과 마저 나누시오. 저는 준비를 해야 해서."
정은은 돌아앉아 붓을 풀었다. 웃어 줄 것이라던 목록이 생각나 예지는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웃음이 새면 안 되는 자리였다. 저 사람이 얼마나 벼르고 왔는지, 지금 저 유생만 모르겠지. 방금 허리를 짚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정은은 벼루를 꺼내는 손으로 곁에 앉은 사람에게 물그릇을 조금 밀어 달라고 청했다.
과장에 인생을 걸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오늘이 아니면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 남은 생을 모두 걸고 온 자는 정은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붓을 문제 삼은 것은 시관 쪽이었다.
"저하. 저잣거리의 소문을 그대로 둘 수는 없사옵니다. 기왕 의심을 씻자고 연 자리이니 저 응시자의 물건도 살피는 것이 옳겠습니다."
"무엇이 수상한가."
"붓에 다른 장치가 있다는 말이 있사옵니다."
"누가 보았다는 것인가."
"도는 말이 그러하니, 눈으로 확인하면 그만이옵니다."
정은이 붓을 들고 일어났다. 예지는 앉아 있어도 된다고 하려다가 멈췄다. 정은이 서리에게 붓을 건네고 시관석을 향해 예를 갖추고 있었다.
"살피시지요. 자루도 빼 보셔도 되옵니다. 다만 촉은 상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그 붓으로 써야 하옵니다."
옻칠한 자루는 쥐는 부분만 빛이 닳아 있었다. 시관 하나가 붓촉을 벌리고 다른 이는 자루를 굴려 보았다. 냄새까지 맡는 것을 보며 앞줄에서 웃음이 새었다. 정은은 웃는 쪽을 보지 않고, 촉이 눌린 붓이 누구에게 넘어가는지만 따라갔다.
"이것으로 지난번에도 썼는가?"
"예."
"평소에도?"
"붓이 이것 하나이옵니다."
"새 붓을 내주면 쓰겠는가?"
"내주시면 쓰겠사옵니다. 미덥지 않으시면 먹과 종이도 관에서 내주십시오. 대신 무엇을 바꾸었는지 시권을 거둘 때까지 적어 두시면 좋겠사옵니다."
붓을 들고 있던 시관이 옆자리로 눈을 돌렸다. 예조의 시관은 새 붓을 가지러 일어나려는 서리부터 앉혔다.
"먼저 말씀하시지요. 이 붓에서 무엇을 찾으셨소?"
"찾지 못했소."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바꾸자는 것이오. 관에서 준 붓으로 장원하면 그때는 관의 붓에 무엇이 들었다 하실 겁니까?"
"그런 억지를 부리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소."
"그러니 지금 확인한 것만 기록합시다. 자루와 촉을 살폈고, 글을 대신 써 줄 물건은 찾지 못했소. 맞습니까?"
시관은 붓을 서리에게 돌려주었다. 서리가 가져오는 동안 정은은 보퉁이에서 마른 천을 꺼내 기다렸다. 촉을 한번 고르고 먹물을 적셔 종이 귀퉁이에 시험 삼아 그어 보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선유명이 시관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이제 글을 받읍시다. 다들 이 시험을 다시 열자고 하셨으니, 끝난 다음에도 오늘 확인한 것을 기억해 주시고."
시제가 걸리고 징이 울렸다.
담 밖의 방울은 그치지 않았다. 무당이 발을 구르는지 북소리에 맞춰 낮은 울림이 들어왔고, 군졸들이 길을 비키라는 고함도 들렸다. 어느 유생은 붓을 들었다가 놓으며 문 쪽을 노려보았다. 정은은 시제를 읽고 여백에 써 볼 말을 적었다. 허리를 굽힌 채 오래 앉아 있는 것이 힘든지 간혹 몸을 세웠지만, 그럴 때도 눈은 종이를 보고 있었다.
해가 높아지자 누런 부적이 담을 넘어 날아왔다. 바람에 밀려 응시자들의 멍석 사이를 지나더니 정은의 무릎 곁에 멈췄다. 뒷줄에서 누가 짧게 웃었다. 정은은 종이를 집어 멍석 밖에 두고, 들고 있던 붓으로 쓰던 획을 마저 그었다. 구겨진 부적을 보고 있던 서리가 다가와 주워 갔다.
