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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어미와 아들
건춘문의 문지기는 정은이 내민 관패를 뒤집어 보았다. 앞면에 새긴 이름을 읽고 뒷면을 확인한 다음에도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뒤에서 기다리던 관원들이 하나둘 목을 빼고 보자 정은은 손을 내민 채 물었다.
"더 보실 것이 있소?"
"이 패를 어디서 받으셨소?"
"사헌부로 출사하라 하여 받은 패요. 어느 곳에서 받았는지 확인하시려면 패를 내린 이에게 물으시오."
"혹시 다른 분의 것을 대신 가지고 오신 것인지…."
"이름을 읽어 보셨잖소. 나정은이오. 오늘부터 감찰로 드는 사람이오."
문지기는 안쪽 군졸을 불러 무언가를 물었다. 군졸이 정은의 얼굴을 보고는 재시험에서 장원한 사람이라고 낮게 알려 주었다. 그제야 패가 돌아왔다. 문지기가 옆으로 비켰지만 정은은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내일은 이 패만 보여 드리면 되겠소?"
"그리하시면 되옵니다."
"문을 지키는 분이 바뀌어도 오늘 확인하셨다고 일러 주시오. 저는 내일도 이 얼굴로 올 테니."
정은은 패를 갈무리하고 문을 넘었다. 관복 자락이 신에 밟힐까 내려다보며 걷는데, 행각 기둥 곁에 미리 나와 있던 예지가 따라 움직이려 했다. 권신이 가로막지는 않고 낮게 물었다.
"사헌부까지 함께 가실 것이옵니까?"
"길을 잘 찾는지 보려는 것이다."
"어제 소인이 알려 드렸사옵니다."
"그랬느냐."
"저하께서도 채윤에게 물어 그림으로 그리게 하셨사옵니다."
예지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정은의 뒤만 보았다. 칼에 베인 팔을 쉬게 하라 해 놓고 자기가 먼저 길을 그려 달라고 했다. 채윤은 편한 쪽 손으로 대강 짚어 주었고, 예지가 직접 그렸던 종이를 정은이 아침에 받아 갔다.
'그런 거 하나는 내가 해 주고 싶었는데. 사람을 쉬게 해 주겠다고 하고 또 불렀네.'
정은이 회랑 모퉁이에서 종이를 펴 보았다. 거꾸로 들었다가 고쳐 잡는 것까지 보여 예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그림을 보고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곁을 지나던 서리가 무어라 일러 주자 정은은 고개를 숙이고 그를 따라갔다.
"가셨사옵니다."
"나도 보았다. 이제 가자. 오늘 누님과 문안도 가야 한다."
예지는 자기가 왜 여기 서 있었는지 권신에게 더 설명하지 않았다. 정은이 관복을 입고 제 발로 들어왔고, 안에서 할 일을 찾아갔다. 아침에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관작을 내릴 때에도 이조와 예조는 한참 다투었다. 예문관에서 받으면 여인이 왕 앞의 글을 다룬다 하였고, 이조에서 받으면 사내 관원의 인사를 들여다보게 된다 하였다. 세조가 어느 자리를 줄지 정해 오라고 하자 대신들은 사헌부 감찰을 내놓았다. 품계를 맞추어 관청의 비위를 살피게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그제야 사헌부의 관원들이 이조에 찾아가 따졌다.
"우리 청에는 자리가 없소."
"이미 교지가 내렸는데 이제 와 그 말을 하면 어찌하오."
"들어와서 앉을 서안도 없다는 말이오."
"서안은 목수를 부르시면 되지 않소."
정은은 그런 말이 오갔다는 것을 등청한 뒤에야 들었다. 방 앞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받고 서 있다가, 마루가 비어 있기에 짐을 내려놓으려 했다. 먼저 출사한 감찰이 나와 물었다.
"거기서 무엇 하시오?"
"기다리라 하셔서 기다리오. 서 있으면 뒤의 분들이 지나다니기 어려워 보여 앉으려 하였소."
"방 안에 자리를 내고 있으니 좀 기다리시오."
"얼마나 기다리면 되겠소?"
"그야 안의 일을 보아야…."
"그러면 여기서 먼저 읽을 문서를 주시오. 오늘 무엇을 맡는지 알아야 기다리는 동안 준비라도 하지 않겠소."
그 관원은 방 안을 돌아보았다. 정은은 비키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결국 늙은 서리가 문서 몇 장을 가져와 주었고, 정은은 마루 기둥에 등을 기대고 그것을 읽었다. 멍든 어깨를 편히 둘 수 있어 서 있을 때보다 나았다.
