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열리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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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라한

17. 열리는 문

파루 서른세 번이 다 울고 나서도, 예지의 귀에는 그 마지막 타가 오래 남았다. 오늘이 그날, 별시 날 아침이기 때문이었다. 도성의 하루가 종으로 열리자, 운종가는 소리부터 깨어났다. 좌판 다리 펴는 소리와 나귀 방울과 물지게꾼의 외침이 골목마다 부딪혔고, 장국 끓는 냄새가 아침 안개에 섞여 흘렀다. 그 소음을 헤치고 온 유생들이 과장 문 앞으로 길게 줄을 늘였다. 저마다 옆구리에 시권을 끼고 있었는데 종이의 크기며 두께가 제각각이라, 줄 전체가 들쑥날쑥한 담장처럼 보였다. 구경 나온 저자 사람들이 그 담장 곁에 또 한 겹 담을 쌓고 있었다.

"구현이라며. 세자께서 여신 시험이라지."

"한데 계집도 본다는 소문이 있던걸."

"예끼, 실없는 소리."

줄 끝에는 미처 시권을 마련하지 못한 유생 하나가 지물전 심부름꾼을 붙들고 흥정을 벌이는 중이었고, 문 곁의 군졸은 창을 세워 둔 채 하품을 씹고 있었다.

담 안쪽에는 멍석이 줄 맞춰 깔리고 구석마다 물동이가 놓였다. 붐비는 것은 녹명소 앞이었다. 상 위에 사조단자가 한 장씩 놓이면 서리가 사조의 이름 넷을 차례로 짚어 명부에 옮겼고, 보단자의 보증인까지 맞춰 본 뒤에야 사람이 안으로 들었다. 종이가 사람보다 먼저 문을 지나는 아침이었다.

감독석은 차일 아래 높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좌우로 예조의 시관들이 늘어앉았는데, 그 가운데 낯익은 얼굴 하나가 끼어 있었는데, 선유명이었다.

'…하필.'

예지는 인사를 받는 낯을 그대로 둔 채, 속으로만 한숨을 접었다. 예조 당상이 별시 시관으로 나오는 것이야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한 것은 저 얼굴을 볼 때마다 족보 생각부터 나는 제 처지였다. 몇백 년 뒤 제 성씨의 첫머리에 앉아 있는 사람. 지난 과장에서 어서 쫓아내라 외치던 그 목소리의 임자. 조상님 얼굴을 마주 보며 조상님과 싸울 채비를 하는 아침이라니, 족보 정리가 안 되는 것은 저쪽이 그쪽인지 이쪽인지 모를 일이었다.

"저하께서 다시 친히 감독석에 오르시니, 유생들 복이 많사옵니다."

늙은 시관 하나가 덕담을 얹었다. 선유명은 덕담 대신 예만 갖추었는데, 갖춘 예의 각이 지나치게 발라서, 오히려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복이 될지는 해가 져 봐야 알겠지."

예지는 웃음기를 조금만 얹어 받아넘기고, 개장 전에 시관과 서리들을 한 번 둘러 세웠다.

"녹명은 법도대로 한다. 사조단자며 보단자며 갖춰진 자는 누구든 명부에 올리고, 올리기를 막으려거든 막는 조문부터 내게 가져오라. 명부는 개장 전에 내가 끝줄까지 볼 것이다. 조문 없이 막는 손이 있으면, 그 손은 오늘 상석이 잡는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서리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시관들 사이로 눈길 몇 개가 오갔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없었다. 선유명의 눈이 그 말 위에 잠깐 얹혔다가 내려갔다. 속을 읽히지 않는 눈이었는데, 무언가 재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자리에 앉자, 이 자리가 두 번째라는 사실이 등받이의 감촉으로 먼저 왔다.

처음 앉았던 날에는 담 너머에서 여인 하나가 몸을 던졌고, 장내가 뒤집혔고, 매질 소리와 찢어지는 종이 소리가 차일 밑까지 올라왔다. 그날의 저는 이 자리에 굳은 채 앉아, 내릴 명을 손에 쥐고도 내리지 못했다. 시험을 시작하자, 떨리는 목소리로 그 한마디를 뱉은 것이 그날 한 일의 전부였다.

오늘은 그 마당에 같은 사람이 온다. 이번에는 문이 열려 있고, 명부가 기다리고, 상석에는 그날 못 한 일을 하러 온 사람이 앉아 있다.