"저런 것은 바로 치우게. 응시자들 밑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예지가 내관에게 작게 이르자 서리가 담 가까이 가 섰다. 과장 안에서는 그 정도까지였다. 정은의 시험지를 대신 채워 줄 수도, 지금 몸이 얼마나 아픈지 묻고 쉬게 할 수도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청할 사람이라고 믿고 기다려야 했다.
정은이 붓을 놓았을 때에는 예지도 문득 숨을 멈췄다. 정은은 벼루에 붓을 걸고 허리를 폈다. 옆 사람이 종이를 넘기는 사이 옷고름 아래를 누르더니,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관이 감독석 쪽을 보았다. 예지는 정은이 먼저 고개를 드는지 기다렸다.
이윽고 정은이 물그릇을 가리켰다. 서리가 물을 가져다주자 조금씩 나눠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은 다음에는 시권을 다시 읽었다. 고치고 싶은 대목이 생겼는지 붓을 들었다. 그제야 예지는 펴지지 않던 손을 무릎에서 떼었다.
'병원에 누워 쉬어도 속상할 날인데. 꼭 오늘까지 이겨야 하다니.'
현대에서 무심히 넘겼던 복사물이 떠올랐다. 사진 밑에 작게 붙은 이름들, 길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선 사람들. 선배가 그 이름들을 외울 필요는 없다면서도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자고 했었다. 그때는 선배가 웃는 사진만 찾아보느라 옆의 설명을 대충 읽었다. 지금 저 사람이 시권을 다 쓰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으로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 사진 속 사람들 옆에는 누가 서 있었을까.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강의실의 모습도 그 뒤로 따라왔다. 안개 너머에서 선배가 입을 움직였다. 가까이 가도 들리지 않던 말이 오늘은 하나 떠올랐다.
'다들 있었어. 어디에나 있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고 예지는 정신을 돌렸다. 앞줄에서 시권을 덮는 소리가 났다. 정은이 서리를 불렀다. 예지는 그 사람이 일어서며 비틀거리지 않는지를 먼저 보고, 다음에는 시권이 봉해져 옮겨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
등잔을 가까이 당겨도 시관의 붓은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전례와 법도가 어긋날 때 무엇을 따를 것인가. 그 시제를 두고 온종일 쓴 글들이 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한 시권을 읽으면 맞은편 시관에게 넘겼고, 한쪽에서 등급을 정하면 다른 쪽이 근거를 물었다. 예지는 밤이 깊어서야 그곳에 배석했다. 어느 시권이 정은의 것인지 궁금해서 봉해진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손은 제 무릎 위에 두었다.
"이 글은 전례를 쫓아야 한다 하였군."
"끝에는 법도를 지켜야 한다고 썼소."
"그러면 둘이 어긋났을 때 어느 쪽을 먼저 하겠다는 것이오?"
"그 대목이 없소."
시권이 옆으로 넘어갔다. 둘을 아우르겠다고 쓴 글에도 아우르는 방법이 빠져 있었다. 시관들은 잘 쓴 구절을 짚다가도 시제로 돌아갔다. 예지는 정은이 아까 종이 귀퉁이에 무엇을 적었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너무 멀어 보이지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보일 리가 없었다.
다음 글을 읽던 독권관이 목을 축였다.
"전례대로 거행하였다는 말로 법에 어긋난 처분을 덮을 수는 없사옵니다. 먼저 법문을 확인하고, 전례가 생긴 연유를 물어야 하옵니다. 법문에 따를 때 백성에게 어떤 폐가 생기는지도 살펴, 고칠 곳은 아뢰고 판결한 까닭을 남겨야 하옵니다. 그다음 고을에서 같은 일을 만났을 때 앞선 처분을 다시 물을 수 있도록…, 여기서부터 예를 들었소."
문중에서 나온 시관이 붓을 들었다.
