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
23. 발밑
"오늘은 직접 찾으십시오."
수련은 문서 이름을 적은 종이를 내밀다가 손을 거두었다. 늙은 서리가 허리춤에서 열쇠를 풀어 서안에 놓았다. 받아도 되는지 망설이자, 서리가 턱으로 문서고를 가리켰다.
"찾아 달라는 문서가 자꾸 늘어나니 제가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시렁부터 외우십시오. 아무 데나 넣었다가 나중에 못 찾았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열쇠를 계속 소인이 가지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당장은 그러십시오. 제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대에게 말하겠습니다."
"다른 관원께서 가져가시겠다 하면 어찌합니까?"
"누구에게 넘겼는지 적으십시오.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못 적게 하면 제게 오십시오.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데, 경들이 귀찮다고 그냥 들고 다녀 저만 찾으러 다니지 않았습니까?"
수련이 서안의 열쇠를 집어 문서고를 열자 서리는 안에서 몇 시렁을 가리켰다. 수련은 놓인 순서를 적다가 서로 다른 해의 문서가 섞인 곳을 발견했다.
"이쪽은 왜 같이 두셨습니까?"
"아직 답이 안 온 것들입니다. 해가 바뀌었다고 넣어 버리면 다시 찾으러 온 사람이 못 봅니다."
"그러면 정리하기 전에 돌려보낼 곳부터 살피겠습니다. 소인은 날짜대로 넣으면 될 줄 알았습니다."
"일이 끝났는지부터 보아야 합니다. 여기 오래 남은 것이 다 그때 일이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리는 낮은 시렁의 묶음을 꺼내 수련에게 들려주었다. 수련은 제 힘으로 옮길 수 있다고 했지만, 서리는 묶인 끈이 낡아 쏟아질 것이라며 밑을 받쳤다. 둘이 함께 서안으로 가져와 풀고 나서야 그는 손을 털며 자기 자리로 갔다.
수련이 문서를 찾으러 다닌 지 한 달이 지났다. 정은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열쇠를 넘긴 기록부터 남겼는지 물었다. 수련이 기록을 남겨 두었다고 하자 정은은 웃으며 수고했다고 했다.
"내일도 문서 이름을 적어 가려 했습니다. 이제는 적어 놓은 곳으로 제가 들어갈 수 있으니, 아침에 어떤 것부터 찾을지 정해 두어야겠습니다."
"문을 열었다고 밤까지 다 뒤지고 있지는 마십시오. 남이 오래 묶어 둔 일을 혼자 하루 만에 풀 수는 없습니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 새로 온 분이 그 문서를 보자고 하셔서…."
그 사람은 재시험에서 정은 다음에 이름을 올린 젊은 관원이었다. 문중의 명에 따라 사직했다가 다시 등청했다고 했다. 돌아온 날에는 제 서안에 앉은 수련을 보고 한동안 짐을 내려놓지 않았다. 수련은 그가 본래 쓰던 문서를 골라 돌려주려 했지만, 그는 곁의 빈 서안에 앉아 새로 정리한 것을 가져오라 했다.
수련이 두 번 적힌 이름을 보여 주자 그는 날짜부터 짚었다.
"같은 사람이 옮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문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열쇠를 받아 들어가려 합니다. 먼저 보신 적이 있으시면 어느 부분을 찾아야 할지 알려 주십시오."
젊은 관원은 서류를 읽다가 말이 없어졌다. 전에 자신이 도장을 받으러 가져갔던 묶음의 일부였다. 그때에는 정리해 둔 대로 옮기기만 했다. 수련이 그가 읽기를 기다리자, 그는 문서를 내려놓았다.
"같이 가 봅시다. 내가 처리한 것도 있으니."
수련은 열쇠를 들고 먼저 일어났다. 문서고 안에서는 그 관원이 찾은 곳에 수련이 찾던 종이가 있었고, 수련이 미리 표시해 둔 곳에 그가 놓친 답이 들어 있었다.
문서고를 나온 뒤에는 어디에 앉느냐를 두고 다시 말이 오갔다. 젊은 관원이 곁의 서안에 짐을 놓자, 수련이 그 아래 함을 꺼내려 했다. 그는 자기 물건인 줄 알고 손을 뻗었다가 함 옆에 적힌 수련의 이름을 보았다.
"이것까지 다 옮겼습니까? 내가 쓰던 함이 여기 있었는데."
"그것은 뒤의 방에 있습니다. 안에 있던 것은 그대로 두었고요. 열쇠는 서리께서 갖고 계십니다."
"제가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치우셨다는 말입니까? 기다릴 생각은 안 했습니까? 잠깐 비운 사람이 와서 보니 앉을 곳도 새로 찾아야 하니, 참 빠르게도 하셨습니다."
"소인이 왔을 때는 비어 있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나리 물건을 먼저 꺼내 보지도 않았고요. 이 함은 제가 가져온 것이니 꺼내게 해 주십시오. 위에 올리신 문서가 쏟아질까 봐 못 당기고 있습니다."
그는 종이를 들어 주었다. 수련이 함을 옮긴 뒤에도 제 짐을 풀지 못하고 서안 앞에 서 있었다. 수련은 다시 일하러 앉고 싶었지만, 그가 계속 보고 있어 의자를 밀기가 어려웠다. 한참 뒤에야 그가 원래 것은 자기가 써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맡은 문서를 이미 여기에 두었습니다. 자리만 바꾸고 끝날 일이면 옮겼겠지요. 찾으러 온 사람이 또 다른 데로 가야 하고, 제가 넘긴 것을 어디 두었는지도 다시 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 곁에서 그대가 찾으라는 것만 찾아다녀야 합니까? 내 일을 돌려받으러 왔는데."
"그 일을 다 보고 계셨으면 아까 같은 이름을 처음처럼 묻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소인도 지금 다시 받겠다는 말씀을 듣고 어디까지 드려야 하는지 여쭙는 것입니다."