점심 무렵에는 지나가던 관원들이 그 종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기다리라고 한 감찰이 돌아와 왜 거기에 민원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정은 앞에는 억울한 일을 아뢰러 왔다가 접수를 못 하고 돌아가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 중에 제가 먼저 보였나 보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으시기에 이야기를 들었소."
"들었으면 담당 서리에게 보내시면 되지 않소."
"보냈는데 아까 거기서 돌아왔다 하오. 어디에 말을 해야 하는지 저도 알고 싶소."
"민원을 여기서 다 들을 수는 없소."
"그럼 들을 자리를 알려 주시오. 저도 여기 앉아서 지나가는 분들 발을 피하기는 어렵소."
그날 정은의 서안은 마루 끝에 놓였다. 안쪽 방으로 옮긴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여러 사람이 문서를 들고 와 마루에 앉으니 방을 드나드는 관원들이 매번 그 사이를 비집고 가야 했다. 정은은 짐을 안으로 옮기고도 접수하러 온 사람을 어디로 들일지 다시 물었다. 자리를 내준 감찰은 한숨을 쉬며 서리에게 빈방을 보여 주라고 했다.
정은의 첫 출근을 지켜본 아침, 교태전에 들기 전 세녕은 예지의 옷고름을 직접 고쳐 매어 주었다. 예지는 가만히 서 있다가 누이가 손을 떼자 오늘 무엇을 여쭈어도 되는지 물었다.
"어마마마께서 먼저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이다. 인사를 드리고 기다리면 된다."
"누님께서는 무슨 말씀인지 아시는 것 같사옵니다."
"짐작은 한다. 그러니 아까 일러 준 대로 해라."
내관이 두 사람의 도착을 알렸다. 문이 열리자, 예지는 세녕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몸이 익숙하게 무릎을 굽혔지만 마음은 따라오지 못했다. 이 몸의 어머니였지만, 예지의 엄마는 아니었으니까. 세녕과 닮은 눈매를 마주하자, 어디를 얼마나 보아도 되는지부터 조심스러워졌다.
중전은 예를 받고도 곧바로 고개를 들라 하지 않았다.
"빈청에 들었다지."
세녕이 대답했다.
"예, 어마마마."
"누가 데려갔느냐."
"소녀가 찾아갔사옵니다."
"왜?"
"과장에서 칼을 든 자가 잡혔는데도 수사를 미루기에, 무엇을 알아냈는지 듣고자 하였사옵니다."
"그 일을 세자에게 맡길 수는 없었느냐?"
"세자가 청한 문서도 오지 않는다 들었사옵니다."
"그래서 네가 가면 온다더냐. 공주가 대신들을 꾸짖어 문서를 받아 냈다는 말이 궁 밖까지 돌면, 그다음은 누가 맡아야 하느냐?"
세녕은 무릎에 둔 손을 가지런히 했다. 예지는 누이가 쉽게 대답할 줄 알았다. 어제 빈청에서는 막히는 말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머니의 말이 끝나도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렇게 들리게 한 것은 소녀가 조심하지 못했사옵니다. 다만 다친 사람을 그대로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사옵니다."
"마음에 걸린다고 모두 네가 나설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너는 왕실의 딸이다. 네 이름이 나가면 이 집의 이름까지 따라간다. 그 정도는 배웠을 터인데."
"어마마마, 누님은 소자의 일을 도우신 것이옵니다."
예지의 말이 먼저 나갔다. 세녕이 옆에서 올려다보았지만 멈추지 못했다.
"정은은 두 번 장원하였사옵니다. 임관을 기다리는 사람이 길에서 칼을 맞을 뻔했는데, 그 일을 관원들이 접자 하였사옵니다. 소자가 묻는 말에는 서로 미루면서 답을 하지 않았사옵고…."
"세자는 가만있거라. 지금 딸에게 묻고 있다."
"누님을 나무라실 일이면 소자에게도 물으셔야 하옵니다. 소자가 그곳에 있었사옵니다. 누님을 물리지 않은 것도 소자이옵니다."
중전이 예지를 보았다. 새삼 얼굴을 확인하는 눈이라 예지는 말하고 나서야 어깨가 굳었다.
"네 누이를 물릴 사람은 너였느냐?"
"그 뜻이 아니옵고…."
"딸의 일은 어미가 묻는다.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네 누이가 한 일을 네가 대신 답할 수는 없다."
