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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끝이 어디냐
"여인들만 모아 놓으면 일은 누가 가르칩니까?"
채윤이 묻자 예지는 앞에 펼쳐 놓은 종이를 뒤졌다. 정은은 붓을 든 채 다음 답을 기다렸다. 밤부터 이어진 준비였다. 예지가 아뢸 말을 먼저 읽으면 둘이 대신이 되어 물었는데, 처음에는 잘 나가던 답이 사람을 뽑는 이야기에서 자꾸 막혔다.
"그건 각 관서에서… 잠깐, 같은 말을 또 묻는구나."
"지난번에는 각 관서에 부탁하면 된다 하셨지요. 그쪽에서 싫다고 하면 어찌하실지 여쭈었습니다."
"왕명이 있는데, 싫다고 할 수 있느냐?"
"형조도 왕명을 좇아 진술은 적었지요. 그래 놓고 서리를 정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일을 늦출 수 있습니다."
예지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채윤은 대놓고 반박하면서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예지는 그 얼굴을 보고 잠깐 마음이 놓였다. 팔을 다친 뒤로 일을 떠넘기는 것 같아 눈치를 보던 사람이, 오늘은 제 말을 고쳐 달라고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그럼 기한과 맡을 사람을 함께 적으라고 해야겠네. 대답만 받고 돌아오지 말고."
"그렇게 아뢰시면 또 기한을 누가 정하는지 물을 것입니다."
"그건…, 내가?"
"그때마다 저하께서 정하십니까?"
"매번 나를 찾아오면 정은도 일하기 어렵겠군."
정은이 붓을 놓고 입을 열었다.
"답을 늦추는 아문은 저하께 아뢰겠습니다. 그 전에 저희가 누구에게 무엇을 언제 청했는지 남겨 두어야겠지요. 그래야 상대도 못 들었다고 발뺌하지 못합니다."
"좋네. 그것을 넣자. 채윤, 또 무엇을 물을 것 같은가?"
"녹을 어디서 대는지부터 물을 것입니다."
예지는 종이를 다시 들고 호조에 청할 부분을 찾았다. 질문이 끝나지 않는 것이 답답했지만, 실제 어전에서는 지금처럼 잠깐 기다리라고 할 수 없었다. 밖에서 야경의 소리가 지나가자, 정은은 더 늦기 전에 돌아갈 사람부터 보내야 한다고 했다. 채윤이 끝까지 남겠다고 하자 예지는 그의 다친 팔을 가리키며 꾸중하려다 손을 거두었다.
"그대가 편할 때 읽어 줄 수 있도록 남은 물음만 적어 놓고 가게. 내일 아침에 보겠다."
"내일은 저하께서 어전에 드셔야 합니다."
"그럼, 지금 다 못하면 내가 모른다고 아뢰지. 아는 척하다 사람을 잘못 쓰는 것보다는 낫겠다."
채윤은 잠깐 예지를 보더니, 마지막으로 비용을 적은 장을 앞에 놓아 주었다. 예지는 다 읽겠다고 했다. 그 말이 일을 더 하라는 뜻으로 들렸는지 채윤이 다시 앉으려 하자, 이번에는 정은이 그의 문서함을 먼저 들고 나갔다.
*
"새 아문을 청하옵니다. 여인의 송사를 받고, 여인이 자기 이름으로 일을 맡을 관청입니다. 여성부라 부르려 합니다."
사정전에서 이름을 아뢰고 나자, 예지는 제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음을 알았다. 말을 줄일까 하다가 왕이 듣고 있는 것을 보고 마저 이었다.
"여인들의 일이 사헌부 감찰에게 접수되어도 형조와 호조를 오가는 동안 같은 사연을 여러 번 말해야 했습니다. 언문으로 적으면 글이 다르다 하고, 다른 아문에 가져가면 제 소관이 아니라고 돌려보냅니다. 제 일을 들고 찾아갈 곳이라도 정해 두고 싶습니다."
이조 판서가 바로 물었다.
"그러면 여인의 일은 모두 그 아문으로 갑니까? 전답을 다투는 일도, 남편의 죄에 연루된 일도 거기서 다스립니까?"
"처음 이야기를 적어 필요한 관서에 보내되, 어느 아문에서 맡았는지 끝까지 확인하게 하려 합니다. 처리가 미뤄지면 다시 물을 수 있도록요. 형조의 판결을 대신하자는 청은 없습니다."