"내가 그 장을 한 번 놓친 것으로 다 모른다는 말입니까?"
"다 모르신다 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계시는 곳을 가르쳐 달라 하였습니다. 나리께서는 날짜를 보라 하셨고, 소인은 이미 보았다고 말씀드렸고요. 그 다음부터 같이 찾은 것이지 않습니까."
"대꾸 하나는 잘하십니다.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문서를 넘기면 돌아오고, 다시 넘기면 또 다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나리께서는 안 계셨지요. 제가 어디서 배웠겠습니까."
수련은 마지막 말을 하고 얼굴을 붉혔다. 너무 오래 참고 있던 불만이 이 사람에게 한꺼번에 쏟아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사과하면 아까 찾은 문서까지 제 잘못이 될 것 같아, 해명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는 옆방에서 누가 듣는지 돌아보았다.
"그대가 해 둔 일을 내가 없애겠다는 것처럼 듣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내가 익힌 것도 있습니다. 처음 오는 종이를 볼 때 나에게 물으시면 빠를 수도 있는데, 돌아오자마자 틀린 것부터 들이미니 나도 좋게 대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언제 보여 드렸어야 합니까? 제가 혼자 넘겨야 합니까, 다른 분이 들어오실 때까지 또 묶어 두어야 합니까? 나리께서 전에 가져가신 문서라 해서 기다렸습니다."
"그 말을 먼저 하셨어도 됐습니다. 왜 내가 아는지부터 따지듯 물으셨습니까?"
"나리께서 먼저 물으셨습니다. 날짜를 보았느냐고. 제가 답하고 나서야 같이 찾자 하셨고요."
"그런 것은 참 잘 기억하십니다."
"다른 분들은 제가 못 알아들어서 늦었다고 하시니 기억하게 됐습니다. 이제는 소인이 물은 것과 들은 것을 잊어버리면, 다시 와도 처음부터 똑같은 말을 들어야 해서요."
그는 갓을 벗어 놓았다. 서로 친절하게 말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문서를 들고 온 사환이 두 사람 사이에서 머뭇거리자, 수련이 손을 내밀어 제 앞에 놓게 했다. 관원은 내용도 보기 전에 자기 앞으로 온 것인지 물었고, 수련은 보낼 곳을 적은 면을 펴 보였다.
"이 일은 나도 해 보았습니다. 답을 쓰려면 앞서 보낸 것을 찾아야 하니, 그대가 방금 정리한 쪽을 주십시오. 나머지는 내가 해 보겠습니다."
"어디까지 적으셨는지 저에게도 보여 주십시오. 같은 곳에 제가 다시 보내지 않게."
"그대가 내 글을 보고 허락해야 내보낼 수 있습니까?"
"소인이 이미 물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답이 오면 제가 받을 것이고. 나리께서 다른 것을 쓰시면 어디가 바뀌었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내가 다 쓴 다음에 읽어 보십시오. 대신 눈앞에서 붓 놓기를 기다리며 보고 계시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나도 글이 안 나올 것 같습니다."
"소인도 보실 때마다 글씨가 작다 하시니 자꾸 크게 쓰게 됩니다. 그러면 한 장에 다 못 쓰고 다시 옮겨야 하고요. 제가 읽을 표까지 남의 눈에 맞춰야 합니까?"
이번에는 그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수련도 웃을 뻔했지만 먼저 표정을 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수련이 가지고 온 묶음의 순서를 물었고, 수련은 아직 회답하지 않은 것을 앞에 두었다고 했다. 자기 전임자는 해가 바뀌면 무조건 아래에 넣었다는 그의 말에 수련은 그 때문에 오래 찾았다고 대꾸했다.
"나도 바꾸어 보자고 한 적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전에 하던 대로 놓으라고 하여 더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대에게는 열쇠까지 내주었습니다. 내가 있을 때는 저 늙은 서리가 아무에게도 안 내주었는데."
"찾을 것을 써서 드렸습니다. 다음 날 못 받으면 다시 써 드렸고요."
"그래서 귀찮아 내준 것입니까?"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직접 찾을 수 있으면 되니 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러면 버릇없는 놈이라고 했을 텐데. 그대에게는 어찌 그리 쉽게 주셨을까."
"쉽게 내주신 열쇠가 아닙니다. 한 달을 찾으러 다녔지요. 어떤 날은 제가 적은 종이도 안 보셨습니다. 나리께서 못 보셨다고 쉽게 된 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는 알겠다고 답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수련도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아직 답을 못 받은 문서를 보여 주었다. 그는 읽던 장의 아래를 가리키며 이 집안에는 그냥 보내면 안 된다고 했다.
"받은 것을 윗사람에게 보이기 전에 아래에서 돌려보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맡은 사람을 따로 적어 보내야 합니다. 그대가 받은 답이 너무 짧았던 것도 그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름을 써 주겠습니다."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전에 보낸 것은 도로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 집의 사람이 와서 왜 나에게 묻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는 내가 쓰게 했다고 하십시오. 내가 그 일을 그만두고 나온 것은 아니니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같이 쓰면 되겠습니까? 소인 이름과 나리 이름을요. 나리만 물으신 것으로 되면 소인은 또 답을 못 받아 볼까 봐 그러합니다."
"그리하십시오. 다만 종이 앞뒤를 다른 이름으로 쓰면 혼동하니 같은 자리에 놓읍시다. 내가 어느 이름 뒤에 적히는지까지 고집하지는 않겠습니다."
수련이 새 종이를 꺼내려는데 정은이 문밖에서 불렀다. 수련의 서안을 찾아왔다가 그 옆에 앉은 관원을 보고 눈썹을 들었다. 그는 일어나 예를 갖추면서도 마당에서 함께 시험을 보던 때처럼 정은을 오래 쳐다보았다.
