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떠날 사람

27

by라한

27. 떠날 사람



채윤의 집에 도착했을 때 분이는 사립 안에 주저앉아 있었다. 예지가 들어서자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문설주를 짚었다. 정은이 먼저 방으로 뛰어들었고, 안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예지는 문 앞에서 멈췄다. 어제 자신이 열고 나왔던 문이었다. 안쪽에는 등이 켜져 있었고, 채윤은 이부자리 위에 누워 있었다. 머리를 풀어 놓은 채였다. 예지는 그 머리를 보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채윤."

부르는 소리가 작게 나왔다. 다시 부르면 들을까 싶어 가까이 앉았다. 정은은 이불 위에 놓인 손을 잡고 있었다. 예지가 반대편에서 손을 내밀었을 때 의원이 고개를 숙였다.

"오래 지나셨습니다, 저하."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냐?"

"겉에 새로 베이거나 맞은 자국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잔을 보아 주십시오. 분이 관원이 문 안으로 들었을 때 곁에 있었다 합니다."

사발 안쪽에 찌꺼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예지는 냄새를 맡으려다 의원이 말리는 손에 멈췄다.

"그릇을 가져가거라. 무엇을 먹였는지 알아봐 다오."

예지는 의원에게 부탁하고 채윤 곁에 앉았다. 어제는 이 손으로 문을 짚고 자신을 불렀다. 오늘 아침 드릴 말이 있다던 목소리가 생각나 손을 잡았지만, 다시 물을 수가 없었다.

분이를 부르자 그녀는 문 앞에 엎드렸다. 예지는 고개를 들고 말해 달라고 했다. 분이는 울면서 내관이 온 일을 말했다.

"왕의 패를 지니고 왔다 합니다. 저는 읽지 못했고, 호위가 확인하고도 저하께 여쭤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분이 동궁으로 달려간 사이 남은 분은 금군에게 길이 막혔지요.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안에서 무슨 말을 들었느냐?"

"쓰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채윤 관원께서는 자기가 한 것을 쓰겠다 하셨습니다. 그 뒤에 소인을 부르셨는데…, 문을 열려 하자 못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분이의 입술이 떨렸다. 예지는 기다렸다. 권신은 문밖의 호위에게 어디서 막혔는지 따로 물었다. 동궁으로 간 호위는 출정 준비로 승지를 바로 만나지 못했고, 강녕전의 명이라며 확인할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세자에게 직접 들려 했을 때에는 이미 문안 보고로 자선당 출입이 막혀 있었다.

"소인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하를 뵈어야 한다고. 그러자 금군이 소인을 붙들었습니다. 새벽에야 놓아 주었습니다."

"누가 붙들었느냐? 얼굴을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이름도 압니다."

예지는 호위를 탓하는 말을 찾지 않았다. 자신이 붙인 사람보다 높은 명령이 왔고, 확인하러 간 사람까지 막혔다. 누구의 권한으로 그럴 수 있는지 떠올리자, 아버지의 얼굴을 지워 버리고 싶어졌다.

분이는 내관이 나간 뒤에도 한동안 금부도사가 문을 막았다고 했다. 그들이 돌아가고서야 들어갔으나 채윤이 대답하지 않았다. 의원을 부르러 뛰고, 호위를 부르러 뛰고, 자신이 어디로 먼저 갔는지도 헷갈린다며 울었다.

"그때 문을 부쉈어야 했습니다. 소인이 옆방에서…."

"그대 혼자 어떻게 부수겠느냐. 밖에 군사들이 있었다면서. 그대까지 죽었으면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예지는 분이에게 물을 주고, 세녕의 처소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왕실의 사람이 와서 막았다는 증언을 한 사람을 이 집에 더 둘 수는 없었다. 분이는 채윤을 두고 못 간다 했고, 정은이 밖으로 나와 자신이 있겠다고 말한 뒤에야 일어섰다.