"이미 사헌부가 있는 일인데 새 아문을 두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감찰 한 사람에게 여인의 일이 몰립니다. 그 한 사람이 일을 보러 다니다 칼을 맞을 뻔했고요. 사헌부에서도 그 사람만 찾아오니 다른 업무를 못 한다지 않습니까. 사람을 늘려 일을 나누고, 맡을 범위도 정해 두자는 것입니다."
예조 참판은 여인의 몸에 관한 일까지 맡긴다는 대목을 들어 물었다.
"여인이 달마다 앓는 것을 관청에 모두 적으시겠다는 것입니까? 그 일은 집 안의 부인들이 살피면 될 일입니다."
"집에서 살필 수 있으면 그리하면 되지요. 의원을 못 부르거나 아이를 낳을 때조차 도움 청할 곳을 모르는 사람이 찾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의녀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고을에 모자라는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개인의 몸을 허락도 없이 적어 돌리자는 청은 하지 않았습니다."
"의녀를 더 두려면 가르칠 사람과 약재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청하옵니다. 당장 모든 고을에 보낼 수 없다면 어디부터 시작할지 정해 올리겠습니다. 의녀들을 만나 무엇이 모자라는지도 물어보고요."
방 안에서 사내의 입으로 그런 일을 어찌 말하느냐는 소리가 났다. 예지는 소리가 난 곳을 찾지 않았다. 준비할 때에는 그런 말을 들어도 맞서 대꾸할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어전에서 들으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알아서 말한다고 하면 또 어디서 알았느냐고 하겠지. 여기서는 내가 사내구나, 정말.'
대신 하나가 여성부를 의금부보다 높게 두자는 청을 짚었다.
"의금부는 왕명을 받드는 곳입니다. 세자가 세운 관청에서 그 위에 명을 내리면 왕명도 거스를 수 있다는 것입니까?"
"왕명을 거스를 권한을 달라는 청은 없습니다. 형조가 문서 접수를 거절했을 때 감찰의 청만으로는 답을 얻기 어려웠지요. 의금부에서도 여인의 옥사를 다룬다면 요청한 기록을 내주도록 하려 합니다. 낮은 관원 하나의 청이라며 어느 곳에서도 외면하지 못하게요."
"그러면 판부사를 누가 맡아야 합니까?"
세조가 그 물음에 먼저 답했다.
"세자가 겸하면 되겠구나."
예지가 어좌를 올려다보았다. 왕은 아들의 얼굴을 보다가 대신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만 국문과 판결은 그 관서의 법을 따른다. 여성부가 그 일을 행하면 해당 아문은 답을 내라. 미루는 일이 생기면 무엇을 청했고 왜 못 했는지 양쪽 문서를 함께 과인에게 올리고. 이렇게 하면 경들이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느냐?"
이조 판서는 아직 설치를 허락하신 것인지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왕은 세자의 청을 끝까지 들은 뒤 정하겠다고 했다. 예지는 자기가 대답하지 못한 부분을 왕이 대신 정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허락을 얻어도 아버지가 언제든 권한을 거둘 수 있었다. 밤에 채윤이 했던 물음들이 다시 떠올랐다.
"사람은 어디서 데려오십니까?"
호조 판서가 녹봉 장을 펼쳤다.
"여인 관원 하나를 얻는 데도 과장이 두 번 뒤집혔습니다. 글을 아는 여인을 여러 명 구할 수 있다 하여도 관청 문서를 다루는 일까지 맡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뽑은 뒤 가르치겠습니다. 문벌 대신 글과 수량을 다루는 능력을 보되, 첫 문서부터 혼자 맡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 관서에서 서식을 가르칠 사람을 내주시면…."
"바쁜 관서의 사람을 새 아문에 보내면 그 일은 누가 합니까?"
예지는 그 물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한 종이를 펴서 일할 사람이 늘기 전까지 필요한 품을 아뢰었다. 서식을 가져오는 일, 돌아가면서 질문을 받는 날, 누가 지시했는지 적는 방법을 하나씩 설명했다. 끝까지 이야기하니 입이 말랐다. 내관이 물을 내주자 예지는 고맙다고 말하고 마셨다.
홍문관의 젊은 관원이 그 틈에 몸을 세웠다.
"소신의 집에도 글을 아는 딸들이 있습니다."
"지금 딸을 천거하시는 것이오?"
