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5. 아뢰옵니다.
"전하, 소자 아뢰올 것이 있사옵니다."
같은 말이 편전 안에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 부복한 채로 올린 말이라 소리는 방바닥을 타고 낮게 퍼졌고, 왕은 그 낮은 소리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등잔은 아까보다 심지가 줄어 있었고 서안 위 상소의 성곽은 그대로였는데, 다른 것은 왕의 자세 하나였다. 붓과 문서를 향해 있던 상체가 지금은 온전히 이쪽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격식은 다 갖췄구나. 일어나서 하라."
"이대로 아뢰겠사옵니다."
일어서면 아들이고 엎드리면 신하였다. 오늘 밤 필요한 것은 신하의 자리였다.
"고집도 갖췄고."
허락인지 핀잔인지 모를 소리가 건너왔다. 예지는 이마를 든 채 부복의 자세만 남기고, 숨을 고쳐 쉬었다. 여기서부터는 돌아갈 길이 없는 말들이었다. 돌아갈 길을 없애려고 부복부터 한 것이기도 했다. 엎드린 몸은 도망을 모른다.
"소자, 전하의 조정을 밖에서 보았사옵니다."
"밖에서."
"세자의 자리는 조정 안이면서 안이 못 되는 자리이옵니다. 어전 회의에 서지 않고 정사에 손대지 않으니, 보이는 것은 사람들뿐이옵니다. 하여 사람만 보았사옵니다."
"보았더니."
"전하의 조정에는 두 부류가 있었사옵니다."
말이 잠깐 멎은 것은 겁이 나서라기보다, 다음 문장의 무게를 저울에 다시 달아 보아서였다. 달아 보아도 무게는 줄지 않아서, 예지는 그대로 뱉었다.
"전하와 함께 일어선 사람과, 전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옵니다."
"두 부류라."
"예, 전하."
"세어 보기는 했느냐. 그 둘을 빼면 조정에 몇이나 남는지."
"…셈이 되지 않을 만큼 적사옵니다. 하여 아뢰는 것이옵니다."
편전의 공기가 그 말끝에서 조여들었다. 서안 너머에서 붓 놓이는 소리가 났다. 붓이 놓였다는 것은 문서 대신 사람을 보겠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일어선 이들은 이제 공이 크고 자리가 높아, 더 오를 데가 남아 있지 않사옵니다. 두려워하는 이들은 엎드려 일할 뿐 고개를 들 줄 모르옵니다. 하온데 전하와 더불어 새로 서 보려는 사람은, 소자의 눈으로는 찾지 못했사옵니다."
말하는 사이 얼굴들이 스쳐 갔다. 문안길에 마주치던 높은 갓들, 서연 뒤편에서 세자를 재던 눈들, 이름은 몰라도 결은 같던 얼굴들이었다.
"…혀가 제법 날카로워졌구나."
목소리에 노기는 없었다. 노기가 없어서 더 종잡을 수 없었다. 예지는 등줄기로 흐르는 것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 이 말, 밖에서 했으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란 말인데.'
그래서 밖에서 하지 않았다. 편전 안에서, 부복의 격식 위에서, 정론의 이름으로 했다. 벨 수 없는 자리를 골라 놓고 베일 말을 하는 것. 어젯밤 지도의 마지막 장에 적어 둔 수였다. 말의 순서도 밤새 짰다. 조정의 그림을 먼저 펴서 듣는 귀를 세우고, 인재의 길이 좁다는 사실로 디딤을 놓고, 가장 위험한 말을 한가운데 묻은 뒤, 명분으로 닫는다. 세미나 발표로 치면 서론과 본론과 결론인데, 청중이 하필 왕이었다.
"계속하라."
"젊은 선비가 배움 하나로 나라에 쓰일 길이 좁사옵니다. 식년은 멀고, 천거는 아는 얼굴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며, 문음은 아비의 공을 물려받는 길이지 제 재주로 서는 길이 못 되옵니다. 지난 식년의 문과가 뽑은 것이 서른셋이온데, 그 서른셋으로 삼 년 치 빈자리를 메우고 나면 초야까지 갈 몫은 남지 않사옵니다. 재주 있는 자가 연줄 없이 설 수 있는 문은 과거 하나인데, 그 문이 세 해 걸러 한 번 열리옵니다."