방에 다시 들어왔을 때 정은은 일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예지가 말린 표지 끝을 펴 주려 하자 정은이 바카라을 더 끌어안았다. 채윤이 어젯밤 꿰매던 곳이라고 했다. 예지는 닿았던 손가락을 거두고 정은이 직접 갈무리하기를 기다렸다.

"일기는 그대가 맡아 주게. 채윤과 함께 읽기로 했는데…"

"제가 갖고 있겠습니다."

그러다 말을 이었다.

"어제 반찬이 짜다고 했습니다."

정은이 말했다. 예지는 무슨 뜻인지 몰라 정은의 얼굴을 보았다.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짜다니까 자기가 만들었으니 먹으라고 하더군요. 저는…, 다음에 제가 지으면 덜 짜게 하겠다 했습니다."

정은은 문장 끝을 맺고도 다음 말을 찾지 못했다. 예지는 머리끈을 집어 들었다. 어제 풀었다가 자신이 일기 곁에 놓아둔 끈이었다. 또 하나는 함에서 꺼낸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정은이 그것은 궐에 들던 첫날 매었던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하나는 내가 가져도 되겠는가."

예지는 채윤에게 묻듯 말했다. 정은이 고개를 숙였고, 예지는 오늘까지 머리에 있었어야 할 끈을 소매 안에 넣었다. 정은은 다른 끈을 일기와 함께 감쌌다.

장례를 맡을 사람을 정하고 나서도 예지는 떠날 수가 없었다. 궁에서는 출정이 늦어졌다는 전갈이 왔다. 예지는 한 번만 더 기다리라고 하려다가, 남해에서 기다리는 수련을 떠올렸다.

"내가 돌아오면…."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채윤에게는 돌아와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 있었다. 예지는 이불의 접힌 곳을 펴고, 얼굴을 가려 달라고 의원에게 부탁했다. 정은과 함께 방 밖으로 나온 뒤에도 손에 머리카락이 닿던 느낌이 남아 있었다.

*

돈의문 밖으로 나온 예지는 길 양쪽에 늘어선 군사들을 보았다. 보병의 대열 뒤로 군량 수레가 이어졌고, 기병은 말을 먹일 풀밭으로 떨어져 있었다. 병조가 붙인 군사 삼천 명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성부에서 따라온 인원은 의원과 짐꾼들이 모인 수레 곁에 자리를 정했다.

군문에는 불만이 번지고 있었다. 왕명을 받고 나온 자들이 세자의 사적인 일로 기다렸다고 수군거렸다. 여인들이 섞인 수레를 보고 어느 기방이 남쪽으로 옮겨 가느냐고 웃는 사람도 있었다.

예지는 그 말을 들었다. 아침까지 감추며 살던 사람을 보고 나온 길이었다. 군문을 둘러보면서 이 사람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말 위에 오르자 가슴의 상처가 당겼다. 권신이 고삐를 잡아 주었고, 예지는 숨을 고른 뒤 각 부대를 맡은 군관들을 앞으로 불렀다. 수레 곁에서 웃던 자들은 대열 안으로 몸을 숨겼다.

"남해에 보낸 관원이 돌아오지 못했다. 구하러 간 무관 하나가 죽었고, 다친 이와 붙들린 이가 있다. 오늘 나는 그 사람들을 데리러 간다. 함께 가는 여인들은 그 일에 필요한 일을 맡았다. 기생을 데려가는 행렬이라 여기는 자가 있으면 앞으로 나와 말해라."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예지는 웃음이 나던 쪽을 오래 보았다.

"떠날 사람은 떠나라."

군관이 놀라 말 앞으로 나왔다. 예지는 말을 마치기 전에는 끼어들지 말라고 했다.

"오늘 떠날 사람은 무기와 말을 두고 가라. 남겠다면 여인들과 한 군문에서 싸운다. 그게 싫은 자까지 끌고 가지 않겠다. 각 진에도 그대로 전해라."

권신이 낮게 반대했다.