곁의 대신이 물었다. 젊은 관원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직 딸에게 뜻을 묻지 못했습니다. 집에서만 배웠으니, 밖에서도 제 몫을 할지는 모르지요. 다만 글을 아는 여인이 없을 것이라 여기실까 하여 아뢴 것입니다. 큰아이는 소신의 서찰을 베끼다가 잘못 쓴 글자를 짚어 주기도 합니다."
"그 아이가 관복을 입겠다고 하면 내보내실 것이오?"
그 물음에는 관원의 대답이 늦었다. 예지는 그가 무조건 나서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고 기다렸다.
"집에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소신이 먼저 못 한다고 막지는 않으려 합니다. 딸이 넷이니, 누구는 나가고 싶다 할 수도 있겠지요."
예지는 그 뜻에 감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사람의 마음을 다 바꾸겠다고 아뢸 수는 없었다. 저 관원이 집에 돌아가 무엇을 묻는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사관석에서 채윤이 붓을 내려놓았다. 발언을 청하는 기척에 왕이 고개를 돌렸다. 예지가 허락을 청하려 하자 세조가 먼저 끄덕였다.
"말해 보아라."
"지난 빈청 문답에서 아직 답하지 않으신 것이 있어 아룁니다. 여인은 배움이 모자라 안 된다 하시더니 정은이 장원하자 다른 응시자들과 다시 겨루게 하셨지요. 거기서도 첫자리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뽑을 사람이 없다 하시니, 시험을 치른 뒤에도 같은 말씀을 하실지 여쭙고 싶습니다."
"사관이 경들을 문초하려 드는 것이냐?"
"하신 말씀을 적다가 전의 말씀과 맞지 않아 여쭙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가르치고, 배운 사람은 시험을 보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뒤에도 쓰지 못하겠다면 까닭을 따로 듣고 싶습니다."
채윤은 다친 팔을 서안에 대지 않으려고 자세를 고쳤다. 예지는 그 움직임을 보고 더 길게 서 있지 않았으면 했지만, 채윤은 말을 마저 했다.
"지난번에는 끝내 여자라서 안 된다 하셨습니다. 오늘도 거기서 멈추시면 소인이 더 적을 말이 없지요. 새로 하신 걱정은 적고 있습니다. 그 걱정을 고쳐 사람을 쓰려는지, 사람을 쓸 길까지 막으려는지는 구별해 아뢰어 주십시오."
채윤이 앉고 난 뒤에는 호조가 비용을 더 물었다. 다른 대신은 여인의 상대가 사내인 송사를 누가 조사하는지 따졌다. 예지는 맡을 사람과 바카라임이 부족한 대목을 인정하고, 설치 뒤에도 정해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아는 데까지 말하고 나자 준비한 종이가 더는 남지 않았다.
세조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름은 여성부라 하겠다고?"
"그러하옵니다."
"이름까지 지어 왔으니 만들어 보아라. 의정부 곁의 빈 전각을 쓰고, 판부사는 네가 겸하라. 아까 정한 관할과 보고할 일을 승정원에서 글로 내릴 것이다. 사람을 쓰고 녹을 받을 때마다 경들이 서로 미루지 말게 하라."
예지는 엎드려 왕의 분부에 예를 올렸다. 물러날 때에도 다리가 조금 굳어 있었다. 문밖에 나와서야 채윤이 서류를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예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그를 불렀다가, 정은도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둘에게 같은 말을 했다.
"내일은 집부터 보러 가자. 바카라상 둘 곳이 있는지 알아야겠다."
정은이 예, 하고 대답하며 웃었다. 채윤도 웃었는데, 예지는 그가 다친 팔을 감추려고 문서함을 옮겨 쥐는 것을 보고 내관에게 대신 들어 주라고 했다.
*
"문짝부터 고쳐야겠는데요."
정은이 빈 전각의 문을 밀다가 손을 뗐다. 아래쪽이 마루에 걸려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예지는 옆에서 같이 밀어 보려 했으나 목수가 다가와 잠깐 물러서 달라고 청했다.
"저하께서 힘을 보태시면 나중에 다시 막힐 때마다 저하를 모셔 와야 합니다. 문을 떼어 맞추겠습니다."