"천거가 아는 얼굴을 못 벗어난다, 천거하는 자들이 제 사람만 올린다는 말이렷다."
"그러하옵니다. 울타리 밖의 재주는 울타리 안 사람의 눈에 뜨일 길부터 없사옵니다."
"그 말은 어제도 들었다."
"어제 미처 아뢰지 못한 대목이 있사옵니다."
말을 꺼내기 전에 소매 속 지도가 떠올랐다. 다섯째 장 귀퉁이, 밤새 적었다 지웠다 하다가 끝내 남겨 둔 한 줄이 거기 있었다.
말을 잇기 전에 혀가 먼저 무거워졌다. 여기서부터가 진짜라는 것을 혀 쪽이 먼저 알고 있었다.
"초야에… 전하를 마음으로 받들지 못하는 이들이 있사옵니다."
붓 소리도, 옷자락 소리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대목을 세미나실에서 들을 때는 종이 위의 옛일이었다. 바카라장 밖으로 걸어 나온 옛일이 이렇게 목 뒤를 뻣뻣하게 만드는 물건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정적이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것도 등으로 배웠다. 목 뒤로 시선이 얹히는 감각이 왔다. 베는 시선인지 재는 시선인지는 고개를 들어야 알 텐데, 드는 순간 말이 끊길 것 같아 들지 않았다.
"…그 말, 뉘 앞에서 하고 있는지는 아느냐."
낮은 물음이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아옵니다. 하여 전하 앞에서만 아뢰옵니다. 이 말은 전하 말고는 누구도 쓰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이옵니다."
숨 하나 길이의 침묵이 지나갔고, 계속하라는 말은 오지 않았다. 예지는 그것을 계속하라는 뜻으로 읽었다. 고개를 들면 무엇이 보일지 알 수 없어서 들지 않았고, 들지 않은 채로 말을 밀고 나갔다.
"전하께서는 그들을 옥에 가두실 수야 있사옵니다. 유배 보내실 수도, 벼슬길을 막으실 수도 있사옵니다. 하오나 그들의 붓이 초야에서 적는 글과, 그들의 혀가 사랑방에서 만드는 말은 가두실 수 없사옵니다. 막을수록 말은 낮아지고, 낮아진 말은 깊이 스미옵니다."
"해서, 나더러 어쩌라는 말이냐."
"문을 여시옵소서."
이번에는 멎지 않고 갔다. 즉답이 오지 않는 동안 등잔의 심지 끝이 한 번 튀었고, 예지는 그 소리에도 어깨가 움찔했지만 말만은 세웠다.
"별시를 여시고, 어진 이를 구하신다 방을 붙이시옵소서. 문이 열리면 초야의 말이 바뀌옵니다. 오는 자는 전하의 신하가 되고, 오지 않는 자는 제 발로 초야를 택한 것이 되옵니다. 지금은 문을 닫아건 쪽이 전하로 보이나, 문을 여시는 순간 등을 돌린 쪽은 저들이 되옵니다. 벌하지 않으시고도 이기시는 길이옵니다. 칼은 벤 자리에 말을 남기지만, 열린 문은 닫힌 입부터 열 것이옵니다."
말들이 쏟아지는 동안, 예지는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말들의 출처를 저는 알고 있었다. 좁은 세미나실, 벽에 다닥다닥 붙던 복사물들, 세조라는 두 글자가 굵게 적힌 자료 뭉치. 졸음 사이로 흘려듣곤 하던 목소리였다. 공신들만 남은 조정이 어떻고, 등 돌린 선비들이 어떻고, 그때는 시험에도 안 나올 소리라며 한 귀로 흘렸던 말들이었다. 그 말들이 지금 제 혀 위에 조각조각 얹혀서, 꿈에서 소리를 잃었던 그 입모양 그대로, 몇백 년을 건너 제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늘 끝에 같은 말을 붙이곤 했다. 그래서 이게 왜 지금 우리 얘기냐면, 거기서부터는 기억이 끊겨 있었다. 끊긴 자리가 오늘따라 아렸다.
'어디서 나오는 거야, 이 말들. …아니, 알지. 알고 있지.'
"명분이 없다 하셨사옵니다."