'긴장이 안 되면 거짓말이고. 그런데 이상하네. 그날은 무서웠는데, 오늘은….'

오늘은, 무서움보다 기다림이 앞서 와 있었다. 시험 전날의 수험생이 하는 긴장이 있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사람의 긴장이 있다면, 오늘 것은 후자에 가까웠다. 붙을 사람을 알고 기다리는 발표 같은.

예지는 소매 속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끝에 매끈하고 잘록한 것이 잡혔다. 손바닥에 쏙 드는 작은 모래시계, 위아래 유리 통을 가는 허리가 잇는 물건이었다. 동궁 문갑 깊숙한 데서 나온 것으로, 이 몸의 주인이 꽤 아꼈던 눈치였다. 서랍 맨 안쪽, 비단 조각에 몇 겹을 싸 둔 품이 그랬다. 처음 풀어 봤을 때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제가 들고 있던 그것과, 유리의 허리며 통의 생김이며, 똑같아도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몇백 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물건이 두 개라는 게 무슨 뜻인지, 예지는 여태 답을 얻지 못했다. 얻은 것은 버릇 하나뿐이었다. 큰일을 앞둔 날이면 이것을 소매에 넣고 다니는 버릇이었다.

'너도 오늘은 일 좀 해라. 시간, 곱게 좀 흘러가게.'

개장을 알리는 북이 한 번 울렸다.

*

유생들이 차례로 들어와 멍석 위에 자리를 잡았다. 녹명소 앞 줄은 눈에 띄게 짧아져 갔고, 줄이 짧아질수록 예지의 눈은 자꾸 문 쪽으로 갔다.

문으로는 갓 쓴 머리들만 이어졌다. 비슷한 키에 눈이 갔다가 남이었고, 닮은 걸음에 허리를 세웠다가 또 남이었다.

'안 오나. …아니지, 아직이지. 아직인 거지.'

모래시계를 소매에서 꺼내 무릎께로 내리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뒤집었다.

모래가 가는 허리를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위 칸이 줄어드는 만큼이 시간이었다. 위 칸의 모래가 반쯤 내려앉는 동안 문은 여러 번 열렸고, 열릴 때마다 남의 얼굴이었다. 모래는 보고 있으면 더 빨리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는 줄 알면서도 자꾸 남은 양부터 재게 되어서, 도로 소매에 넣어 버렸다. 넣고 나니 이번에는 소매 안에서 떨어지고 있을 모래가 자꾸 그려졌다. 넣으나 꺼내나 마음이 모래가 된 것은 매한가지였다.

'좁은 방에서 한 그 대답을 무르기로 했나. 일단, 이라던 그 일단이 설마 여기까지인가.'

'아니지. 그 밤의 눈을 봤잖아. 방문이랑 붓꽂이 사이를 오가다가, 마지막에 어디 가서 앉았는지도 봤고. 그 눈을 하고서 안 오는 사람은 없어. …없어야 하고.'

'그리고 채윤도 안 보이잖아. 보증인이 응시자를 두고 저 혼자 올 리는 없고. 그러니까 둘이 같이 있다는 거고. 같이 있는데 늦는다? …왜? 어디서? 뭘 하느라?'

생각이 이상한 데로 새려는 것을 예지는 도리질로 털어 냈다. 지금 따질 것은 그쪽이 못 되었다. 못 되는 줄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 그 옆에 가서 앉았다.

곁에 시립한 권신이 먼저 낮게 불렀다.

"저하."

턱 끝이 문 쪽 골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아무 소리도 없는 골목이었는데, 검 찬 사람의 귀는 다른 모양이었다. 예지가 그쪽을 보는 사이, 곁의 늙은 시관도 조심스레 물었다.

"저하, 무엇을 기다리시옵니까."

"글."

예지는 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답했다.

"오늘 여기 와야 할 글이 하나 있네."

"글이라 하오시면… 유생을 기다리신다는 말씀이온지요."

"글하고 유생하고 같이 오겠지. 오면 시관도 알 것이네."

"별시에 늦는 유생이 다 있겠사옵니까."

"있으면 큰일이지. 그러니 이렇게 기다리는 것이네."