"관서에서 뵈니 낯섭니다. 과장에서야 글을 보았지만 여기서는 어떤 일을 하시는지 모르니."
"돌아오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몸이 나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병이 났다고 내가 말씀드렸습니까?"
"등청하지 않으신 까닭이 그리 올라왔다 하여 묻는 것입니다. 이제 나으신 것으로 적어도 되겠습니까?"
"집안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돌아가라 해서 온 것이고. 그 말을 좋아하실 리 없다는 것은 압니다. 그래도 여기서 안 아픈 곳을 아팠다고 설명하느라 하루를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돌아오신 뒤 하는 일을 보겠습니다. 저도 여기서 집안의 어른을 설득해 오시라고 할 수는 없으니. 다만 같은 명을 다시 받으면 나갈 생각이십니까? 맡길 사람이 그걸 알아야 합니다."
"대답을 지금 드려야 합니까? 내가 다음의 일을 장담할 수 없는데."
"오늘 맡으신 것까지 남에게 아무 말 없이 두고 가실지는 대답할 수 있겠지요. 그 종이를 다시 찾을 사람이 수련입니다."
그는 잠시 수련을 보고 문서를 서안 가운데 놓았다. 수련은 자신을 사이에 놓고 두 사람이 과장의 일을 잇는 것 같아 불편했다. 그들이 다시 말하기 전에 자기가 기다리던 회답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이것은 함께 보내기로 했습니다. 먼저 맡은 자를 적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고요. 나리께서 내일 나오지 않으셔도 제가 어디까지 썼는지 볼 수 있게 남겨 주시기로 했지요."
"그것까지는 아직 말을 안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도사께서도 같은 것을 묻고 계시니요. 저는 이걸 오늘 끝내고 다른 것을 받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가져가서 혼자 마치지 않고 여기서 쓰겠습니다."
정은은 수련이 짚은 곳을 읽고 필요한 것만 물었다. 돌아오는 길에 관원이 시험 답안을 다시 볼 기회가 있겠느냐고 불렀다. 정은은 관청에서 맡은 것이라 자신이 들고 다니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가 글로 더 물을 일이 있었다고 하자 따로 적어 보내라고 했다.
"답을 주실 것입니까?"
"읽고 답할 말이 있으면 드리겠습니다. 오늘 같은 보고와 섞어 보내지는 마십시오. 수련이 급한 문서인 줄 알고 먼저 가져올 것이니."
"그 사람 일까지 내가 늘리는 것 같습니다."
"방금은 늘리셨습니다. 제게 물을 것을 그분 앞에서 기다리게 하셨으니."
정은이 나간 뒤 관원은 먹을 더 갈았다. 수련은 눈치를 보다가 자기가 먼저 쓰겠다고 했다. 그는 쓰던 문장 가운데 같은 관서를 두 가지 이름으로 적은 곳을 가리켰다. 받는 쪽에서 헷갈리지 않게 처음 이름으로 맞추자는 말이었다. 수련은 붓을 받아 그곳부터 바로잡았다.
저녁에 두 사람이 함께 낭청에게 보고를 올렸다. 사라진 녹의 행방까지 그날 모두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다음에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이름은 정할 수 있었다.
*
"그 모래를 아직도 가지고 다니는구나."
세녕은 예지의 소매에서 보이는 시계를 가리켰다. 큰일이 있을 때마다 넣고 다니다가 오늘은 화원에 앉아 꺼내 놓은 참이었다. 예지는 위쪽에 모래가 얼마나 남았는지 보고 누이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보면 마음이 좀 가라앉습니다."
"어릴 때도 그랬다. 다 내려가면 나를 부르곤 했지. 처음에는 네가 직접 뒤집으면 되는 것을 왜 매번 부르는지 몰랐다."
"누님을 보고 싶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랬을까. 한번 물어볼 걸 그랬구나."
세녕은 손바닥에 놓인 시계를 익숙하게 돌리며 웃었다. 예지는 그 모래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묻고 싶었는데, 누이가 먼저 물었다.
"어디 모래인지는 기억하느냐?"
"누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소자가 잘 못 떠올리는 것이 많습니다."
"할바마마와 동쪽 바다에 갔을 때였다. 너는 파도가 오면 뛰어오다가 다시 내려가기를 반복했지. 내가 손을 잡고 있어야 했다. 젖은 모래를 쥐고 예쁘다 하기에, 말려서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예지는 누이의 손에 들린 시계로 눈을 옮겼다. 세녕이 기울일 때마다 모래가 유리 안쪽을 따라 미끄러졌다. 바다와 땅이 맞닿은 곳에서 작은 아이가 주머니를 받는 모습이 떠올랐다. 꿈에서 보았는지, 모래시계를 손에 쥐던 순간 보았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조금 더 큰 여자아이가 그 곁에 있었다.
"누님께서 그 주머니를 주신 것입니까?"
"그래. 내 치맛자락에 모래를 자꾸 넣어서 주머니를 구해 주었지. 가지고 노는 것은 너였는데, 떨어진 것을 치우는 것은 나였다."
예지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 장면의 여자아이가 늘 진지한 얼굴이었던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세녕은 시계를 돌려주지 않고 유리의 잘록한 부분을 살폈다.
"그걸 이렇게 만든 사람이 대호군이다."
"장영실 말씀입니까?"
"아바마마께 그 이름을 들었다지?"
"예. 그분이 곤장을 맞고 쫓겨난 일도 말씀하셨습니다."
"궁에서 나간 뒤에는 아무도 내게 그 사람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어릴 때 물시계 안을 보여 준 어른이었는데. 어디로 물이 들어가고 무엇을 움직이는지 물으면,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기다리던 분이었다."
세녕은 궁녀에게 가져온 작은 함을 열어 달라고 했다. 안에는 오래된 종이가 비단에 싸여 있었다. 예지가 펼치려 하자 누이는 찢어지지 않도록 가장자리를 받쳤다.