"저리 이르시면 정말 떠납니다. 저하의 노여움을 두려워해 남으려던 자들도 떠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끌고 가서 등 뒤를 맡기고 싶지 않다."

"진을 나누고 맡길 길까지 정했습니다. 어느 부대에서 몇이나 나갈지 모르는데 모두 허하시면, 남은 군사들을 다시 섞어야 합니다. 군관까지 떠나면 함께 움직이던 병졸들이 흩어집니다."

예지는 권신의 얼굴을 보았다. 명을 거둬 달라는 말이었다. 그는 늘 끝에는 따랐지만, 오늘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대가 옳다. 내가 화가 나서 너무 쉽게 말했다. 그래도 지금 말을 거두면 떠나려던 자는 남아서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오늘은 보내자. 대신 밤에 명단을 확인하고 내일 갈 길을 줄인다. 남은 인원으로 못 지킬 진은 펴지 않겠다."

"행군이 늦어집니다."

"늦어지더라도 도착해야지. 다시 사람을 보내 놓고 못 돌아오게 할 수는 없다."

군관 하나가 병조에는 무엇이라 알리느냐고 물었다. 예지는 자신이 허락한 일이라 전하고, 떠난 자들이 맡았던 자리부터 확인하라 했다. 군사들은 출발을 멈춘 채 성 밖에 숙영했다. 선봉에 섰던 자들이 뒤쪽 군량 수레로 옮겨 가고, 새로 붙은 군관에게 어느 길로 움직일지 다시 묻는 동안 해가 기울었다.

세녕이 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지는 누이에게 출정이 늦어진 것을 사과했다. 세녕은 사과할 일을 고르라며 손을 내저었다.

"분이는 내 처소에 있다. 그 집에 드나든 자들을 알아보겠다. 너는 길에서 계속 뒤를 돌아보지 말거라. 내가 받은 전갈은 함부로 대군에게 내주지 않겠다."

"아바마마의 사람이 온 것이라 합니다."

"패를 읽은 사람에게 직접 듣겠다. 네가 돌아오면 들은 것을 주마. 지금 누구의 잘못인지 정해서 떠나지 말고."

예지는 누이에게 고맙다고 했다. 세녕은 말의 목을 쓸어 보다가 곧 손을 거두었다.

"함께 간 사람들을 데려와라. 너도 무사히 돌아오고."

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크게 말해 누이를 안심시킬 수가 없었다. 세녕도 더 답을 재촉하지 않고 문 안으로 돌아갔다.

*

그날 밤 군문을 떠난 군사는 오백 명이었다. 출정에서 빠진 자들은 각 진의 군관에게 무기와 말을 반납하고 나갔다. 예지는 막사에 누워 가까운 진에서 짐을 옮기는 소리를 들었다. 동료에게 물통을 건네고 자기 짐을 짊어진 사람들이 막사 앞을 지나갔다. 누구는 가족을 만나러 간다고 했고, 누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젊은 군사 하나가 막사 앞에 와서 예지를 찾았다. 권신이 들어오게 해도 되느냐고 묻자, 예지는 몸을 일으켰다. 군사는 무릎을 꿇고, 집에 어린 아들과 아픈 어머니가 있다고 했다.

"다른 군역에는 갔습니다. 이번에는…, 소인이 돌아오지 못하면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살 수 없습니다. 집안에서 대신 돌볼 사람이 없다 하여 왔습니다."

"이 군문에서 내린 장비는 다 돌려주었느냐?"

"예. 가진 곡식도 놓고 왔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먹을 것은 가지고 가라. 다 두고 나가면 길에서 무엇을 먹겠느냐."

군사는 고개를 들었다. 예지는 집으로 가라는 말을 다시 했다. 그가 나간 뒤 권신은 그 사람은 남았어도 제 몫을 했을 것이라 말했다. 예지는 대답 대신 물을 마셨다. 보내고 싶은 사람만 나가는 일도 될 수 없었다.