"지방관이 처분할 때마다 문서를 적어 올리면 일이 얼마나 늦어지겠소."
"무엇이든 아뢰라 한 글은 아니오. 아래를 더 읽어 보시지요."
"그 정도는 읽었소. 대체 누가 이 많은 것을 살피겠다는 거요?"
"법을 살피라는 관직에 앉힌 사람이 살펴야겠지요. 그 일을 못 한다는 반론을 이 시권에 적으시겠소?"
예조 시관의 말이 조금 거칠어졌다. 선유명은 두 사람 사이의 시권을 돌려놓았다.
"경들의 사정까지 시권에 넣지 맙시다. 물은 것에 답했는가, 예가 알맞은가, 문장이 뜻을 전하는가. 그 순서대로 보시면 되오."
"글이 어립니다. 세상 일이 어찌 적힌 대로 다 되겠소."
"그러면 어디서 막힐지 짚으시오. 어린 글이라 깎아내리면 나이 든 응시자는 다 급제하겠소."
예지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웃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기편이라는 확신도 없지만, 선유명이 오늘은 문중 시관을 자꾸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시관은 여백에 붓을 세웠다가, 다시 아래의 예를 읽었다.
"이 줄은 고쳐 쓸 수 있겠소. 관아가 제 잘못을 숨길 수 있으니 다른 관원에게 대조하게 한다고 했는데, 서로 말을 맞추면 어찌하오?"
"그것은 다른 시권에도 물을 수 있소. 이 글에는 백성의 진술을 함께 두라고 적혀 있소. 서로 맞춘 말과 진술이 다른지 살필 것은 남지요."
"저하께서는 어찌 보십니까."
갑자기 물음이 와 예지는 시관에게서 시권으로 눈을 내렸다. 어느 말을 해야 글을 쓴 사람이 손해를 보지 않을까부터 생각한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내가 정할 자리였으면 오늘 두 줄로 모실 까닭이 없었겠지. 경들이 받은 시제대로 정하시오. 다만 서로 지적한 곳은 적어 두시오. 등급을 정한 다음에 다른 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시관이 다시 앉았다. 붓 두 자루가 같은 시권의 등급란을 채웠다. 선유명은 모두의 검토가 끝난 뒤에 그 글을 다시 읽고 상 가운데로 밀어 놓았다. 읽는 동안 눈썹이 조금 움직였지만, 좋은 글을 보았는지 낯익은 주장을 보았는지는 예지가 가릴 수 없었다.
"등급을 정하셨으면 봉미를 열기 전까지 각자 확인한 표를 두십시오."
"이미 정한 것을 거듭 확인하라 하십니까?"
"지난 시험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경들도 아시지 않소. 이번에는 시관의 이름도 함께 남깁시다."
그 말에는 아무도 거절하지 못했다. 예지는 시관들이 하나씩 이름을 적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물러났다. 정은의 이름은 아직 보지 못했다. 동궁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궁금했지만, 오늘은 끝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재시 문과, 장원. 남촌에 사는 나정은."
방방관이 이름을 부르자 정은이 들어왔다. 감독석에서 예지는 손을 맞잡은 채 그 모습을 기다렸다. 어제보다 낯빛이 돌아와 있었다. 오늘도 아픈 것을 참는 중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사배를 올리고 몸을 세울 때에는 받쳐 주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차석에 불린 유생은 정은을 한번 보고 제 앞만 보았다. 문중에서 제일 낫다던 젊은 사람이었다. 그의 집 어른은 인파 뒤에 서 있다가 방방관이 나머지 이름을 부르는 중에 돌아갔다. 정은은 그쪽을 따라 보지 않고, 지난번 받은 홍패를 품에서 꺼내 자기가 지닌 것이 온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두 줄의 시관이 함께 읽었고, 각자가 확인한 표에도 이름을 올렸소. 결과를 아뢰어라."
예지가 이르자 예조 당상이 앞으로 나왔다.
"독권과 등급 확인을 마쳤사옵니다. 이견을 낸 곳도 다시 살폈으며, 장원으로 나정은을 정하였사옵니다."