시관은 더 캐지 못하고 물러앉았다. 선유명 쪽에서는 아무 말도 오지 않았는데, 그 아무 말 없음이 자꾸 귓가에 걸렸다. 과장의 그 계집을 기억하시오, 하던 말이 어느 사랑방을 돌았다는 이야기는 예지의 귀에도 흘러 들어와 있었다. 소문의 출처를 짚자면 짚이는 데가 없지 않았고, 짚이는 그 얼굴이 지금 시관석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녹명소의 서리가 상 정리를 시작했다. 시각이 차 간다는 뜻이었고, 군졸이 목청을 뽑았다.

"시각이 다 되었소오. 문 닫소오"

말 떨어지기 무섭게 군졸 둘이 문짝에 손을 붙였다.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절반쯤 밀렸을 때였다.

골목 쪽에서 발소리가 먼저 왔다. 하나가 이끌고 하나가 따르는, 급하게 엇갈리는 두 사람 몫의 발소리였다.

이어서 갓 하나와, 쓰개도 없이 드러난 여인의 얼굴 하나가 아침 볕 속으로 뛰어나왔다. 채윤이 앞장서 길을 열고 있었고, 그 손에 정은의 손이 잡혀 있었다. 정은의 다른 팔에는 보퉁이 하나가 안겨 있었는데, 뛰는 내내 놓칠세라 가슴에 바짝 붙어 있었다.

'왔다!'

안도가 먼저 왔고, 그다음 것이 반걸음 늦게 도착했다.

'…손. 손을 잡았네. 잡고 뛰네. 내 앞에서는 소맷자락 스치는 것도 조심하던 인간이. 아니 지금 그게 문제냐, 왔으면 됐지. 됐는데, 됐는데 왜 이렇게 안 됐지.'

생각은 거기서 끊고, 예지는 몸을 일으켜 군졸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문 여시오오-."

반쯤 밀렸던 문이 무거운 소리와 함께 도로 활짝 열렸다.

문턱 앞에 이르러 정은이 스스로 걸음을 늦추자, 잡혔던 손이 풀렸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매무새를 손끝으로 한 번 훑고, 그러고서 정은은 제 발로 한 걸음씩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장내의 소리가 한꺼번에 꺼졌다.

붓 내려놓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졌다가, 다음 순간 반대편 구석에서부터 웅성거림이 번져 왔다.

계집이다, 하는 말이 어디선가 났다. 한 번 나온 말은 여기저기서 겹쳐 일었고, 겹칠수록 커졌다. 붓을 떨어뜨리는 자가 있었고, 옆자리를 붙들고 캐묻는 자가 있었다.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계집이-."

"아녀자가 성현의 글을 다루겠다는 것인가!"

"나가세. 이런 자리에 붓을 적실 셈인가."

"시권을 물리시오! 부정 탄 시험이오!"

"말들 삼가시게. 저하께서 친림하신 자리일세."

멍석을 걷어차고 일어나는 자들이 나왔다. 시권을 도로 말아 쥐고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등도 몇 보였다. 어느 갓 쓴 자는 감독석을 향해 삿대질 비슷한 손짓을 하다가 곁의 벗에게 팔을 붙들렸다. 지난번 그 소란이 그대로 되감기는 듯한 광경이었는데, 되감기지 않는 것이 딱 둘 있었다. 문이 열려 있다는 것과, 그 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이번에는 매를 맞지 않고 제 발로 걷고 있다는 것.

정은이 지나는 자리마다 고개들이 물결처럼 따라 돌았다. 정은은 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곧장 녹명소 앞에 섰다. 치맛단에 흙이 튀어 있었고 어깨가 숨으로 오르내렸는데, 상 앞에 서는 자세만은 반듯했다.

서리가 어쩔 줄 몰라 시관석을 올려다보았다. 시관 몇이 감독석을 건너다보았다. 예지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녹명을 마친 자가 명부에 오르고, 명부에 오른 자가 응시한다. 그것이 과장의 법도다."

일부러 낮추지 않은 목소리였다. 차일 아래에서 장내로 내려간 그 말에 앞줄부터 소리가 잦아들었다.

"오늘 방문에 응시를 금한 자는 없다. 나갈 자는 막지 않되, 문은 닫지 않는다. 붓을 들 사람은 붓을 들라."

군졸들이 문짝에서 손을 뗐다. 열린 문으로 아침 볕이 길게 들어와 마당을 갈랐다.

그 볕을 등지고, 시관석의 선유명이 몸을 일으켰다.

"저하."

