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한여름을 앓다5

by로벤

5화 — 남은 손가락

정암엔 이제 완연히 겨울이 내려앉았다. 방파제 너머 바다는 잿빛이었고, 배들은 하나같이 묶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빈 동 앞엔 며칠째 같은 자리에 눈이 쌓여 있었다.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카페 칠판도 며칠째 넘어진 채였는데, 이번엔 아주머니도 세워두지 않았다.

세 번째 진료에서, 나는 처음으로 먼저 물었다.

"그 사고가 뭔데요.“

정혜란은 파일을 덮었다. 손 위에 얹은 채로, 한참 나를 바라봤다. 그 침묵이 오히려 대답 같았다.

"열두 살 때요. 동생이랑 젖은 방파제에 갔었죠. 기억 안 나요?“

동생.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몸속 어딘가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라기보다는 감각에 가까운 것. 오랫동안 안 쓰던 문을 억지로 여는 느낌.

"재민이요."

정혜란이 말했다.

"동생 이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조금씩, 정혜란의 말과 내 안 어딘가에 묻혀 있던 조각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여름, 젖은 방파제. 파도가 거세지자 나는 겁이 났고, 재민의 손을 붙잡은 내 손에 힘이 빠졌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재민은 물살에 휩쓸렸다.

재민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한 성묘가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았다. 나는 그동안 그 여름을, 그리고 그 여름이 남긴 자리를 통째로 지워버렸던 것이다. 아니, 지운 게 아니라 어딘가에 눌러 담아놓고, 그 위에 다른 것들을 쌓아왔다. 민철을 만났을 때, 나는 그 쌓아온 것들 중 어떤 하나를 무너뜨릴 핑계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죄. 그 안에서라면, 내가 벌 받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

민철은 처음부터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의 무심한 시선도, 취해서 뱉은 말 한마디도, 그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사소한 일들이었을 뿐. 나는 그 사소함들을 붙잡아 몸의 일부와 맞바꾸는 의식을 치러온 것이다. 오직 나 혼자만 아는 방식으로, 오직 나 혼자만을 위한 벌로.

정혜란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몸을 그만 쓰세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방파제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바람은 여전했다. 나는 남은 손가락으로 코트 주머니 속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만지작거렸다. 정혜란이 준 것이었다. 재민의 얼굴이 담긴, 빛바랜 사진. 사진 속 아이는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카페 앞을 지나는데, 아주머니가 칠판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오늘은 아무 말 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민철이 늦게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손이 컸고, 여전히 그 손으로 아무것도 부수지 않았다. 그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번엔 진짜 이유가 있었다. 그저 야근이 늦어졌을 뿐인, 아무것도 아닌 이유. 나는 아무것도 내주지 않았다. 애초에 내줄 이유가 없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오랫동안 사랑을 앓아온 게 아니라, 그저 한 여름을 앓고 있었다.

이 사실을 그에게 말할지, 아니면 이대로 나 혼자의 겨울을 건너갈지,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작가의 이전글[단편] 한여름을 앓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