예지는 소매의 끈을 꺼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제 채윤은 내일 아침에 드릴 말이 있다고 했다. 예지는 못 주면 돌아와서 듣겠다고 했다. 그 말을 쉽게 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날지 몰랐다.

울음이 나오자 예지는 이불을 끌어 얼굴을 가렸다. 밖으로 소리가 나가지 않게 하려 했으나 숨이 막혀 손을 놓았다. 권신이 기척을 내자 예지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잠시 뒤에 문이 조금 열리더니 물그릇이 안으로 놓였다.

"소인은 밖에 있겠습니다. 부르시면 듣겠습니다."

예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물그릇을 당기다 끈이 젖을까 봐 먼저 소매에 넣었다. 마시지도 못한 물을 앞에 두고 오래 앉아 있었다.

*

다음 날 남쪽으로 떠난 군사는 이천오백 명이었다. 여성부 인원과 의원, 짐꾼들은 중군의 수레 행렬을 따랐다. 선봉이 길을 열고 후군이 군량 수레의 뒤를 지켰으며, 갈림길마다 전령이 오가며 뒤처진 대열을 불렀다. 예지는 병조에서 붙인 군관들에게 각 진을 맡기고, 권신에게는 중군의 호위와 여성부 일행을 살피게 했다.

남도에 가까워질수록 군량을 내줄 고을이 줄었다. 약속한 창고가 닫혀 있거나, 반란군이 먼저 곡식을 가져간 곳도 있었다. 군량 담당 관원이 다른 고을에 수레를 보내는 동안 정찰대는 나루와 숙영지를 살폈다. 권윤이 가 보았던 길을 묻자, 그가 앞으로 나왔다.

"소인이 앞을 다녀오겠습니다."

권신은 어깨가 아픈 사람이 멀리까지 다녀올 수는 없다고 막았다. 권윤이 군관에게 길을 설명하는 동안 옥이가 정찰대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예지는 허락하고, 모르는 길에서 사람을 놓치면 혼자 더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일렀다.

남쪽 길목에서 급한 보고가 왔다. 출정 전에 군문을 떠난 자들 중 일부가 말을 타고 앞질러 가 반란군에 합류했으며, 세자의 병력과 이동할 길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었다. 보고를 가져온 군관은 여섯 고을의 군졸에 문중에서 보낸 무인들까지 가세해 적의 군세가 수천에 이른다고 했다. 그들에게 합류한 자들 중에는 중군의 경비를 맡기로 했던 자도 있었다. 화가 난 예지는 떠난 자를 모두 잡으라 하려다 정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는 저하께서 가라 하셨습니다."

집에 갔다는 자들까지 미웠지만 그들에게 돌아가라 한 것은 자신이었다.

"적에게 붙은 자만 군율로 다스린다. 나머지는 잡지 마라."

권신이 군관을 불러 명을 전하는 동안 예지는 정은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권신은 정찰대를 더 멀리 보내야 한다고 했다. 자신도 숙영지 바깥의 길을 확인하겠다고 하자 예지가 붙들었다.

"저들이 중군의 자리까지 압니다. 앞길만 보고 갈 수는 없습니다. 정찰대는 적이 모이는 쪽으로 보내고, 소인은 뒤로 빠질 길을 보겠습니다. 군관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그대가 없어지면 나는…."

예지는 말을 멈췄다. 권신은 주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렸다.

"사람을 보내는 일이 무섭다. 그대를 보내 놓고 또 늦었다는 말만 들을까 봐."

"그러면 소인이 무엇을 보고 언제 돌아올지 정해 주십시오. 못 돌아왔을 때 찾을 길도 남겨 주십시오. 소인을 곁에만 두시면 저하를 지킬 일을 못 합니다."

예지는 마침내 허락했다. 먼 길은 정찰대와 옥이가 살폈고, 권신은 중군의 군관과 가까운 숙영지와 퇴로를 보고 돌아왔다. 예지는 보고를 기다리는 동안 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종종 막사 밖으로 나왔다. 달래가 밥부터 드시라며 그릇을 내밀었을 때에야 다시 앉았다.

