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물비린내
가끔 여름이 떠오른다. 정암의 여름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된 여름. 물소리가 먼저 온다. 그 다음엔 축대. 젖은 시멘트, 물이끼가 낀 돌의 표면, 누군가의 슬리퍼가 미끄러지는 소리. 그 다음엔 목소리. 아니, 목소리라기보다는 목소리가 되기 전의 어떤 것. 비명이라고 하기엔 짧고, 울음이라고 하기엔 날카로운.
이런 장면들은 순서 없이 떠오른다. 앞뒤 맥락도 없다. 그냥 여름, 물가, 계단, 그리고 그 소리. 나는 이걸 꿈이라고 생각해왔다. 자주 꾸는 꿈. 근데 요즘 들어 이게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무렵 시장에서 용대를 마주쳤다. 초등학교 동창인데, 몇 년 만이었다. 그는 예전보다 살이 좀 붙었고, 목소리는 여전히 컸다. 반갑게 인사하며 이런저런 안부를 묻더니, 별생각 없이 이런 말을 던졌다.
"너희 동네 그 방파제, 요즘 사람들 안 간다더라. 예전에 무슨 일 있었다고."
"무슨 일?"
"몰라, 나도 어릴 때 들은 거라. 누가 빠졌다던가 뭐."
용대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생선 값이 올랐다느니, 옛 동네가 다 재개발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나는 웃으며 맞장구쳤지만, 집으로 오는 내내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방파제. 누가 빠졌다던가.
재민.
이 이름이 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누구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근데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왼쪽 눈이 욱신거린다. 이미 거의 안 보이는 눈인데도.
두 번째로 정혜란을 만난 건 예정에 없던 진료였다. 오른쪽 다리 감각이 이상하다고 전화를 했더니, 다음 날 바로 오라고 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자꾸 창밖을 봤다. 겨울인데도 창문 틈으로 뭔가 물비린내 같은 게 나는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 거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정혜란은 파일을 펼쳐놓고 있었는데, 이번엔 나에게 뭘 묻지 않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사고 이후로 시작된 거예요, 이거."
"무슨 사고요.“
정혜란은 잠깐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처음으로 뭔가 동정인지 피로인지 모를 감정이 스쳤다.
"천천히 얘기해도 돼요. 오늘 다 안 해도 되고.“
나는 그 말이 무서웠다. 천천히 얘기해도 된다는 건, 얘기할 게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진료실을 나왔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를 의심해보려고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민철의 잘못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나는 뭔가 다른 이유로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 거라고.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원망이 아니라 부끄러움에 가까운 것.
나는 갑자기, 그를 원망할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걸, 이제야 겨우 떠올린 것처럼.
버스 창밖으로 방파제가 지나갔다. 파도가 여전히 흰 거품을 내며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면서, 왼쪽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잠깐 물속에서 누군가 손을 뻗는 장면이 스쳤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채 알아채기도 전에, 다시 잊어버렸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다른 용건은 없었다.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어머니는 평소처럼 시시콜콜한 얘기를 늘어놓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너도 이제 여름 되면 성묘 한번 가자.“
나는 어디로 가자는 거냐고 묻지 못했다. 그냥 알겠다고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