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6. 두 번 죽은 사람
두 번, 이라는 말이 방바닥에 내려앉은 뒤로 한동안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문살에 들던 주홍빛이 반 자쯤 미끄러지는 동안, 소반 위 냉수 그릇의 물낯만 가늘게 흔들리다 잦아들었다. 채윤은 무릎 위에 만 옷자락을 쥔 채 굳어 있었고, 예지는 무어라 받아야 할지 몰라 그 말을 받은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위로를 얹자니 가벼울 것 같고, 캐묻자니 무거울 것 같은 말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말을 꺼낸 쪽이었다.
"하나는, 저하께서 보셨사옵니다."
여전히 담담한,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목소리였다.
"과장 마당에서 죽은 것이 그 하나이옵니다. 붓을 쥐고 글을 짓는 나정은은 그날 그 마당에서 끝났사옵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방금 말씀드린 그 문이옵니다. 잠긴 대문 밖에서, 그 집 딸이던 나정은도 끝났사옵니다."
같은 날 낮과 밤에 한 번씩. 손가락을 꼽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데, 문장마다 자로 잰 듯 반듯해서 듣는 쪽이 오히려 숨을 고르게 되었다.
'같은 날에, 두 번을.'
예지는 과장의 그날을 안다고 여겨 왔다. 상석에서 내려다본 소란, 몽둥이, 끌려 나가던 등. 그런데 그 하루의 밤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는 오늘 처음 듣는 참이었다. 아는 줄 알았던 하루가 실은 반쪽이었다.
"그 밤 이야기를, 마저 들어도 되겠는가."
정은이 예지를 잠깐 건너다보았다. 무엇을 다는 눈인지, 이번에는 짐작이 갔다. 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을 다는 눈은 지나갔고, 들은 뒤에도 자세가 같을지를 다는 눈이었다.
"길지 않사옵니다."
소반 모서리에 얹었던 손끝을 거두어 무릎 위에 포개고, 베끼다 만 글을 마저 읽듯 이야기를 이었다.
*
잠긴 문 앞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는 저도 모른다고 했다.
담 안쪽의 음성이 그치고, 불이 꺼지고, 개 짖는 소리도 잦아들고, 그러고도 한참을 서 있었다는 것이다. 문을 두드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두드려서 열릴 문이면 애초에 잠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문의 옹이 하나를 눈에 담고 서 있는데, 어느 결엔가 그 옹이가 낮에 본 과장 문의 옹이와 겹쳐 보이더라고 했다. 하루에 문이 두 번 닫힌 셈이었다.
"이상하지요. 그때 든 생각이, 서럽다도 무섭다도 못 되고, 갈 데를 셈하고 있었사옵니다. 이 시각에 여인 혼자 갈 수 있는 데가 어디인가, 하고."
발을 뗀 것은 초경 종이 울리고 나서였다고 했다.
초경에서 이경 사이, 거리가 여인들 몫이 되는 두 시진. 우물가에 웃음이 고이고 장옷 자락이 골목을 오가는 그 시각이, 그 밤의 정은에게는 다른 뜻이었다. 여인 혼자 걸어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시간. 갈 데 없는 사람이 갈 데 없다는 것을 들키지 않고 걸을 수 있는, 하루치의 틈이었다.
"두 시진을 꼬박 걸었사옵니다. 어디로 가는 걸음이 못 되고, 서 있지 않으려는 걸음이었사옵니다. 서면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나면... 그날 밤은 생각을 이길 자신이 없었사옵니다."
'여인들의 시간이라는 게, 이 사람한테는 그런 거였구나.'
예지는 잠행의 밤에 본 그 거리를 떠올렸다. 웃음소리가 환하다고만 여겼던 두 시진이었다. 같은 시각 같은 골목을, 웃는 사람과 우는 사람이 나란히 걷고 있었을 것이다. 환하다고 본 것은 담 밖에 선 구경꾼의 눈이었다.
이경 종이 울리면 그 틈마저 닫혔다. 종이 울리기 전에 여인들은 하나둘 집으로 스몄고, 스밀 집이 있는 사람들이 다 스미고 나면 거리에는 순라의 등불과, 스밀 데 없는 사람만 남았다.
"첫 밤은 성밖 물레방앗간에서 새웠사옵니다. 물 도는 소리가 밤새 그치지 않아서... 좋았사옵니다. 소리가 있으면, 소리에 묻어 둘 수 있는 것들이 있사옵니다."
무엇을 묻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입에 올린 것보다 올리지 않은 것이 많은 대목마다, 정은의 시선은 소반 위 어느 한 점에 내려가 있었다.
낮에는 저자 구석에서 언문 편지를 대신 써 주고 몇 푼을 벌었다고 했다. 군역 나간 아들에게 보내는 안부며, 시집간 딸에게 이르는 잔소리며. 남의 어미가 남의 자식 걱정하는 말을 받아 적다 보면 어느 대목에서는 꼭 제 이야기를 적는 것 같더라는 말을 하면서, 정은의 말끝이 처음으로 살짝 젖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보고 싶다, 밥은 먹었느냐. 그런 말은 누구의 것으로 적어도 같은 모양이어서."