"그분을 찾으러 사람을 보냈다. 궁에서 나왔다 하여 다시 부를 수는 없으니, 살아 계신지만 알고 싶었다. 강원 어느 골짜기에 계셨다. 그리 늙으셨다 하기에 내 모래를 보내 작은 시계를 만들어 주실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그 모래는 네가 쥐어 온 것이고."
"만들어 주셨습니까?"
"두 개를 보내셨다. 이것과 같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하나는 네게 주었지."
"대호군께서 아직 그곳에 계십니까?"
예지가 서둘러 묻자 세녕은 종이를 덮었다.
"이제는 돌아가셨다 들었다. 다시 사람을 보냈을 때 빈집이었다. 마을에서 장사를 지내 주었다 하더구나."
예지는 더 물을 말을 잊었다. 현대의 바카라에서도 이름 뒤가 비어 있던 사람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 허망했다.
세녕은 오래된 편지를 다시 싸며 말했다.
"할바마마께서는 그가 양반으로 났으면 더 높은 벼슬을 주셨을 것이라 하셨다. 나는 그 말이 기뻐할 말인 줄 알았다. 높은 분이 아껴 주신다 하니까. 나중에는 그 말이 자꾸 생각났다. 아낀다면 그 자리까지 주실 수는 없었을까 하고."
"누님께 사내였으면 세자가 되었을 거라고 한 말과 같습니다. 소자도 그런 말을 하였습니까?"
"네가 했다. 내가 남아였으면 세자는 나였을 것이고, 대호군이 양반이었으면 영의정은 그였을 것이라고.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할 때마다 네 마음에 걸린 것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예지는 원래 의경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금 자기 입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을 자신이 처음 품은 것처럼 여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 아이는 누이의 재주를 알고도 누이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야 했다. 아버지를 말리다가 울었다는 말도 떠올랐다.
"여성부에 아직 노비가 없지?"
세녕이 물었다. 예지는 채용 방문에서 양인을 따로 적었던 일을 말했다.
"기생안에서 풀려난 사람도 증서가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뽑는다 해 놓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기도 전에 종이를 보아야 하였습니다."
"그럼 그 종이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네가 바로 다 정할 수는 없겠지. 다만 그 사람들이 없어서 안 온 줄은 알지 말거라. 우리 궁 안에도 글을 읽는 종이 있고, 쇠붙이를 다루는 종도 있다. 할 줄 알아도 맡아 볼 일이 안 주어질 때가 많다."
예지는 시계를 받아 들었다. 골짜기에서 늙은 사람을 지금 불러낼 수는 없었다. 청사 문 앞에서 증서가 없어 돌아간 사람이 있는지 정은에게 먼저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애는 덤으로 얹어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길목에서 그 말이 들렸다. 예지는 흥정하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이를 업은 여인이 서 있었고, 그 곁의 사내가 여인의 나이와 할 줄 아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마주 선 갓 둘은 여인에게 묻지 않고 그 사내에게만 물었다.
"병은 없습니까? 애까지 먹이려면 품이 더 들 것입니다."
"밭도 갈고 바느질도 합니다. 애도 조금 더 크면 일을 하겠지요."
"그때까지 밥 먹이는 값을 빼야겠습니다."
여인은 아이의 다리를 받치고 있었다. 등에서 잠든 아이는 흥정하는 소리에도 깨지 않았다. 예지는 말을 걸려다 자신이 어느 이름으로 여기 섰는지 생각했다. 미복으로 나온 길이었다. 곁의 권신이 사람들을 살피고, 권윤은 이미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값을 치르면 두 사람을 데려갈 수 있습니다."
권윤이 낮게 말했다.
"소인이 이야기하겠습니다. 갈 곳이 있는지 물으면 될 것입니다."
"오늘 저 사람을 사면, 내일 다른 사람을 또 팔지 않겠느냐. 내가 그 값을 치르면 사람을 이렇게 사고파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일이 될 것이다."
논리는 입에 잘 붙었는데 눈앞의 여인은 계속 서 있었다. 예지는 말을 마치고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값을 깎던 사내가 아이를 업은 등을 보며 어미만 살 수는 없느냐고 물었다.
권윤이 다시 말을 걸었다.
"저하, 저들은 지금도 두 사람을 갈라 놓으려 합니다. 내일 다른 사람을 막으실 일은 남겠지만, 오늘 저 아이가 어느 집으로 갈지는 여기서 정해지지 않습니까. 소인이 데리고 나올 수 있게만 해 주십시오."
예지는 권신을 보았다. 그는 자기에게 대신 답해 주지 않았다. 주군의 선택을 기다리면서도 시선은 흥정하는 사람들에게 가 있었다.
"두 사람을 함께 데려오자. 내 돈으로 치르고 문서는 그대가 받게.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이라 나중에 다시 끌고 가지 못하게 확인하고."
"그리하겠습니다."
"권윤, 그 여인에게도 물어라. 어디로 가고 싶은지. 우리가 데려가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고 따라올 수 있게."
권윤은 검에서 손을 떼고 흥정하는 자들 사이로 들어갔다. 사내들은 새로 값을 치르겠다는 사람이 오자 처음보다 목소리를 높였다. 권윤은 장난으로 나온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리듯 매매 문서와 원래 주인을 확인했다. 아이도 함께 넘긴다는 글을 적게 했고, 두 사람을 떼어 팔지 못하게 하였다.
예지는 그동안 여인에게 다가갔다. 낮춰 부르지 않으려 이름부터 물었다.
"월선입니다. 아이는 돌이라 부릅니다."
"갈 수 있는 집이 있습니까? 친정이라든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있는 곳이라든지."
"친정은 멀리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요. 저희를 어디로 데려가십니까?"