"문중에서 나온 시관들도 같은가?"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처음 내린 홍패를 거둘 까닭도 없겠구나."
예지는 정은을 보았다. 잘했다는 말을 더 해 주고 싶었는데, 뒤에는 제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급제자들이 있었다. 정은도 돌아가려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제 시험을 치르며 허리를 펴지 못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밤사이 제대로 쉬었는지도 모르는데 또 붙들고 서 있게 할 수는 없어, 예지는 다음 시권을 받으려는 방방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오늘은 몸을 쉬어라."
"명 받들겠사옵니다."
정은의 눈이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예지는 그 눈에 웃음이 있는 것을 보고서야 제 입가도 풀었다. 담 밖에서 누군가 나정은의 이름을 다시 읽었다. 곧 방이 나붙을 터였다.
창명을 마친 뒤 시소의 서리가 정은을 불렀다. 시권을 베껴 공개할 곳을 확인하려는 중이었다. 다른 급제자들도 처마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차석으로 불린 유생이 정은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가 곧 다시 앞을 막았다.
"그대의 글을 볼 수 있겠소?"
"제게 돌려준 것이 없어 지금은 못 보여 드리오. 저기 가시면 같은 답을 들으실 테지만, 기다리면 베낀 것을 준다 하였소."
"시관에게 들었소. 그대가 올린 예가 좋았다더군. 그런데 백성의 진술을 받아 두면 관원이 잘못한 것을 알 수 있다니, 그것도 결국 사람이 거짓말을 안 한다고 믿고 쓴 글이겠소."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자기 말을 적어 놓으면 전과 다르게 말하기 어려워질 때가 있소. 안 속는 법까지 알아내서 적었으면 저는 지금 여기 서 있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있겠지요."
"잘난 체하지 마시오. 묻고 있잖소."
정은은 대답하려다 그가 쥔 종이를 보았다. 글을 대조할 생각으로 가져온 모양이었다. 구겨진 모서리를 손톱으로 펴는 모습을 보니, 화만 내다가 돌아갈 사람 같지는 않았다.
"저도 답하고 있소. 무엇을 물으시는지 좀 더 말씀하시오. 글을 안 보고 들은 말로 물으시면 제가 쓰지 않은 것까지 답해야 하오."
"그대의 글을 좋게 보려고 읽은 사람이, 다른 글의 허물만 찾으면 어찌하오. 사람의 마음이 들어간 곳에는 같은 문장도 달라 보이지 않소. 그대가 그 마당에서 겪은 일이 있으니, 시관들도 그대를 불쌍히 여겼을 수 있겠지."
"그 말씀을 제게 묻는 이유는 무엇이오? 제가 불쌍히 봐 달라고 빌었는지 알고 싶으시오, 아니면 시관께서 무슨 마음으로 붓을 드셨는지 제게 물으시오?"
"불쌍히 봐 달라하지 않았어도 그리 보이는 사람이 있소. 나는 그대를 탓하려는 마음으로 말한 것이…, 괜히 말을 빼앗지 마시오. 아직 다 하지 않았소."
"다 하시오. 기다리겠소."
유생은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벗들이 듣고 있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정은 쪽으로 몸을 돌려 등을 가렸다. 정은은 그가 얼마나 낮춰 말하든 들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의 비밀을 받아 줄 마음이 없었다.
"나는 글을 오래 읽었소. 어른들께서 같은 글을 고쳐 주신 적도 많소. 틀렸다고 하신 대목은 밤을 새워 다시 썼고, 다음에 같은 흠을 듣지 않으려고 외웠소. 대감님께서는 이번에는 네가 첫자리에 설 것이라고 하셨소. 그 말을 듣고 여기 왔고."
"그것은 저도 알 수 없는 일이오. 대감님께서 그대의 글을 읽고 하신 말이라면 그대가 그분께 다시 여쭈어 보시오. 오늘 같은 물음이었다고 말씀드리고."
"그대는 누구에게 그렇게 물었소? 누구에게 글을 보이고 왔기에, 시제가 바뀌어도 그렇게 쓰오?"