예지는 입을 다물었다. 과연 세조의 부인인가, 세녕의 어머니인가. 이어 세녕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세자가 시킨 일은 없사옵니다. 소녀가 가겠다고도 미리 이르지 않았사옵니다. 어마마마께 아뢰지 않은 것을 나무라시면 받겠사옵니다. 그곳에서 문서를 청한 일은 소녀가 정하였사옵니다."
"스스로 정했다는 말로 모든 것이 끝나느냐. 너는 네 처소에서 맡은 일을 하면 된다. 조정에까지 나가서 사내들과 다투면 무엇이 남겠느냐. 오늘 다친 이를 돕고 내일은 네 이름이 그들 입에 오른다. 네 아우에게도 그 말이 돌아갈 것이고."
"그럼 누님은 어디까지 하실 수 있사옵니까."
예지는 세녕이 옷자락을 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이번에는 질문을 마저 했다.
"누님께서 글을 먼저 떼셨다 들었사옵니다. 손님들 앞에서 읽으셨고, 그다음에는 꽃을 가꾸라 하셨다 들었사옵니다. 그 재주를 어디에 쓰시게 하셨사옵니까. 처소 안에서만 하라 하시면 누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네게 하더냐."
중전의 시선이 세녕에게 돌아가자 예지는 잘못 꺼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이가 둘만 있을 때 해 준 말이었다. 자기는 누이를 변호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말부터 딸에게 다시 묻고 있었다.
"소자가 여쭈었사옵니다. 누님께 허물이 될 말씀은…."
"허물이 있는지는 내가 듣고 정한다. 세자, 네 누이의 바카라을 치운 날을 네가 아느냐?"
예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밤 그 아이가 어디에 앉아 있었는지도 모르지. 나는 안다. 아침이 되도록 그 아이가 바카라 놓였던 곳을 보고 있었고, 내가 궁인을 보내 방에 들라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그 밤을 아느냐?"
"모르옵니다."
"그러면서 어미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는구나. 내가 딸을 몰라서 그리했을 것 같으냐."
어머니의 말에 예지는 반박할 내용을 찾았으나 입으로 옮기지 못했다. 세녕은 여전히 이마를 숙인 채였다. 자신이 계속 말할수록 누이의 옛날이 이 방에서 더 벗겨질 것 같았다.
중전이 발을 내리라고 일렀다.
"세자는 물러가라. 세녕은 남고."
예지는 일어나면서 세녕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누이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문을 나서자 뒤에서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고, 예지는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걸음을 서둘렀다.
세녕은 문이 닫힌 뒤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우에게 바카라 이야기를 한 일을 후회했다. 어머니가 아는 밤을 자기도 기억하고 있는데, 오늘은 또 그 밤에 관해 어머니의 말을 먼저 듣게 됐다.
"내가 네 바카라을 치운 일을 아우에게 그리 말했느냐. 꽃이나 가꾸라 내쫓았다 하더냐?"
"꽃을 가꾸라 하셨다고 하였사옵니다. 아우는 소녀가 무슨 바카라을 읽었는지 궁금해하였사옵고. 누가 잘못하였다 따지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사옵니다."
"세자는 따지더구나. 네가 무엇을 배웠는지, 무엇을 못 배웠는지를 어미에게 묻더라. 내가 너를 어찌 길렀기에 네 아우에게 그런 말을 듣느냐."
"소녀가 대신 말해 달라 청한 일은 없사옵니다. 오늘 아우가 그 말을 할 줄 알았으면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옵니다. 소녀도 당황하였사옵니다."
"당황한 사람은 나다. 네 아우가 쓰러졌다 일어난 뒤로 너에게 무엇을 하였는지, 왜 너까지 전과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둘이 어울려 다니며 무엇을 의논하느냐."
"어마마마께서는 소녀가 아우와 멀리 지내는 것도 걱정하셨사옵니다. 아우가 외로울 테니 찾아가라 하셨고, 일에만 마음을 쓰니 다른 이야기도 해 주라 하셨사옵니다. 그래서 갔사옵니다. 아우가 하는 일을 듣다 소녀도 궁금한 것이 생겼사옵니다."
"동기간에 정을 나누라 하였지 조정에 함께 나서라 하였느냐. 세자가 하는 일에는 네가 모르는 다툼이 많다. 잠시 좋게 보이는 사람이 네 아우를 어디에 쓰려는지도 모른다."