"여성부라는 아문에 먼저 가려고 합니다. 두 사람을 다시 팔 생각은 없습니다. 놓아주는 증서를 쓰고 관아에서 인정하도록 돕겠습니다만, 지금 당장 모든 절차가 끝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월선은 예지를 바라보았다. 그 말만 믿고 따라가기에는 눈앞의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예지는 관패를 보여 주려다가 권신을 불러 설명하게 했다. 왕세자라고 골목에서 밝히면 사람들이 다시 몰릴 것이었다.
권신은 자신의 패를 보이고 여성부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아문에 가시면 도사께도 같은 말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가서 물으시지요. 여기서 당장 대답을 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월선은 아이를 고쳐 업었다. 예지의 옷을 보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으나, 고맙다는 말을 곧바로 하지는 않았다. 예지는 그쪽이 오히려 다행이라 느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바로 감사하고 따라가야 하는 처지가 계속됐을 것이다.
여성부에 도착한 뒤 정은은 매매 문서와 풀어 주겠다는 증서를 따로 보관하게 했다. 표지를 달아 놓고 월선에게 사본을 어디에 넣어 둘지 보여 주었다. 월선은 글이 적힌 쪽을 안으로 접어 치마 속에 넣었다. 정은이 할 수 있는 일을 묻자, 부엌 쪽을 돌아보았다.
"밥은 지을 줄 압니다. 바느질도 하지만, 바늘을 내려놓았다가 아이가 주워 먹을까 봐… 부엌에서 하면 옆에 앉혀 둘 수 있습니까?"
"불 가까이 두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찬모에게 어디가 좋을지 물어보겠습니다."
"아궁이 앞에는 안 둡니다. 제가 보이는 데 있으면 됩니다. 부르면 금방 갈 수 있고요."
돌이가 등에서 뒤척이자, 월선은 그쪽 어깨를 올려 받쳤다. 정은은 일을 언제부터 할 생각인지 다시 물었다. 월선은 오늘 밥 짓는 자리부터 보고 싶다고 했다.
"관아의 확인을 받는 동안 이곳에서 머물 수는 있습니다. 일을 하고 싶으면 품삯을 정하고 하십시오. 데려온 값을 갚으라고 일시키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정은의 말을 듣고서야 월선은 아이를 내려놓았다. 잠에서 깬 돌이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울기 시작했고, 정은은 아이를 안아 달래려다 오히려 더 울리자 얼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예지는 그 모습을 보다가, 아이를 품에서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드는 일부터 자신이 너무 오래 망설였다는 것을 생각했다.
밤에 돌아와 예지는 정은에게 물었다.
"두 사람을 사는 것밖에는 당장 방법이 없었네. 내일 또 같은 일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처럼 저하의 돈을 쓸 수 있는 때도 있겠습니다. 그 돈이 없으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인에게 법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까?"
"그렇다. 가격을 더 올려 주면서 계속 사람을 사는 일만 하고 싶지는 않아. 월선이 친정으로 갈 수 있는지부터도 문서에 묶여 있지 않느냐."
"지금 청원을 받는 틀에는 소유한 이의 이름이 먼저 들어 있습니다. 본인이 무엇을 바라는지 따로 적는 칸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다만 그 글을 보고 주인이 따라야 할 범위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범위를 논해야겠구나."
정은은 낮에 월선이 말한 것을 꺼냈다. 증서를 받더라도 밭과 집이 없으면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살지 걱정했다고 했다.
"놓아주는 일 뒤에도 할 일이 있습니다. 일할 곳, 쉴 곳, 낼 세금까지 물으실 것입니다. 저하께서도 그 물음을 들으셔야 합니다."
"들을 사람들을 모아 보세. 성균관에도 돌아온 사람이 있다 하였지. 글을 아는 사람에게만 묻지는 말고, 품을 팔아 사는 사람과 땅을 가진 사람의 말을 같이 듣자."
정은은 먼저 무엇을 논할지 정해 왔다. 예지는 그 종이 위에 오늘 값을 치른 일을 말했다. 제가 말만으로 돌아섰다가 권윤의 말에 움직였다는 것도 빼지 않았다.
*
명륜당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세자의 강연을 기다렸다. 돌아온 유생들은 여성부를 두고 무슨 말을 더 할지 들으러 왔고, 젊은 관원들은 남은 자리를 맡은 사람들의 일을 확인하려 했다. 육조에서 일하는 여인들도 뒷자리에 앉았다. 마당에는 상인과 장인, 글 읽는 소리를 들으러 온 사람들이 섞여 서 있었다.
예지는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유생들에게 물었다.
"여기 앉은 이들이 글을 읽는 동안 누가 먹을 것을 마련하는가."
"집의 식구들이 마련합니다."
"그 식구들 가운데 누가 밭을 갈고 누가 곡식을 나르는지 아는가?"
나이 든 유생이 대답했다.
"농부와 종들입니다. 각기 맡은 일이 있어 선비가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 맡은 일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사람이 있지. 자기가 다른 일을 배우고 싶어도 주인에게 묶여 있어 묻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나는 얼마 전 아이를 업은 여인을 파는 것을 보았다. 아이를 덤으로 주겠다는 말을 들었네."
마당에서 웅성거림이 났다. 예지는 그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둘을 데려오려고 돈을 치렀다. 지금은 풀어주는 증서를 받아 관아에 확인을 청해 두었고. 내가 그곳을 지나가지 않았으면 둘은 다른 집으로 갔을 것이네. 어미만 사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아이는 어디로 갔을지 모른다."
"법에 따라 판 사람을 벌하시겠다는 것입니까?"
한 관원이 물었다. 예지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그 사람을 불러 벌할 자리는 없다. 그 법이 앞으로도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묻자고 모였네. 사농공상이라 하여 하는 일에 따라 사람을 나누는데, 그 안에서도 자기가 하는 일을 고를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하, 사람마다 맡을 일이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버리고 글만 읽으면 선비들도 굶게 됩니다."