"바카라을 빌려 준 사람이 있소. 글을 써 보이면 너무 길다고도 했고, 물은 데서 멀리 갔다고도 했소. 저도 그 말이 싫어서 다시 안 가져간 적이 있소. 오늘은 쓴 것을 보여 주기 전에 과장으로 가져왔고."
"그러면 소문대로 그 사관이 가르쳤구려. 그분이 시제를 아실 수 있지 않소."
정은은 뒤에 선 서리를 보았다. 서리는 급제자들의 이름을 대조하다가 두 사람의 말이 멎자 고개를 들었다. 정은은 차석 유생에게 말을 다시 하라고 했다.
"그 사관이 시제를 가져와 제게 일러 주었다고 말씀하실 것이면, 이름을 걸고 시소에 올리시오. 제 글을 보고 싶다 하셔서 답했는데 제 친구의 관직까지 끌고 들어오시면 여기서 마칠 수 없소."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 내가 보았다는 말은 안 했소. 그 정도 물음도 못 받으시오?"
"받고 답했소. 보셨으면 올리시고, 못 보셨으면 누구에게 들었는지 말씀하시라고. 그대는 제가 그렇게 물으면 화부터 내시는데, 저는 왜 웃으며 전부 답해야 하오?"
"내가 언제 웃으라 하였소."
"아까부터 제가 어떤 얼굴로 대답하는지도 살피시니 한 말이오. 제가 세 번 고개를 숙여 대답하면 그대가 오늘 쓴 글의 등급이 달라지겠소?"
유생의 귀가 붉어졌다. 예지는 감독석을 정리하는 내관 곁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개입할까 하다가 서리가 둘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기다렸다. 저 청년에게도 억울한 마음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은이 자기 장원을 두고 그 마음까지 풀어 줄 의무가 생기지는 않았다.
"나는 그대의 글을 보고 싶었을 뿐이오. 말을 지나치게 했소. 사관이 시제를 알려 주었다고 아뢰지는 않겠소. 그대도 내 말을 과장해서 옮기지 마시오."
"제가 옮길 말을 걱정하시면 지금 들으신 대로 기억하시면 되오. 저는 그분에게 바카라을 빌렸고 제 글을 보여 드린 적이 있다고 하였소. 시제를 받았다는 말은 그대에게서 처음 들었소."
"그만하시오. 사과한 말까지 이렇게 붙들면 끝이 없소."
"끝내고 싶으시면 끝내시오. 저는 오늘도 여기서 기다릴 사람이 있소."
정은은 서리에게 다가갔다. 유생이 돌아갈 듯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자기 시권을 기억나는 대로 적었다고 했다. 정은은 받지 않고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올린 예요. 전례가 오래되었으면 그곳에서 그 전례를 따르는 데 익숙한 사람이 많으니, 갑자기 바꾸기 전에 고을의 어른에게 물어야 한다고 썼소. 내 집에서는 늘 그렇게 해 왔소. 누군가 불편하다고 하면 먼저 이웃에게 같은 일을 겪었는지 물었고."
"그 집의 어른이 잘못한 일도 그분에게 먼저 묻는 것이오?"
"그 자리에 앉아 남의 집 다툼까지 들어 주는 분들이오. 자기 집에서 잘못했으면 먼저 꾸짖는 어른도 있소. 나는 그분들의 양심을 믿고 썼습니다."
"그렇게 답하면 그대가 제 글에 물으신 것과 같아지는 것 같소. 저는 백성의 진술을 믿었다고 하셨고, 그대는 고을 어른의 양심을 믿었다고 하시니. 그다음에 틀린 말을 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적으셨습니까?"
"여러 어른에게 물으면 되지 않소. 한 사람 말만 들으라고 쓰지는 않았소."
"그 어른들이 서로 같은 집안이면요? 고을에서 제일 큰집이 내놓은 말에 나머지가 따랐다면, 그 뒤에는 어디에 물으라 적으셨소?"
유생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정은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채윤이 제 글을 이렇게 읽어 줄 때도 자신이 옆에 서서 고개를 들고 있곤 했다. 틀린 말이라서 싫은 날도 있었고, 채윤의 말이 맞아 더 싫은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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