"그 말씀은 아우에게 하시면 되옵니다. 소녀를 남기시고 아우가 잘못했다 하시면 소녀가 무슨 답을 올리옵니까. 다시 찾아가 오늘 어마마마께 들은 말을 전해 드리옵니까?"
중전은 딸을 보다가 상궁에게 문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세녕은 그제야 허리를 조금 폈다. 오래 엎드려 있던 목이 당겼지만 손을 올리면 다시 고개를 숙이게 될 것 같았다.
"너까지 어미의 말에 날을 세우는구나. 나는 네가 다칠까 봐 부른 것이다. 세자는 맞설 수 있어도 너는 맞설 수 없는 사람이 그 방에 얼마나 많은데."
"오늘은 그 사람들이 소녀가 무엇을 청하는지 들었사옵니다. 내일 아침까지 답을 주겠다고도 하였사옵고."
"내일 주지 않으면 어찌할 것이냐. 다시 빈청에 찾아가겠느냐? 주되 네가 바라는 답을 주지 않으면? 그때에는 사람을 잡아 가두라 하겠느냐."
"그것까지 정해 두고 들어가지는 않았사옵니다. 다친 관원이 있고, 세자가 부른 의원이 아직 동궁에 있다기에 갔사옵니다. 이곳에서 누가 얼마나 다쳤는지 물어도 모른다 하고, 알려 주러 오는 사람도 없었사옵니다. 소녀가 찾아가면 알 수 있었사옵니다."
"알아서 네가 편해졌느냐. 상처를 보고 나니 이 일에서 물러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내일 누가 더 다쳤다 하면 또 나갈 것이고, 그다음에는 널 찾아올 것이다. 너라면 들을 줄 알고."
"찾아오면 듣고 싶은데, 그것을 왜 어마마마께서 먼저 두려워하시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소녀가 듣고 나서 못 하겠다 말할 수도 있사옵니다. 소녀에게 청한 일을 전부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지는 않사옵니다."
"못 한다고 말하는 데에도 힘이 든다. 처음부터 맡지 않았으면 듣지 않을 원망까지 들을 것이다. 사람들이 네게 고맙다는 말만 할 것 같으냐?"
"꽃을 잘 가꾸어도 비가 많이 와 죽으면 궁인들이 원망을 들었사옵니다. 제가 그 꽃을 보고 싶다고 했으니 살려 놓아야 한다면서, 제가 모르는 데서 서로 꾸짖었사옵니다. 소녀가 처소에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이 힘들어졌사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편하기만 하셨사옵니까."
중전의 눈썹이 움직였다. 세녕은 마지막 물음을 거둘까 하다가 입술을 눌렀다. 여태 어머니에게 묻지 않고 속으로만 화를 낸 일이 많았다. 오늘 또 물러나면 아우에게만 짜증을 내게 될 것 같았다.
"내가 편히 지내는 것으로 보였느냐. 아바마마의 일이 뒤집힐 때마다 궁 안에서 누가 가장 먼저 자식들을 불러들였는지 네가 잊었느냐. 누구를 믿고 보내도 되는지 몰라 밤마다 기다린 사람이 나다."
"알고 있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 불러들여 살아 있는 날들을 소녀도 잊지 않았사옵니다. 다만 그 뒤에 문을 열어도 되는 날이 언제인지 여쭙는 것이옵니다. 일이 끝났다고 해도 아직은 기다리라 하셨사옵니다. 또 일이 생기면 그 일부터 지나가야 한다 하셨사옵고."
"네가 지금 여기 앉아 어미에게 따질 수 있게 하려고 기다린 것이다. 기다리라 한 말만 기억하고 그때 네 아우들이 얼마나 어렸는지는 잊었느냐."
"그래서 아우들 앞에서는 묻지 않았사옵니다. 어머니께 화가 나면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해도 나가지 않았고, 어머니께서 시키신 일은 잘하려 하였사옵니다. 그래도 소녀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는 기억하고 싶사옵니다. 그 일까지 아우에게 말하면 어마마마를 원망한 것이 되옵니까?"
"세자가 그 말을 내게 들이밀었잖느냐. 네가 조용히 견딘 일이 나 때문에 억울하게 된 일로 돌아왔다."
"억울하였사옵니다."
말하고 나서 세녕은 겁이 났다. 어머니는 딸이 정정하기를 기다리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녕은 무릎 위에 내려놓은 손가락들을 꼼지락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때는 많이 억울하였사옵니다. 지금 그날로 돌아가도 울 것 같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도 마음대로 하실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자라고 나서 들었사옵니다. 그날은 누가 안 된다고 하는지 여쭈어도 알려 주지 않으셨사옵니다. 그날 밤의 저는 어려서 어머니께서 숨겨 두신 바카라을 다시 주시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사옵니다. 어머니가 주고 싶지 않아서 안 주시는 줄 알았사옵니다."