예를 갖춘, 그러나 물러설 자리는 남기지 않은 음성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여인의 녹명은 국초 이래 전례가 없사옵니다. 과장의 법도를 말씀하시오나, 법도란 조문에만 있는 것이 못 되옵고 전례에도 있는 법이옵니다. 지난번 과장에서도 소란이 한 번 있었사온데, 오늘 이를 받으시면 그 소란이 법이 되옵니다."

장내가 다시 술렁했는데, 이번 술렁임은 아까와 결이 달랐다. 구경의 술렁임에서, 어느 쪽에 설지 재는 술렁임으로.

'나오셨다, 조상님.'

예지는 숨을 하나 고르고, 그 물음을 정면으로 받았다. 밤새 다듬어 온 답이 있는 자리였다. 다듬는 동안 몇 번이고 마주 앉혔던 얼굴이 바로 저 얼굴이기도 했다.

"전례가 없다 하였는가."

"그러하옵니다."

"전례가 없는 것과 법이 금하는 것은 다르다. 경국의 법 어느 조가 여인의 녹명을 막는가. 막는 조문이 있거든 지금 이 자리에서 읽으라. 내 물러나 앉겠다. 읽지 못하겠거든, 경도 법도대로 하라."

선유명의 입이 잠깐 다물렸다. 다물린 입가에 무언가 고였다 삼켜졌다.

"…. 조문에는 없사오나."

"조문에 없으면 막을 근거가 서지 않는다. 전례가 없다는 말은 오늘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하면 안 된다는 말이 못 된다. 전례란 언제고 누군가의 오늘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하오면 저하. 오늘 이 일이 전례가 되어, 훗날 팔도의 여인들이 저마다 붓을 들고 과장으로 몰려들면 어찌하시겠사옵니까."

"몰려들 만큼 재주가 많다면 나라의 복이지. 경은 그것이 두려운가, 아까운가."

선유명의 미간이 알아챌 듯 말 듯 좁아졌을 뿐이었다. 답이 오기 전에 예지가 목소리를 반 켜 낮추었다. 낮아진 만큼이 오히려 더 멀리 갔다.

"그리고 경은 지난 과장을 말했다. 그날의 소란을 나도 기억한다. 그날 이 자리에는 내릴 명이 있었는데, 내리지 못한 사람이 앉아 있었지."

그날 쫓아내라, 소리치던 사람이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내지 않아도, 선유명의 눈꺼풀이 한 번 느리게 감겼다 뜨였다.

"오늘은 내린다. 녹명을 받으라."

명은 서리를 향한 것이었는데, 마당 전체가 그 명을 받았다. 서리가 허리를 굽히고 상 앞으로 도로 앉았다. 선유명은 그 자리에 선 채 잠깐 세자를 건너다보았다. 입이 무어라 더 이으려는 듯 벌어졌다가, 쫓아, 까지도 못 가서 도로 다물렸다. 지난 과장에서는 나왔던 말이 오늘은 나오지 못했다. 그날과 오늘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그 답이 지금 상석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 법도대로 하겠사옵니다."

"오늘의 일은… 조정이 오래 기억할 것이옵니다."

덧붙인 한마디는 감독석까지만 오는 크기였다. 선유명이 도로 앉는데, 옷자락을 여미는 손이 필요 이상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물러선 것과 거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그 손이 말하고 있었다.

*

녹명소 상 위에, 정은이 품에서 꺼낸 것들이 차례로 놓였다.

먼저 시권. 귀퉁이가 조금 눌린 것 말고는 흠 없는 새 종이였다. 다음으로 접힌 종이 두 장, 사조단자와 보단자가 나란히 펴졌다.

사조단자의 먹빛이 유난히 짙었는데, 이제 갓 마른 먹의 빛이었다. 간밤을 넘겨 새벽에야 쓰인 글씨라는 뜻이었다. 아비와 할아비와 증조와 외조의 이름이 반듯한 해서로 내려 적혀 있었는데, 획 하나하나에 힘이 골라서, 쓴 사람이 그 이름들 앞에서 얼마나 오래 붓을 들고 앉아 있었을지가 먹빛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 잠긴 문 안쪽의 음성을, 이 사람은 새벽까지 한 자 한 자 종이 위에 도로 세운 것이다. 저를 지운 이름들을 제 손으로 적어서, 제가 아직 그 이름들의 딸이라는 것을 문서로 증명하는 일. 늦은 까닭을 예지는 그 먹빛에서 읽었고, 읽고 나니 늦었다는 말이 우스워졌다. 어떤 걸음은 늦은 것이 빠른 것이다.