이것이 마지막 파도라는 것을 알면서, 예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구현. 그 두 자를 소자는 매일 보고 사옵니다. 소자의 처소 곁문에 그리 새겨져 있사옵니다. 그 뜻은 조종께서 문설주에까지 새겨 두신 것이온데, 이를 행함에 어찌 명분을 따로 구하옵니까. 새 인재를 구하는 일, 그 자체가 명분이옵니다. 하늘이 핑계를 내리지 않는 해에는, 임금이 뜻으로 여는 것이옵니다."
"뜻이라. 임금의 뜻이 곧 명분이라는 말이냐."
"임금의 뜻이 조종의 뜻과 겹칠 때, 그것을 막을 명분이야말로 없사옵니다."
말해 놓고 스스로 아찔했다. 논리의 외줄을 타는 기분인데, 줄 아래는 안 보는 것이 상바카라이었다.
거기까지였다. 준비한 말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나온 말도, 전부 바닥났다.
'…쏟아 냈다. 전부.'
쏟아 낸 자리가 후련한지 허전한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구분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판결의 시간이었다.
부복한 어깨 위로 편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등잔 불꽃이 이따금 떠는 소리만 유일했다. 예지는 방바닥의 나뭇결을 세면서 판결을 기다렸다.
'몇 달 전엔 조별 발표 차례나 떨었는데. 지금 이건 뭐, 어전 프레젠테이션이네.'
왕의 눈앞에 있는 것은 아들의 정수리였다. 정수리 너머로 등잔이 하나, 그 너머로 닫힌 문이 하나. 편전의 밤은 왕과 아들과 불빛 하나로 줄어 있었다.
숙인 정수리와, 바닥을 짚은 두 손과, 떨리지 않는 어깨. 왕은 그 어깨를 오래 보았다. 떨려야 마땅한 자리인데 떨림이 없다는 것이 보는 눈을 자꾸 붙들었다. 방금 그 입에서 나온 말들은 하나하나가 목을 걸어야 나올 수 있는 말들이었고, 실제로 그런 말을 하고도 목이 붙어 있던 자를 왕은 많이 알지 못했다.
병약한 아이라는 것이, 왕이 알던 첫째의 거의 전부였다. 약사발이 끊이지 않았고, 겨울마다 앓는 소리가 동궁 담을 넘었으며, 사냥에 데려가면 반나절을 못 버티던 아이였다. 문안 때마다 잔기침을 달고 왔고 서연의 진도는 늘 더뎠으며, 눈은 착하고 흐렸다. 세자로 세우던 날에도 바카라봉례의 절차보다 탕약 시각을 먼저 챙겨야 했다. 세자로 세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오래 못 갈 그릇인가 근심했던 아이. 그 아이가 지난겨울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뒤로 달라졌다는 말은 궁인들 입에서 먼저 나왔다. 걸음이 달라졌다 했고, 눈이 바뀌었다 했고, 말수가 줄었다 했다. 저승 문턱을 밟고 온 사람은 딴사람이 된다더니, 옛말이 아주 빈말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정작 달라진 것은 담의 크기였다.
두 부류라 했던가. 함께 선 자와 두려워하는 자로 제 조정을 갈라 놓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담이었다. 왕은 그 말을 되새겼다. 노여움이 일어야 할 자리에 노여움 대신 다른 것이 먼저 와 앉았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 정난 이후의 조정을 왕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공신들은 배가 불렀고, 나머지는 고개를 숙였다. 어전에서 정론을 세우는 목소리는 해가 갈수록 줄었다. 그 그림을 왕은 알고도 덮어 두었는데, 덮어 둔 것을 아들이 걷어서 눈앞에 펼쳐 놓은 것이다. 걷어 낸 손이 괘씸해야 하는데, 걷힌 그림이 정확해서 괘씸이 발 디딜 데가 없었다. 토해 냈다는 말이 어울리는 논변이었다. 준비한 말과 날것인 말이 반반 섞여 나오는 것을 왕은 구분해 들었다. 준비한 말은 매끈했고 나머지는 뜨거웠는데, 매끈한 말은 어디서든 살 수 있어도 뜨거운 말은 사고팔 수 없는 물건이었다.