길에서 만난 나루의 사공은 며칠 전에 병조의 명을 받고 배를 북쪽으로 보냈다고 했다. 예지에게는 내려오지 않은 명이었다. 돌아온 옥이는 강 건너편 길에도 군사들이 지난 흔적이 있다고 보고했다.

"누구의 군사인지 보았느냐?"

"깃발은 못 보았습니다. 고을에서 나눠 준 말먹이를 받아 갔다 합니다. 왕명으로 움직인다고는 했다 하나 소인은 패를 보지 못했습니다."

권신은 배와 군량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

숙영지에서는 각 진의 군사들이 교대로 경계를 섰다. 중군의 의원 곁에 모인 여인들은 후송에 쓸 들것을 시험했다. 덕례가 묶은 들것에 군사 하나를 눕혔다. 들어 올리자 한쪽이 기울어, 삼월이 달려와 앞뒤 사람을 바꾸었다. 군사는 내려 달라고 했으나 덕례가 매듭을 보느라 듣지 못했다.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서야 다급히 내려 주었다.

"내일은 다른 사람 좀 눕히십시오."

"빈 것으로는 모른다 하셨잖습니까."

"저한테도 다른 일이 있습니다."

군사가 물통을 들고 달아나자, 주변의 사내들도 저마다 할 일을 찾았다. 덕례는 어이가 없어 웃다가 자기가 누웠다. 이번에는 허리의 가위가 등을 찔러 바로 일어나야 했다.

"그것부터 빼라니까."

을금이 가위를 가져갔다. 덕례는 들것의 길이를 다시 보다가 곁에 놓인 막순의 활을 집었다. 시위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구부러진 나무만 쓸어 보았다.

"짐승 잡을 때도 손이 떨립니까?"

"처음에는 그랬지요."

"그럼 이제는 안 무섭겠네요."

막순은 활을 돌려 달라고 했다. 덕례의 손에서 건네진 것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나도 사람을 쏴 본 적은 없습니다."

멀리서 말이 울자 둘 다 고개를 돌렸다. 삼월이 군사의 손에서 고삐를 빼내고 있었다.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고 짐에 함께 묶어 둔 것이었다. 말이 머리를 당길 때마다 자루들이 움직였다.

"이렇게 매어 두면 말이 짐을 끌고 갑니다. 저기 따로 묶으세요."

"줄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덕례! 줄 좀 가져와라."

해가 지자 을금은 다리가 아프다며 먼저 누웠다. 덕례는 들것에 댈 천을 가져다주고 삼월을 도왔다. 두 사람이 보던 수레에는 여성부 일행의 식량과 상처에 댈 천이 함께 실려 있었다. 차축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달래가 군량 담당 관원에게 짐말을 청했다. 여인들 몫의 식량을 나눠 싣고 약재와 들것은 수레에 남겼다. 천을 삶을 솥까지 말에 실으려 하자 을금이 누운 채로 그건 놓고 가라고 외쳤다.

정은은 저녁에 활을 잡아 보았다. 처음부터 잘되지 않았다. 손가락이 아파 시위를 놓치자, 권신이 옆에서 잡는 법을 고쳐 주었다.

"채윤이 등으로 당기라 했습니다. 저하께서 가르쳐 주셨다며."

정은의 말을 들은 예지는 불 곁에서 돌아앉았다.

"그 사람에게 배웠느냐?"

"배웠다고 할 만큼 길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번 쥐어 보라 하여 잡아 보았습니다. 소인이 활을 쓸 일이 있겠느냐 하니, 제가 궁에 들 줄도 몰랐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정은은 활을 내려놓지 않은 채 말을 마쳤다. 예지는 그 손등에 남은 굳은살을 보고 자신도 활을 한 번 당겼다. 채윤에게 보여 주려고 뒤에 붙어 서던 일이 생각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권신은 예지에게 활을 내려놓으라 했다. 가슴이 당길 때는 쓰지 말라고 의원이 말했다는 것이었다. 정은도 손가락을 펴 보고 오늘은 그만하겠다고 했다.