서리가 명부를 펴고 붓을 들었는데, 들고서도 잠깐 손이 허공에 떴다.

"서, 성명이…"

"나정은이오."

"거, 거주는…."

"남촌이오."

떨린 것은 묻는 서리 쪽이었고, 답하는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좁은 방에서 밤에 나왔던 이름이, 이제 볕 아래에서 나왔다. 서리의 붓이 명부 끝줄에 그 석 자를 올렸다. 나, 정, 은. 획이 하나씩 그어질 때마다 장내의 웅성거림이 한 눈금씩 낮아지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종이에 적히고 있는 것을 지우는 방법을, 이 마당의 누구도 알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보단자로 넘어간 서리의 눈이 보증인 자리에서 멎었다.

"보증인…. 예문관, 채윤."

낮게 읽었는데도 그 넉 자는 앞줄까지 갔다. 예문관, 하는 소리가 유생들 사이를 한 바퀴 돌았다. 궐의 관원이 제 이름을 걸었다는 사실이 주는 무게가 따로 있었다. 문가에 섰던 채윤이 그 눈길들을 정면으로 받으며 한 걸음 나섰다.

"예문관의 채윤이옵니다. 응시자의 보단자에 이름을 얹은 몸이라, 문 앞까지 인도하였사옵니다. 늦은 죄는 소인이 함께 청하옵니다."

"문이 열려 있었으니 늦은 것이 없고, 죄도 없다. 보증인은 응시가 끝날 때까지 문가를 지키게. 보단자에 제 이름을 건 자의 소임이다."

"새기겠사옵니다."

그리 답하는 채윤의 낯이 담담했다. 담담해서, 저 이름 석 자를 보단자에 적을 때 무엇을 걸었는지가 도리어 더 크게 보였다. 동궁 곁에 누가 드나드는지 소상히 알아야겠다던 어느 사랑방의 말이, 오늘 이 종이 한 장으로 절반은 밝혀진 셈이었다. 알면서도 적어 넣었다는 뜻이었다. 그 담담한 낯을 예지는 잠깐 보다가, 셈 하나를 조용히 고쳐 적었다. 지켜야 할 종이가 한 장에서 두 장이 된 셈이라고.

인적을 적은 자리가 접히고 봉해졌다. 봉미가 끝나자 서리가 목청을 가다듬어 관행대로 길게 외었다.

"녹명, 마쳤소이다아-"

정은이 감독석을 향해 몸을 돌리고, 허리를 굽혔다. 깊지도 얕지도 않은, 응시자가 시관에게 하는 꼭 그만큼의 예였다. 사사로움을 한 톨도 얹지 않은 그 각도가, 오늘 이 마당에서 정은이 고른 자리를 말해 주고 있었다. 은혜 입은 여인이 서는 자리가 못 되고, 녹명 마친 응시자가 서는 자리.

몸을 일으킨 정은의 눈이 아주 잠깐 채윤에게 갔다. 눈짓이랄 것도 없는, 스치는 길이였다. 그 짧은 사이에 무슨 문장이 오갔는지 예지는 이번에도 읽지 못했고, 채윤의 입가만 보일 듯 말 듯 풀렸다 돌아왔다.

'또 저 둘만 아는 말 하네. 통역 좀.'

정은은 빈자리 가운데서도 하필 맨 앞줄, 방금 누가 박차고 나간 자리로 걸어갔다. 걷어차여 밀린 멍석을 제 손으로 반듯하게 펴고,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보퉁이에서 벼루와 붓을 꺼내는데, 그 붓이 낯익었다. 좁은 방 붓꽂이에서 혼자 자리가 다르던, 옻자루가 손에 길든 그 한 자루였다.

곁줄의 유생이 멍석째 슬금 물러나며 낮게 구시렁댔다.

"…하필 바로 옆일세, 옆."

정은은 돌아보지도 않고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먹 가는 소리가 사각사각, 제 몫의 자리를 넓혀 갔다. 웅성거림이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장내에서, 그 자리만 먼저 시험장이 되어 있었다.

문 앞까지 걸어 나갔던 자들 가운데 하나가 그 모습을 한참 건너다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곁의 벗이 소매를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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