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한여름을 앓다2

by로벤

2화 — 반쪽의 세계

아파트 단지는 세 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두 동은 이미 빈집투성이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엔 녹슨 자전거나 깨진 화분 같은 것들만 남았다. 나는 가끔 그 빈 동 앞을 지나가며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 집도 저렇게 비게 될까.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은 꼭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부는 날이었다.

목록을 만들어본 적 있다. 처음엔 그냥 습관이었다. 손가락 하나, 그 다음엔 왼쪽 눈, 그 다음엔 오른쪽 귀. 순서대로 적어두면 뭔가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나중엔 이 목록을 적는 일 자체가 무서워져서 그만뒀다. 다음 줄에 뭐가 적힐지 모른다는 게, 생각보다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민철을 처음 만난 건 방파제 근처 술집에서였다. 그날도 바람이 심했고, 나는 우산이 뒤집혀서 반쯤 젖은 채로 들어갔다. 그는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내가 우산을 접느라 낑낑대는 걸 보더니 별말 없이 손을 뻗어 도와줬다. 그 손이 컸다. 뭘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손인데, 정작 아무것도 안 부수는 사람이라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그날 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다. 그가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고,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근데 나는 그 손을 오래 기억했다.

그 후로 몇 번 더 같은 술집에서 마주쳤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주였는데, 그땐 그게 운명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좁은 도시였기 때문일 뿐일 수도 있는데.

왼쪽 눈은 서서히 흐려졌다. 어느 날 갑자기 안 보이게 된 게 아니라, 몇 달에 걸쳐 조금씩. 마치 방파제 너머 수평선이 매일 조금씩 지워지듯이. 처음엔 그냥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다. 병원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병원이라는 곳을 떠올리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눈이 흐려지기 시작한 건 민철이 나를 보지 않게 된 무렵과 겹친다. 정확히는 그가 나를 보긴 봤다. 근데 어딘가 다른 곳을 보는 것처럼 봤다. 저녁을 먹을 때도, 침대에 누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때도, 그의 시선은 나를 통과해서 창밖 방파제 쪽으로 가 있었다. 나는 그걸 외면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 왼쪽 눈이 그 대가를 치렀다고, 그렇게 정리했다.

오른쪽 귀는 다르다. 이건 어느 날 밤, 그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별 뜻 없이 던진 말 때문이었다. "너랑 있으면 가끔 숨이 막혀." 그 말을 들은 다음 날부터 오른쪽 귀가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이명이 며칠 가더니, 그 다음엔 그냥 안 들리게 됐다. 반쪽짜리 세계에서 사는 기분이었다. 왼쪽은 흐리고, 오른쪽은 고요한 세상.

민철은 이런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냉동창고에서 늦게 돌아왔고, 나는 반쯤 보이고 반쯤 들리는 채로 그를 기다렸다. 이상하게도 그 기다림이 편했다. 뭔가를 잃을 때마다 오히려 그와 나 사이에 뭔가가 하나씩 채워지는 느낌이었으니까.

카페 아주머니는 내 눈과 귀가 나빠진 걸 알고 나서부터 유난히 큰 소리로, 정면에서 말을 걸어주기 시작했다.

"오늘은 뭐 드릴까요“

하고 꼭 내 오른쪽에서, 왼쪽 눈 쪽에서 말을 건네줬다. 배려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배려가 조금 불편했다. 마치 내 몸이 이미 남들 눈에 다 읽히는 문서가 된 것 같아서. 한번은 그녀가 커피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고마웠는지 서운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정암의 겨울 저녁은 일찍 온다. 4시만 되어도 창밖이 어둑해지고, 바람은 그 어둠 속에서 더 크게 들린다. 아파트 복도 전등은 반쯤 나가 있어서 계단을 오를 때면 한쪽은 밝고 한쪽은 캄캄했다. 나는 그 캄캄한 쪽 계단을 오를 때마다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안 보이는 눈으로 안 보이는 계단을 오르는 거니까, 딱히 손해 볼 게 없다고.

민철과 나는 그렇게 3년을 살았다. 남들 눈엔 평범한 커플로 보였을 거다. 그는 여전히 손이 컸고, 여전히 그 손으로 아무것도 부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그 믿음의 증거로 내 몸의 일부를 하나씩 내주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지가 왔다. 시립 병원에서 보낸 정기검진 안내문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나서야 내가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정확히는, 다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잊고 있었다는 게 맞겠다. 편지에는 다음 진료일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엔 담당의 이름도 있었는데, 낯설었다. 분명 몇 번은 만났을 텐데.

정기검진이라고 했다. 뭘 검진하는 건지는, 이상하게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다. 정혜란.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데,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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