초야의 사심 이야기는 더했다. 그 대목에서 왕의 손은 저절로 낮은 바카라상 모서리를 눌렀다. 품지 못한 마음들이라. 그것은 왕이 밤마다 아는 이름들이었다. 이름들을 아는 밤은 대개 길었고, 길어서 왕은 그런 밤이면 술을 찾았다. 죽이지 못해 살려 둔 자들과 살려 두어 가시가 된 자들. 그들의 붓과 혀가 초야에서 무엇을 만드는지, 의금부의 보고가 아니어도 왕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 짐작을 아들이 소리 내어 말했다. 그리고 그 말끝에 붙인 수가 왕을 붙들었다. 문을 열어 이기라는 수, 벌하지 않고 이기라는 수였다. 누가 가르쳤는가 하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어제의 서연 문답이 떠올랐고, 곁에 붙여 둔 예문관 관원이 떠올랐고, 활터와 저잣거리의 소문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예문관이라면 붓이 여문 곳이니, 오늘 논변의 매끈한 반쪽은 그 붓에서 나왔을 법도 했다.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졌다. 세자가 사람을 모으고 있다는 그림이었다. 문을 열자 함은 제 사람을 들이겠다는 것이고, 새 인재라는 것은 곧 세자의 인재가 될 것이다. 제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하기야 준비할 때도 되었다. 왕은 문득 제 나이와 아들의 나이를 나란히 놓아 보았다. 저 나이의 저는 대군의 이름으로 칼을 갈고 있었다. 아들은 칼 대신 문을 고른 모양인데, 문이 칼보다 순한 물건인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적어도 이 밤 그 문 앞에서 왕은 오랜만에 셈이 못 되는 것을 하나 했다.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일이 그것이었다.
왕은 그 그림 앞에서 잠시 머물렀다.
괘씸한가 하면, 이상하게 괘씸하지 않았다. 세자가 세를 기르는 것은 죄가 못 된다. 다음 옥좌에 앉을 자가 제 사람 하나 없이 앉으면 그 옥좌는 공신들의 방석이 될 뿐이다. 그릇이 못 미더워 근심하던 아이가 담을 기르고 수를 두고 사람을 모은다면, 그것은 근심을 더는 일이지 보태는 일이 못 되었다. 낯설고, 낯선 만큼 기특했다. 기특하고, 기특한 만큼 지켜볼 일이 하나 늘었다. 그 세가 자라 어디로 향하는지, 아비를 향해 오는 날이 있는지를 지켜보면 그만이었다. 그런 날이 오면 그때 꺾어도 늦지 않고, 꺾는 일이라면 이골이 난 손이었다. 다만 그 손이 아들을 향하는 날만은 없기를, 왕은 왕답지 않게 잠깐 바랐다.
구현이라 했던가. 명분의 꼴까지 갖춘 셈이라, 조종의 뜻이라는 관을 씌웠으니 반대하는 자는 조종의 뜻을 거스르는 모양이 된다.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도 수가 제법 여물었다. 여문 수 뒤에 누구의 손이 있는지가 남은 물음이었으나, 물음은 물음대로 두고 쓸 것은 쓰는 것이 왕의 셈법이었다. 명분이라면 왕도 아는 바가 있었다. 정난의 밤에도 명분이 먼저 갔고 칼은 그 뒤를 따랐다. 명분이란 칼집 같은 것이어서, 같은 칼도 칼집이 있으면 예가 되고 없으면 난이 된다. 아들이 내민 구현이라는 칼집은 만듦새가 좋았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슨 칼인지는, 뽑히는 날에야 알 일이지만. 왕은 부복한 정수리를 다시 내려다보고,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아들이 낯을 들었는데, 밤을 새운 기색이 역력한 눈이었다. 그 눈을 왕은 잠시 마주 보았다.
"그 말들, 누가 넣어 주더냐."
"소자의 눈으로 보고, 소자의 입으로 아뢰었사옵니다."
"네 눈과 네 입이라."
왕은 잠시 다른 것을 물을까 하다가 거두었다. 물어서 나올 답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밤도 없었을 것이다.
거짓이라면 흔들릴 자리인데,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대답이 참이라면 그것대로 더 지켜볼 일이었다. 왕은 손가락으로 서바카라이 가득 쌓인 상을 한 번 두드리고, 결정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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