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첫 마디
이건 민철을 사랑한 대가다.
정암의 겨울은 바람으로 시작해서 바람으로 끝난다. 방파제를 넘어온 파도가 도로까지 튀어 오르고, 밤이면 창틀이 덜컹거릴 정도로 바람이 분다. 이 도시는 원래 어업으로 컸다고 했다. 지금은 배 몇 척만 겨우 드나들고, 나머지는 방파제에 묶인 채 겨우내 흔들리기만 한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도 한때는 수협 직원들 숙소였다고 했다. 지금은 그냥 낡은 건물이다. 1층 어판장 사무실 자리엔 카페가 들어섰는데, 간판도 없이 문 앞에 칠판 하나 세워두고 오늘의 커피를 적어놓는다. 바람이 심한 날이면 그 칠판이 넘어져 있다. 아무도 다시 세워두지 않는다. 주인아주머니는 그럴 때마다
“또 넘어졌네”
하고 웃으며 세워놓는데, 나는 그 웃음이 어딘지 억지스럽다고 늘 생각했다.
나는 잘린 손가락이 자랑스럽다. 새끼 손가락, 첫 마디.
사람들은 묻는다. 아프지 않냐고. 아프다. 그런데 그 아픔이 나를 어딘가에 소속시켜준다는 걸, 그들은 모른다. 소속이라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근데 정확히 그런 느낌이었다. 뭔가를 잃을 때마다, 나는 민철과 나 사이에 새로운 방이 하나 생기는 것 같았다. 그 방엔 아무도 못 들어온다. 오직 우리 둘만 안다, 그 방이 거기 있다는 걸.
민철의 손은 크다. 거칠다. 처음 그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이 손이 언젠가 나를 다치게 할 거라고. 틀린 예감은 아니었다, 고 그때는 믿었다.
그는 그런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게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손이 큰 사람은 보통 뭔가를 부수거나, 아니면 뭔가를 꽉 붙잡거나 하는데. 민철은 그냥 그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냉동창고에서 일하는데, 정확히 뭘 하는 일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서류를 만지는 일이라고 했다. 그 손으로 서류를 만지는 상상을 하면 좀 우스웠다. 웃을 때 눈이 거의 감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웃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그는 늘 같은 순서로 움직였다. 신발을 벗고, 잠깐 현관에 서서 숨을 고르고, 그 다음에야 나를 불렀다. 나는 그 잠깐의 정적이 좋았다. 마치 그가 밖에서 묻혀온 뭔가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 들어오는 것 같아서.
그날 그는 무척 늦게 들어왔다. 바람이 심해서 배가 늦었다고 했다. 냉동창고 일에 배가 늦고 빠르고가 무슨 상관인지, 그땐 이상하다고 생각도 못 했다. 나는 그냥 저녁을 다시 데웠고, 그는 미안하다고 했다.
"다시는 안 늦을게." 그가 말했다. "손가락 걸고 약속해.“
그는 웃으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도 웃으면서 내 손가락을 걸었다. 별거 아닌 장난이었다. 우리는 평소처럼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손가락이 없어진 건 그 다음 날 아침이었다. 정확히는 다음 날 아침에 없어진 걸 발견했다. 새끼 손가락, 첫 마디. 어젯밤 걸었던 그 손가락이었다.
나는 커피잔을 들다가 놓쳤다. 잔이 깨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 시간 아파트는 늘 조용하다. 창밖에서 바람이 전깃줄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 정도. 그 정적 속에서 잔 깨지는 소리는 마치 무슨 신호처럼 들렸다. 그날 민철은 또 미안하다고 했다. 이번엔 뭐가 미안한지 나도 알 것 같았다. 그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근데 둘 다 말하지 않았다.
이게 우리의 방식이었다. 그는 사과하고, 나는 몸의 어딘가를 잃는다. 공평한 거래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는.
정암엔 오래된 말이 있다. 배가 나갈 때마다, 집에 남은 사람이 뭔가 하나는 내줘야 배가 무사히 돌아온다고. 어릴 때 옆집 할머니한테 들은 말이었다. 그땐 그냥 미신이라고 웃어넘겼다. 근데 요즘은 그 말이 자꾸 다르게 들린다. 민철이 나가고 돌아오는 사이, 나는 정말로 뭔가를 하나씩 내주고 있었으니까. 내가 뭔가를 내줘야, 그가 무사히 돌아온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오늘 아침에도 하루가 없어졌다. 정확히는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창밖엔 여전히 바람이 분다. 민철은 오늘도 무사히 돌아올 거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또 뭔가를 내주고 있었다. 이번엔 무엇을 내줬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