"제가 그 사람 말을 다 기억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쏘려 하니 어떤 손으로 잡으라 했는지도 헷갈립니다."

"나도… 목소리가 자꾸 다르게 생각난다. 어제 들은 것 같은데."

정은은 대답하지 않고 불에 얹힌 나뭇가지를 밀어 넣었다. 잠깐 뒤에 그가 먼저 물었다.

"집에 들었던 내관은 찾으셨습니까?"

"누님이 확인하고 계신다. 호위가 확인한 이름도 보냈다. 그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명이 내려갔는지는 아직 답이 없다."

"대군의 말을 듣고 움직인 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 아바마마께서 직접 보내셨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궁의 명을 앞세웠다. 돌아가서 그 사람에게 물어야지."

정은이 예지를 보았다. 예지는 입 밖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내고 나서도 고개를 들었다. 이런 의심을 한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혼자 생각하면 끝내 지워 버릴 것 같았다.

"호위를 두면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네. 아바마마께서 보내실 줄은…."

예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정은도 위로하지 않았다. 불이 잦아든 뒤 둘은 각자의 잠자리로 갔고, 정은의 막사에는 오래 등이 켜져 있었다.

*

섬진강 나루에 이르자 군사와 수레를 건너보낼 배가 없었다. 물살 때문에 상류에 묶어 두었다는 말과 다른 군문에서 가져갔다는 말이 엇갈렸다. 군관은 군사를 조금씩 건너보내다 양쪽으로 갈라질 수 있다며 강 이쪽에서 밤을 보내자고 청했다.

강변의 넓은 터에는 보병과 기병이 진을 쳤다. 선봉은 아래쪽 길목을 막았고, 후군은 지나온 고갯길과 군량 수레를 지켰다. 세자의 막사와 의원, 여성부의 수레들은 그 사이 언덕에 자리 잡았다. 진들을 오가는 길은 언덕 아래에서 좁아졌다. 중군의 군관은 수레를 더 올리지 말고 그 길을 비워 두게 했다.

옥이는 뒤쪽 산길을 보고 돌아왔다. 강 쪽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지만, 산길에서 말을 나누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다. 예지는 수레에서 내려 이야기를 들었다.

"갈림길 아래에서 들었습니다. 세자께서 계신 수레가 어디 섰는지, 산 쪽을 지키는 자들이 언제 바뀌는지 묻고 답했습니다. 나뭇잎 밟는 소리를 감추려고 돌아갔는데 가지가 부러졌습니다. 그 뒤로 더 가까이 못 갔습니다."

"이쪽을 보았느냐?"

"고개를 돌리는 것은 보았습니다. 소인은 몸을 낮추고 내려왔으니 제 얼굴을 보았는지는 모릅니다."

"우리 진에서 나간 사람이던가."

"등만 보았습니다. 사내의 허리에 전대가 있었고 아랫부분을 다른 천으로 꿰매 놓았습니다. 앞서 걸은 자가 말을 걸었을 때 잠깐 보였습니다. 같은 것을 찬 사람이 우리 진에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 못 했습니다."

권신은 중군의 군관을 곁으로 불렀다. 옥이가 산길의 굽은 곳을 땅에 그리자, 함께 다녀온 정찰병이 강변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짚었다. 그 아래에서도 군사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아직 엿들은 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느냐고 묻자 옥이는 고개를 저었다.

"불을 피웠다 끈 자리도 있습니다. 밟힌 잎이 많아 여러 사람이 지났겠으나 어디 멈췄는지 못 찾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뒤쫓기보다 우리 등 뒤를 먼저 보고 싶습니다."

"산 쪽 초소와 교대를 바꾸고 병력을 더 붙여라. 강변에도 알려 함께 경계하게 하고."