예지는 괜히 건드린 손을 소매에 넣었다. 정은이 얼굴을 돌리고 웃었다. 새 관청을 보러 왔다가 문짝에 막혔다는 말을 채윤에게 하면 얼마나 놀릴지 떠올랐는데, 그는 이미 문턱의 닳은 곳을 살피며 목수에게 무엇을 더 고쳐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열흘 동안 전각에는 목수와 도배장이가 드나들었다. 정은은 서안이 놓일 자리를 정하고, 사람이 말하러 왔을 때 다른 방에서 들리지 않도록 사이를 나누자고 했다. 문서를 보관할 곳은 마루 위로 올렸다. 비가 많이 오면 아래로 물이 든다는 늙은 별감의 말을 듣고 바꾼 것이었다.
"청원인은 어디서 기다리게 합니까?"
"처마 아래에 앉히면 되지 않겠는가."
"비바람이 들면 기다리다 돌아갈 것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도 있고요."
"그럼 이쪽 방을 비우게. 내 서안은 다른 데 놓으면 되겠네."
정은은 세자가 앉을 곳이 좁아진다고 망설이지 않았다. 바꿔 그린 도면을 목수에게 내주고, 자신은 사헌부의 문서를 정리해 인계하러 갔다. 감찰 자리를 내놓고 여성부 도사를 맡는 교지가 내려온 뒤였다.
채윤에게는 두 일을 함께 맡는 것이 괜찮겠느냐고 예지가 물었다.
"사관의 직은 그대로 두고 이쪽의 문서를 살피게 할 생각이네. 정은도 부탁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였고."
"시간을 정해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아문의 일을 기록할 때는 소인도 그 일에 관여한 사람이 되지요. 다른 사관이 확인할 수 있도록 두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그대가 쓴다고 내가 보고 싶은 말만 적으라 하겠는가."
"그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나중에 저하께 곤란한 일을 적었다고 지우라 하시면 안 됩니다. 그때 이 말씀을 다시 아뢰거든 못 들었다 하지 마십시오."
예지는 그 말에 잠깐 멈췄다. 채윤은 자기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예지는 웃으며 넘기려던 태도를 고쳤다.
"곤란해도 그대로 두게. 설명할 일이 있으면 내가 따로 말하겠다. 그 말도 적고."
"그리하겠사옵니다. 서연과 어전에서 물러난 뒤에 이곳의 일을 보겠습니다. 서안은 구석이면 됩니다."
"구석에는 바람이 든다던데."
"그러면 창을 고쳐 주시지요."
그 한마디에 예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채윤은 무엇이 우스운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예지는 창을 고쳐 주겠다고 답하고, 그가 고른 자리에 서안을 들이게 했다.
현판이 오르던 아침에는 정은이 먼저 청사에 와 있었다. 한자로 새긴 현판 아래 언문으로 같은 이름을 쓴 작은 널판을 달았다. 예지는 멀리서 읽어 보고 조금 낮추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장인은 높은 곳에서 고개를 내밀며, 아래로 내려도 사람 눈높이에서는 처마가 가린다고 했다.
"그럼 대문 옆에도 쓰게. 밖에서 들어오기 전에 읽을 수 있게 해 주게."
예지는 새로 칠한 글씨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정은은 문설주에 묻은 나무 가루를 털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이미 방문을 베끼는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성부에서 일할 여인을 뽑는다는 방문은 저잣거리와 성문 가까이에 붙였다. 언문으로도 썼다. 양인 가운데 문벌을 가리지 않고 뽑으며, 글과 수량을 다루는 재주를 살핀다는 내용이었다. 그 문구를 읽던 예지는 왜 양인이라고 적었는지 물었다.
정은이 답했다.
"관아에 매인 사람은 면천한 증서가 있어야 관원의 녹을 받을 수 있다 합니다. 소인도 이조에 두 번 물었습니다."
"신분을 보지 말자고 하였는데, 벌써 막히는구나."
"증서가 있는데도 문서가 막힌 사람은 여기서 살펴보겠습니다. 관아가 잡아 두고 있는 사람을 그대로 데려올 권한까지는 아직 없습니다."
예지는 그 말을 옆에 적어 두었다. 오늘 방문을 떼어 버린다고 해결될 일이 없었다. 다만 자기가 누구를 부를 수 있고 누구를 부르지 못하는지는 알고 있어야 했다.
*
"여기서 일하면 밤에도 있어야 합니까?"
문 앞에 처음 모인 사람들 가운데 아이를 업은 여인이 물었다. 접수를 맡은 서리는 아직 정해진 것을 못 들었다며 안쪽을 보았다. 예지가 마당을 둘러보다가 그 말을 듣고 다가가자, 여인은 세자인 줄 모르고 다시 물었다.