"주고 싶지 않았으면 그 바카라들을 내가 왜 아직도 가지고 있겠느냐."
"가지고 계시옵니까?"
"다 가지고 있지는 않다. 네가 쓰던 것 가운데 남은 것을 두었다. 궁을 옮길 때 짐을 싸던 상궁이 버려도 되느냐 물어 그대로 두라 하였다. 네가 그린 꽃도 그 사이에 있었다."
"그럼 보고 싶사옵니다."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지금 말씀해 주시지 않았사옵니까. 소녀는 여태 없어진 것으로 알았사옵니다. 보기만 하겠다 해도 안 되는 것이옵니까?"
중전은 서안의 꽃잎을 집었다 놓았다. 세녕은 더 조르지 않았다. 남겨 둔 바카라이 있다는데, 그 사실만으로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랐다. 오래 기다린 것을 이제 달라 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유난히 철없게 들렸다.
"그 바카라을 읽으면 오늘 빈청에 든 일도 잊고 처소에 있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는 약조 못 하옵니다. 바카라을 받으려고 어머니께 거짓말을 할 수는 없사옵니다. 내일 답을 듣기로 하였으니, 그 일은 확인해야 하옵니다."
"세자가 들으면 되지 않느냐. 네가 약조한 일이라 반드시 네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부터 버려라. 너는 앞으로도 못 지킬 약조를 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멈추는 편이 낫다."
"아우가 듣더라도 소녀가 듣겠사옵니다. 내일 문안을 마친 뒤 동궁으로 가겠다고 이미 말했사옵니다. 그 말을 바꾸려면 까닭을 알려 주어야 하옵니다. 어마마마께서 못 가게 하셨다고 해도 되겠사옵니까."
"세자 앞에서 어미를 어렵게 만들겠다는 것이냐."
"소녀가 생각을 바꿨다고 하면, 왜 바꿨는지 아우가 물을 것이옵니다. 대답하지 않으면 소녀가 마음에 없는 약조를 한 것으로 알 것이옵니다. 오늘은 함께 보자 하고 내일은 모른다 하는 누이가 되기 싫사옵니다."
"싫은 일이 많아졌구나."
"전에도 싫은 것이 있었사옵니다. 지금처럼 다 말씀드리지는 못했사옵니다."
중전이 일어나자 세녕도 몸을 세웠다. 어머니는 등을 돌린 채 딸이 따라오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세녕은 그 자리에 서서 발이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내일 문안은 평소처럼 들라. 동궁에 가는 일은 내가 다시 생각하마. 오늘은 처소에서 쉬고, 누구에게도 이 방의 말을 옮기지 마라. 세자가 부르거든 몸이 고단하다 하여라. 그것은 거짓말도 아닐 것이다."
"예, 어마마마."
"다친 사람에게 보낼 것을 상궁에게 이르마. 네가 직접 들고 다니지 않아도 전할 수 있다. 그 정도까지 내가 막는 어미로 생각하지 마라."
"소녀가 말씀드리지 않은 바람도 있다고만 기억해 주시면 되옵니다. 약재는 고맙게 받겠사옵니다. 보내실 때 어느 분에게 쓸 것인지 상궁에게 알려 드리겠사옵니다."
세녕은 물러가면서도 바카라이 어디에 있는지 묻지 못했다. 복도 끝에서 기다리던 궁인이 동궁으로 가시겠느냐고 물었다. 오늘은 처소로 간다고 답하자, 궁인은 세자가 기다리신다는 전갈을 전했다.
"기다리지 말라 이르거라. 오늘은 나도 눕고 싶다."
궁인이 돌아간 뒤 세녕은 제 처소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방석을 깔아 주려는 손을 멈추게 하고 창가에 앉았다. 꽃을 그려 끼워 둔 바카라이 어느 바카라이었는지 떠올리려 했으나, 바카라등보다 그려 놓은 꽃의 색이 먼저 생각났다.
운종가에서 잡혀 온 두 사내는 관아에 들자 누구의 집 사람인지부터 밝혔다. 한 사람은 시전 상인의 아들이었고, 다른 사람은 북촌의 이름난 집에서 나왔다고 했다. 사령이 팔을 놓자 옷을 털며 감찰을 어디서 볼 수 있느냐고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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