"농부가 글을 읽으면 꼭 농사를 버릴 것이라 여기는가. 읽을 줄 알면 곡식 값을 남에게 물을 때도 덜 속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일을 바꾸지 않아도 배울 것이 있다네."
예지는 종루에 있는 해시계를 언급했다. 장영실이 만들던 물건을 보고 사람들이 시각을 확인한다는 말을 하자, 앞에 앉은 유생 몇이 고개를 들었다.
"재주를 알아본 분이 계셔서 관노가 일을 맡았다. 그와 같이 재주가 있어도 누구에게 보여 줄 길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네. 집에만 두고 모르던 것을, 일을 맡긴 뒤에야 아는 때가 있지. 지금 육조에서 일하는 관원들을 보고 나도 새로 배웠네."
"삼봉의 말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젊은 유생이 낮게 물었다. 예지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세자가 누구의 말을 빌릴지 미리 들은 모양이었다.
"삼봉이 백성을 나라의 근본이라 하였다는 글을 읽었네. 다스리는 일도 능한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지난 빈청에서는 채윤이 그 이름을 꺼내자, 자네들 선배가 따져 물었다지. 오늘은 내가 묻겠네. 그 말을 우리가 쓰려면 누구까지 백성으로 돌보아야 하는가."
예지는 거기서 긴 인용을 더하지 않았다. 자기 말이 이름의 권위에 기대어 넘어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늘 노비제를 바로 폐한다는 전교를 가져오지는 않았네. 바꿀 수 있는 것을 말하고, 바꾸면 어디서 어려워지는지 듣겠네. 그 어려움까지 말하면 안 된다 할 생각도 없다."
나이 든 유생이 다시 몸을 세웠다.
"종을 풀어주면 누가 밭을 갈고 짐을 집니까? 선비의 집에서도 관아에서도 사람이 필요합니다. 삯을 주면 된다 하실 수 있으나, 그 삯을 늘 마련할 수 있는 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그 집에서는 종을 먹이고 입히는 데 무엇을 쓰는가?"
"곡식과 베를 씁니다."
"그 지출을 적어 볼 수 있겠는가. 무엇을 주고 얼마를 일하게 했는지. 삯을 준다는 말만으로 부족하면 지금 어떤 값이 들고 있는지부터 알아야겠네."
"그 값과 삯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일을 하기 싫다 하면 떠날 수 있을 터인데,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면 더 주어야 합니다."
"그렇겠지. 떠나지 못하게 묶어 놓고 지금의 값이면 충분하다 할 수는 없네. 그 사람이 어디까지 받아야 계속 일하겠다고 할지, 그 말도 들어야 하네."
마당 뒤의 사내 하나가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정은이 앞으로 오라 하자 당황해 주위를 보았다. 예지는 서 있는 곳에서 말해도 된다고 했다.
"소인은 품을 파는 사람입니다. 저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삯을 정하고 일해도, 일을 다 하고 나서 못 받는 때가 있습니다. 땅 없는 사람이 집을 비우라 하면 갈 곳도 없고요. 종을 풀어주어도 그런 일을 겪으면 다시 빚을 질 것입니다."
"그대는 그런 일이 생기면 어디에 청하는가?"
"청할 종이가 있어야 합니다. 말로 약속한 것이니 서로 다른 말을 하면 오래 걸립니다. 그동안 일할 곳을 놓치면 저희가 손해라 그냥 나오는 때도 있습니다."
예지는 정은에게 그 말을 적었는지 보았다. 정은은 이미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예지는 사내에게 다시 물었다.
"일을 하기 전에 삯과 날짜를 적은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지면 도움이 되겠는가. 삯을 떼였을 때 하소연할 곳도 정하고."
"글을 모르면 적힌 것을 못 읽습니다. 주인이 읽어 주면 그 말만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읽어 주는 사람도 따로 있어야겠구나. 언문을 읽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어떻겠는가?"
"그것은 낫습니다. 저희도 숫자와 날짜 정도는 배우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만 낮에 일하고 밤에 돌아오면 몸이 지쳐 못 나오는 것입니다."
예지는 채용 때 글을 배우고 싶어도 그날 먹을 것이 걱정이라던 노파를 떠올렸다. 배울 자리를 내준다는 말만으로는 누가 앉을지 정해지지 않았다.
호조에서 온 산원이 앞으로 나왔다.
"전답은 따로 살피셔야 합니다. 종을 놓아준다 해도 밭의 주인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지요. 땅에 잡힌 빚도 있고 나라에 낼 것도 있습니다. 몸과 밭의 문서를 함께 바꾸시려면 다툼이 더 커질 것입니다."
예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말해 주어 다행이네. 나도 일을 한 사람이 거기서 계속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네. 그 밭에서 내는 것까지 한꺼번에 정한 적은 없고."
"그렇다면 당장 어디서 시작하시려 합니까?"
"나라가 가진 땅 가운데 묵은 곳을 빌려 경작하게 할 수 있는지, 공노비가 하는 일에 품삯을 붙일 수 있는지부터 묻겠네. 아이에게까지 신분이 이어지는 것도 따로 논하고. 사노비를 한꺼번에 풀어 놓고 살 길을 알아서 찾으라 하려는 청은 하지 않겠네."
"그 아이들을 놓아주면 주인은 낳고 먹인 것을 잃었다 합니다."
"먹인 값을 아이의 몸으로 받겠다는 것인가. 그 주장이 나오면 무엇을 먹였고 누구의 노동으로 마련했는지부터 적어 보게. 어미가 밭을 갈아 키운 곡식을 주인이 자기 은혜로만 적어서는 곤란하네."
말이 오가자 젊은 유생들은 제 앞의 종이에 질문을 적기 시작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고, 처음부터 자리를 뜨려다 곁의 사람이 붙드는 일도 있었다. 예지는 그들을 모두 설득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지금 나온 물음에도 답하지 못한 것이 여러 개였다.