그 며칠 사이에 벗의 집 앞까지 간 밤도 있었다고 했다.
"골목 어귀까지 갔다가, 돌아섰사옵니다."
"어찌."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 몫의 짐이 있사옵니다. 소인이 그 문을 두드리면, 소인의 일이 그 사람의 일이 되옵니다. 그날 과장에서 소인을 아는 낯을 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 사람부터 상하는 판이었사옵니다."
문가에 앉은 채윤의 고개가 그 대목에서 조금 더 내려갔다. 예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벗의 문 앞까지 갔다가 벗을 위해 돌아서는 밤과, 그 밤을 여태 몰랐을 벗. 그 사이에 낀 이야기를 지금 처음 듣는 것은 저 하나가 아닌 눈치였다.
일이 난 것은 나흘째 밤이라고 했다.
낮에 번 것이 적어 성밖까지 나가는 다리품을 아끼려다, 이경 종을 길에서 맞았다. 여인들이 스미고 난 골목은 삽시간에 결이 바뀌었다. 등불도 웃음도 걷힌 자리에 남는 것은 어둠과, 어둠을 믿고 나다니는 자들이었다.
"골목 어귀에서 사내 둘과 마주쳤사옵니다. 술이 덜 깬 걸음이었고, 통금의 밤에 여인 혼자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자들이 소인보다 먼저 셈을 마친 눈이었사옵니다."
그 어조는 거기서도 평평했다. 평평한 것이 도리어 그 밤의 어둠을 짙게 만들었다. 담벼락을 등지고 물러서는데 등 뒤가 막다른 담이더라는 것, 손에 쥔 것이라고는 붓 한 자루뿐이더라는 것. 붓을 쥔 죄밖에 없다던 사람이, 그 밤에는 붓을 쥔 채 담에 몰려 있었다.
"소리를 지르면 순라가 올 것이고, 순라가 오면 통금을 어긴 여인부터 묶일 것이었사옵니다. 소리도 못 지르는 밤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그 담 밑에서 알았사옵니다."
예지는 무릎 위의 제 손을 고쳐 쥐었다. 치미는 것이 있는데 얹을 데가 없었다. 그 밤의 골목에 저는 없었고, 저 대신 그 골목에 먼저 당도한 사람이 있었다.
"그때 골목 안쪽에서 발소리가 왔사옵니다."
한달음에 달려오는 발소리였다고 했다. 그리고 뽑히다 만 환도 하나가, 달빛을 반토막 물고 사내들과 저 사이를 갈랐다는 것이다.
"칼끝이 떨리고 있었사옵니다. 자세도, 바카라에서 본 것을 흉내 낸 티가 났사옵니다. 하온데 그 떨리는 칼이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아서... 사내들이 먼저 물러났사옵니다."
칼을 쥔 사람이 누구였는지, 정은은 이름을 대지 않았다. 대지 않는 것으로 이미 다 말한 셈이었다. 예지의 시선이 저절로 문가로 흘렀다. 채윤은 이야기가 저를 지나는 동안 한 번도 거들지 않았는데, 그 대목에서만 귀 끝이 붉어진 것이 어둑한 방에서도 보였다.
"나흘을 찾아 헤맸다고 하였사옵니다. 과장의 소식을 듣고, 그날 밤부터."
퇴청이 부쩍 빨라졌다던 며칠이 예지의 머릿속에서 소리 없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서연에서 눈인사가 고작이던 날들, 활터의 오후가 끊긴 자리. 그 며칠 동안 이 사람은 밤마다 도성의 골목을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그 며칠을, 얼굴 못 보는 셈이나 하며 보냈다.
"이 집도, 이 방의 일감도, 그 사람이 놓아 준 줄이옵니다. 빈집을 세 얻어 주고, 글 아쉬운 집들에 소인의 글씨를 들여보내 주고. 철 바뀔 때마다 앓는 것까지 기억해서는... 번번이."
번번이, 에서 정은의 말이 멎었다. 미안해서 어쩌나, 하던 그 밤의 말소리가 그 자리에 겹쳐 들리는 듯해서, 예지는 짐짓 소반의 냉수로 눈을 내렸다.
"어릴 적, 한 고을에서 자랐사옵니다. 그 사람 집 담과 저희 집 담이 붙어 있었사옵니다. 글을 먼저 뗀 것은 소인이고, 담 너머로 그 글을 받아 간 것이..."
"정은아."
낮게 끼어드는 목소리가 이번에도 이름부터 나왔는데, 말리는 결의 부름이었다. 정은이 입을 다물고, 잠깐 벗을 보고, 그리고 고쳐 말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