예지의 지시를 받은 무관이 산길을 보고 돌아섰다. 옥이는 경보에 쓸 그릇과 끈을 청했다.

중군의 군관이 산 쪽 초소에 군사를 보냈다. 권신은 예지에게 막사를 강변의 본진 가까이 옮기자고 했으나, 어두운 비탈에서 환자와 수레를 옮기다 다칠까 염려한 예지가 날이 밝거든 함께 내려가겠다고 했다. 군관은 산길의 입구를 지키는 동안 강변으로 통하는 길도 막히지 않게 하겠다고 아뢰었다.

권신은 수레를 세자의 막사 둘레로 모으게 했다. 삼월이 말을 안쪽으로 묶고 덕례가 바퀴를 잇는 줄을 당겼다. 의원 곁의 수레들을 둘러 세우니 여인들과 환자들이 누울 자리가 좁아졌다.

"이러면 화장실 가는 길도 막히겠습니다."

을금이 투덜거리자 달래가 한쪽의 짐을 치웠다. 출입할 틈을 남기되 밤에는 혼자 나가지 말라고 했다. 덕례는 들것을 바로 꺼낼 수 있도록 끈을 위로 올려놓았다. 막순은 활을 옆에 두고 누웠으나 잠들기 전에 또 한 번 시위를 만져 보았다.

상류의 다른 나루를 살피러 갔던 정찰병이 돌아왔다. 강 건너에는 병조가 먼저 보낸 배와 수천의 군사가 모여 있었다. 지휘관에게 세자의 뜻을 전하겠다고 했으나 왕명을 따로 따르는 군대라며 들이지 않았다. 예지는 병조가 자기에게 알리지 않은 군문으로 전령을 보냈다.

"우리가 이 나루에서 멈췄다고 전해라. 적이 산길과 강변에서 움직인다는 것도. 어느 쪽으로 진군할 것인지 알려 달라 청하고, 배를 나눠 쓸 수 있는지 물어라."

전갈을 맡은 군사가 떠났다. 예지는 돌아오는 답을 기다리다 겨우 잠들었다.

강변에서 북이 울려 예지는 잠을 깼다. 아래쪽 진에서 적이 밀려온다는 고함이 들렸고, 곧 언덕 위에도 군사들을 깨우는 소리가 번졌다. 예지는 갑주를 여미며 밖으로 나왔다. 횃불들이 강을 따라 움직였다.

중군의 군관이 강변으로 보낸 전령이 돌아오기 전에 산 쪽에서도 함성이 터졌다. 이어 놋그릇이 돌에 부딪쳤다. 옥이가 수레 진영 밖에 걸어 둔 줄이었다. 산길의 초소까지 밀어낸 적이 비탈을 내려오고 있었다.

"뒤다! 수레 안으로 들어가!"

옥이의 목소리였다. 초소에서 밀려난 병졸들이 언덕의 군사들과 합쳐 창을 세웠다. 뒤를 따라 내려온 적의 화살이 수레 옆 땅에 박혔다. 예지가 앞으로 나서자 권신이 어깨를 잡고 수레 쪽으로 밀었다.

"말에 오르시면 보입니다. 여기서 움직이십시오."

강변에서는 세자의 군사들이 적의 앞줄을 밀어냈다. 그러나 숲을 돌아온 다른 무리가 언덕으로 통하는 좁은 길을 끊었다. 중군의 군관이 병졸들을 모아 그 길로 내려가며, 본진에 세자의 막사가 공격당하고 있다고 알리라 외쳤다.

언덕 위의 방패줄에도 틈이 생겼다. 밀린 군사들이 수레까지 물러서며 맞붙는 가운데, 적에게 안쪽 길을 가리키는 자가 보였다. 예지는 출정 때 중군 앞에 섰던 얼굴을 알아보았다. 곁의 군사도 그를 보고 욕을 하며 활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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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기획 및 집필 작가] 글을 씁니다. 계속 써 왔고 앞으로도 씁니다. 쓴 글들을 통해 또 쓰려는 이야기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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