정은이 공노비의 일을 맡은 관서부터 자료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예지는 받겠다고 했다. 세금을 어디에 매길지 모르면 먼저 그곳의 담당자를 불러 의견을 듣고, 일을 하는 당사자에게는 품삯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도 물을 생각이었다.
"저하, 그렇게 하시면 다른 고을에서도 자기 종을 놓아 달라 청할 것입니다."
앞의 유생이 말했다. 예지는 그를 보았다.
"오면 접수하겠네. 그날 곧장 풀어주겠노라 장담하기는 어렵지. 그래도 무엇 때문에 나가려 하는지는 들어야 하지 않겠나. 오늘도 듣고 새로 고칠 것이 생겼네."
나이 든 유생은 아직 앉지 않았다. 아까부터 무릎에 들고 있던 바카라을 내려놓더니, 종이를 달라 청하는 손을 뿌리쳤다.
"적을 일입니까. 소인은 저하께 묻고 싶어 일어났습니다. 제 집 종들이 이 말을 들으면 내일 논으로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물을 대고 김을 맵니까. 저하께서 소인의 논에 사람을 보내 주십니까?"
"내 말을 듣고 떠날 사람을 붙잡으려고 오늘 여기까지 왔는가?"
"그 사람들을 먹여야 하는 소인도 백성입니다. 그 밭에서 나라에 낼 곡식도 나옵니다. 저희 집이 곤란해지는 것을 사사로운 욕심이라 하시려면, 나라에서 가져갈 것까지 함께 거두셔야 합니다. 내라는 것은 그대로인데 부리던 사람만 놓으라 하시면 어찌 살라 하시는 것입니까."
"그대가 해마다 내는 것과 거두는 것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나는 아직 자네 집의 형편을 듣지 못했네. 읽어 보고도 당장 하라 명하겠다고 이 자리에서 답할 수는 없고."
"또 장부를 내라 하십니까. 여인들이 관아에 앉은 뒤로 제 집의 숫자까지 다 올려야 하느냐는 말이 많습니다. 무얼 숨겨서 꺼리는 줄 아실까 말씀드리지만, 집안의 일을 나라가 전부 들여다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두렵습니다."
"그대도 종이 집을 나가면 어디 가는지 묻겠지. 누구와 살며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고 싶을 테고. 그 사람에게는 집안의 일이 없겠는가?"
유생이 얼굴을 붉혔다. 예지는 제 말이 꽤 잘 나갔다고 생각했다가, 뒷자리의 사내가 웃지 않는 것을 보았다. 아직 품삯을 주지 않는다던 사내였다. 그 사내에게 이 문답이 무슨 도움이 됐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저하, 소인을 그 집안 어른과 같은 자리에 놓고 묻지 마십시오. 소인은 그 댁 종의 형편을 모릅니다. 품삯이 밀리면 어디 가서 말하느냐 하셔서 답한 것입니다. 소인이 마치 모든 종을 풀어 달라 말한 것으로 돌아가면 일을 얻기 어려워집니다."
"누가 그대에게 그러겠다고 하였나?"
"여기 계신 분 가운데도 소인이 일한 집이 있습니다. 오늘 무슨 말을 하는지 보고 가실 것입니다. 소인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다음에 그 댁에서 일하지 못하면 품삯을 못 받은 집보다 더 곤란해집니다."
"그러면 네가 이 자리에서 한 말을 적지 말아 달라는 것인가?"
"저하께서 들으시는 데까지만 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적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제 이름을 먼저 적지 말아 주십시오. 일이 다 끝나고 나서 저만 남아 그분들을 만나야 합니다."
정은이 쓰던 붓을 멈췄다. 예지는 시선을 정은에게 보내다가 거두었다. 방금 무엇이든 말하라고 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사내가 말을 줄인 채 물러서려 하자 예지는 기다리라고 했다.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아까 한 말은 내가 다시 물을 때 쓸 수 있게 남기고 싶네. 누가 썼는지 공개하지 않고, 일이 끝난 뒤에 그대가 보고 남겨도 되는지 정하면 어떻겠나."
"소인은 글을 잘 못 읽습니다."
"읽어 줄 수 있네."
"방금도 읽어 줄 사람을 따로 두어야 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하의 관원이 읽어 주시면 소인은 저하의 말씀으로 알 것입니다. 틀렸다고 어찌 고치라 합니까."
예지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제가 좋은 방법을 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내는 아직 어느 쪽으로 물러서야 안전한지 살피고 있었다. 정은이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예지는 손짓으로 기다리게 했다.
"지금 정하지 말게. 오늘 이 자리에서 그대에게 문서를 받지는 않겠다. 다른 사람의 말을 더 들어도 되고, 일이 있으면 돌아가도 된다. 여기 나와 말한 것을 허물로 삼아 불러들이지도 않겠네."
"그 말씀을 믿고 물러가겠습니다. 소인이 말한 것이 틀려서 돌아가는 것으로 쓰지는 말아 주십시오. 소인에게는 지금 하던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알겠네. 일하러 가게."
사내는 큰절을 하려다가 바닥의 흙을 털고 서둘러 물러났다. 정은은 따라가지 않았다. 예지는 떠나는 등을 보다 유생 쪽으로 돌아왔다. 유생이 하려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셨지요. 일할 곳 하나 잃을까 저리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풀어 놓고 삯을 주겠다 하여도 저희처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소인은 제 집 종이 굶으면 곡식을 내어 줍니다. 남의 집에 가서 아프면 누가 먹여 주겠습니까."
"그럼 아파도 떠날 수 있는지를 그 사람에게 물어 보고 싶네. 네 집에 남고 싶다고 하면 그 마음까지 바꾸라 하지는 않겠어."
"종에게 주인집이 좋은지 나쁜지 먼저 물으면 누가 좋다 말하겠습니까. 더 좋은 것이 생길 줄 알고 나가겠다 할 것입니다. 나중에 잘못 알았다 돌아오면 다시 거둘 사람이 소인입니다."