"집에 아이를 두고 올 사람이 없어서요. 낮에는 이웃에게 맡기지만 밤까지 데려다 놓으면 그 집에서도 싫어합니다."
"일하는 시간을 정하고 있네. 밤에 남아야 하면 미리 묻게 하겠다. 아이 때문에 못 남는다고 해서 뽑힌 것을 물리지는 않을 것이고."
"그 말을 적어 주실 수 있습니까?"
예지는 대답을 하려다 웃음을 멈췄다. 잠깐 안심시키려고 한 말을 상대는 집에 가져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그렇게 하겠네. 오늘 말한 것을 방문에 덧붙여도 되겠는지 정은에게 확인하겠네."
"그럼 시험은 보고 가겠습니다."
곁에 서 있던 노파가 끼어들었다.
"글을 못 읽으면 앉아 있지도 못하오?"
"오늘은 글을 다룰 사람을 뽑네. 다른 일을 원해서 왔는가?"
"바느질은 하오. 글은 몰라도 일손이 필요한 데가 있을까 해서 왔소. 관청이라고 옷이 안 터지겠소?"
노파는 바늘쌈지를 열어 보였다. 닳은 실타래가 여러 색으로 들어 있었다. 예지는 즉시 뽑겠다고 답하지 않고, 정은을 불러 어떤 일을 맡길 수 있을지 물었다. 정은은 방문을 읽고 온 사람들에게 먼저 설명할 것이 있다며 노파를 기다리게 했다.
"낮에 가르치는 자리를 따로 마련하려 하오. 글을 배워 두시면 나중에 문서를 정리하는 일에도 응하실 수 있소. 오늘 당장 녹을 드리는 자리는 아직은 없습니다."
"배우러 다니려면 그날 먹을 것은 어찌하오?"
노파의 물음에 정은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 예지는 둘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매일 나오라고 하면 어려우시겠네. 일을 마친 뒤에도 배울 수 있는지 의논하겠네. 오늘은 바느질로 하신 것을 두고 가실 수 있나. 필요한 일이 생기면 연락할 수 있게 이름도 알려 주시고."
"종이에 써 줘야 합니까?"
"말씀해 주시면 적겠네."
노파는 바늘쌈지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내 놓았다. 다른 곳에서 떼어 온 옷감을 이어 붙였는데, 서로 다른 천의 끝이 고르게 맞아 있었다. 예지는 그것을 아무 문서 밑에나 넣지 않고 별도의 함에 두게 했다.
사람들이 더 모이자, 정은은 마당에서 시험의 내용을 설명했다. 받아쓰기를 하고, 물건이 들어오고 나간 수량을 맞추고, 흩어진 문서를 날짜에 따라 정리하는 일이었다. 잘 모르는 문제를 물을 수 있는지 묻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잘못 들렸으면 다시 읽어 주겠다고 했다.
"이름은 언제 적습니까?"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여인이 물었다.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오래 끼었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 마친 뒤에 적으시오. 앞에는 번호를 적어 드릴 것이오."
"옛 이름을 적어야 합니까?"
"지금 쓰는 이름을 적으시면 되오. 증서의 이름이 다르면 끝난 뒤에 말씀해 주시오. 그 때문에 시험지를 거두지는 않습니다."
여인이 수긍하자 예지는 손에 머물던 눈길을 거두고 마당 뒤로 물러났다. 사람들이 세자 앞에서 시험을 보면 더 긴장하리라 생각해, 지켜보는 일은 정은에게 맡겼다.
마당에는 마흔 명이 앉았다. 받아쓰기가 끝나기 전에 연달아 문장을 다 적은 여인도 있었고, 맨 첫 줄에서 멈춰 붓을 쥔 손만 내려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정은은 그들 사이를 다니며 남의 답을 볼 수 없게 자리를 고쳐 주었다. 글씨를 몰라 못 적은 여인에게는 시험을 다 끝내고 다시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수량을 맞추는 때에는 반지 자국이 있던 여인이 먼저 붓을 놓았다. 정은이 너무 빨리 끝났다고 생각해 더 볼 곳이 없느냐고 묻자, 여인은 문제를 다시 읽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서 이름을 적으려 할 때는 망설였다. 앞의 글자를 지우고 다른 이름을 적느라 종이 한쪽이 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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