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보고서를 쓰는 데는 꼬빡 하루가 걸렸다.
마르틴은 사무실 문을 닫아걸고, 몇 번이고 문장을 고쳐 썼다. 인쇄 경로, 배포 방식, 확인된 인쇄소의 이름. 이런 것들은 사실대로 적었다. 라우터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의심을 살 뿐이었다.
문제는 마지막 문단이었다.
최초 작성자 및 유통 경로의 상류(上流)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며 현재까지 특정하지 못했음.
그는 이 문장을 세 번 지웠다가 세 번 다시 썼다. 이건 거짓말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는 ‘특정하지 못했다’고 썼을 뿐, ‘특정할 수 없다’고 쓴 건 아니었으니까. 그 차이가 얼마나 하찮은 자기기만인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갈라진 자리가 유난히 시렸다.
20년 전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번엔 거의 다 말했다. 그런데도 결국 남는 건 똑같았다. 그녀가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는 것.
다음 날 아침, 그는 그 보고서를 들고 라우터의 사무실로 갔다.
라우터는 여느 때처럼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이 그의 얼굴에 부드럽게 걸려 있었다. 그는 보고서를 받아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마르틴은 그 침묵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흠.” 라우터가 마지막 문단에서 잠시 멈췄다.
“상류를 못 찾았다라...”
“인쇄소 쪽 경로는 거의 다 막혀 있었습니다. 심부름꾼들도 서로를 모르는 구조로 짜여 있어서요.” 마르틴은 준비해둔 말을 담담하게 뱉었다.
라우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류를 다시 한번 훑어보더니, 펜을 들었다.
“뭐, 이 정도면 충분해.” 그가 말했다.
“이런 지하 조직들, 어차피 뿌리를 완전히 뽑는 건 불가능해. 하나 자르면 다른 데서 또 나니까. 잡초처럼 말이지”
그는 서명란에 펜을 갖다 댔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마르틴을 향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선이었지만, 마르틴은 그 안에서 뭔가를 본 것 같았다. 확신도 의심도 아닌, 그저 오랫동안 사람을 다뤄온 자의 습관적인 헤아림 같은 것.
라우터는 아무 말 없이 서명했다. 도장을 찍었다. 익숙한, 경쾌한 소리.
“수고했어, 마르틴.” 그가 웃으며 서류철을 덮었다.
“가서 좀 쉬어. 요즘 안색이 안 좋았잖아.”
“감사합니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마르틴은 라우터가 정말 아무것도 몰랐는지, 아니면 모든 걸 알면서도 지금은 굳이 건드리지 않기로 한 건지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걸 영원히 알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 도시가 사람들에게 가르쳐온 방식이었다.
그날 저녁, 마르틴은 퇴근길에 다시 그 골목을 지났다. 서점 앞에 멈춰 섰지만, 문을 열지는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에바가 카운터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보고도 모른 척했는지도 몰랐다.
그는 오래 서 있지 않았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돌아오자 그레테가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식탁에 앉아 숙제를 하고 있었다. 평범한 저녁이었다. 마르틴은 코트를 벗어 걸며, 그 평범함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날 밤, 그는 다시 서재에 앉았다. 그 시의 원본 아니, 원본이 아니라 원본을 필사한 사본 한 장을 그는 몰래 보관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다시 꺼내 읽었다.
언젠가 서랍을 열어보면 안다
씨앗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씨앗이 어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손끝이 봄을 기다리는 법을 배웠을 뿐
그는 그 종이를 서랍 맨 아래, 다른 서류들 밑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서랍을 닫았다.
다음 날 아침, 그는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11월의 도시는 여전히 색을 잃은 채였다. 콘크리트 위에 덧입힌 회색 페인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20년째 바래가고 있었다. 마르틴은 그 색을 오래 바라봤다. 저건 회색이 아니라, 색이 포기한 자리에 남은 얼룩이라고, 그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옷을 입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길에 나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