"돌아왔을 때 일을 맡기고 먹인 값을 정할 수도 있겠지. 왜 다시 그 사람의 몸을 가져야 하는가."
"지금 말씀대로라면 소인이 이곳에서 무엇을 답해도 종을 가진 것이 잘못이라 하실 것입니다. 어렵다는 말을 들으시겠다더니, 소인이 어렵다 하니 자꾸 종에게 물어라 하십니다. 소인의 대답은 듣고 계십니까?"
예지는 성이 났다. 이 사람의 말만 얼마나 오래 듣고 있는데 안 듣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아까 떠난 사내를 더 붙잡지 못한 일이 마음에 걸려, 그 화를 앞에 선 유생에게 내고 싶어지는 것도 느꼈다.
"듣고 있네. 종을 놓으면 네 집에 더 큰 지출이 생기고 일할 사람도 달라진다고 했어. 그 때문에 지금대로 두고 싶다는 것이겠지. 나는 그대로 두면 떠날 수 없는 사람의 사정이 계속 남는다고 답했고. 자네와 내가 바라는 것이 여기서 갈렸네."
"그 갈림이 소인에게는 생계이고, 저하께는 말씀을 겨루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저하의 처소에 불이 꺼져도 누군가 켜러 들어올 것입니다. 소인은 종이 나가면 직접 땔나무를 구해 와야 합니다."
"직접 구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우면, 지금 구해 오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 계속 오겠는지 물어야 할 것 같네."
"그러니 저하께서는 제 형편을 우습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습게 여긴 말로 들렸다면 방금 말은 거두겠네. 하지만 자네 대신 땔나무를 구해 오는 사람이 누군지는 이 자리에서도 지워지지 않아. 그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에 그가 해 주는 일이 들어가 있으니, 그 일을 듣지 않고 어떻게 답을 하겠나."
뒤에 앉아 있던 젊은 유생이 옆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이 든 유생이 그를 보고 먼저 앉으라고 눈짓했지만, 젊은이는 꾸벅 예를 갖추었다.
"소인도 집안에서 물려준 종이 있습니다. 소인보다 나이가 많고 저희 집 밭도 저보다 잘 알지요. 그 사람이 나가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자신이 없습니다."
"그대도 그것이 걱정되는가."
"예. 그런데 그 사람은 나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소인도 물어본 적이 없고요. 오늘 저하의 말씀을 들으니 돌아가서 묻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물으면 정말 보내 주어야 하는 것인지 두렵습니다. 그냥 물어보기만 하면 그 사람을 놀리는 일이 될까 봐서… 그런 것은 어찌해야 합니까?"
"어디서 살고 싶은지부터 물을 수 있지 않겠나. 네 집에 계속 있더라도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지, 다른 일을 맡고 싶은지는 들을 수 있을 테니. 모른다고 먼저 말해도 되고."
"주인이 모르는 것을 종에게 물으면 얕본다고, 어른들께서 못 하게 하셨습니다. 여태 그 말을 지키느라 모르는 것은 다른 집에 물었지요. 그 사람이 길에서 넘어져 다쳤을 때도 의원을 부를지만 제가 정했습니다. 어디가 아픈지 먼저 물을 생각은 못 했고요."
"물어 보고 나서 자네가 전과 달라질까 봐 두려운 것인가?"
"그것도 있고, 더 맡아 달라 하는 일을 제가 해 주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저는 저하처럼 다른 사람에게 명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지 못하면 다시 그 사람에게 시키게 될 것입니다."
예지는 이 젊은이에게 모두 잘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 묻는 것만으로도 좋은 주인이 되었다고 칭찬해 주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가 산 여인에게도 앞으로 어디서 살고 싶은지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당장 헤어지지 않게 해 놓고 그 뒤를 정은에게 맡겼다.
"그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부터 골라 보게. 못 해 줄 일을 약속할 필요는 없네. 다만 그 사람이 이미 하고 있는 것을 처음부터 자네에게 당연히 바친 것으로 놓고 묻지는 말아 주게. 나는 얼마 전 데려온 여인의 사는 일을 아직 다 정하지 못했네. 내 곁의 관원에게 부탁한 것도 있고. 오늘 돌아가 그 이야기부터 마저 들을 생각이야."
"그러면 소인이 돌아가 묻고, 그 사람이 대답해도 소인이 망설이면… 저하께서는 소인도 꾸짖으십니까?"
"내가 자네 집에 매일 앉아 다그칠 수는 없지. 오늘 들은 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자네가 정해야 해. 다음에 이 자리에 오면 그 뒤의 일을 들려주게. 나도 바꾼 것이 있으면 말하겠네."
산원은 아까 내놓은 전답 문서를 다시 펼쳤다. 젊은 유생의 말에 가려진 것 같아 마음이 급한 눈치였다.
"저하, 나라의 묵은 땅도 종이에는 있으나 실제로 경작할 수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물길이 끊겨 묵은 곳이면 물길부터 다시 내야 합니다. 사람이 가서 바로 농사지으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함께 올리게. 몇 사람이 가면 된다는 숫자만 올리지 말고, 지금 왜 비어 있는지 붙여 주게."
"그 일을 맡길 관원이 마땅치 않습니다. 육조의 빈자리를 채운 뒤에도 익히는 중인 사람이 많습니다. 새 일을 벌이면 하던 일에서 빼야 합니다. 여성부에 보내시면 여성부에서도 사람을 내야 하고요."
"도사, 지금 맡을 사람이 있나?"
정은이 잠시 붓을 내려놓았다.
"없습니다. 청원을 받던 사람을 빼면 그 자리가 빕니다. 오늘 저하와 함께 온 사람도 오후에 돌아가야 할 문서를 남겨 두었습니다."
"그럼 어렵다는 답을 계속 받아야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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