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
바카라을 다 훑어본 박선생. 바카라갈피처럼 접혀 있던 페이지를 편다.
거기, 아마도 지수가 접어둔 자리에 밑줄 그어진 한 구절이 있다. 밑줄은 볼펜으로, 여러 번 겹쳐 그은 흔적이다.
"뿌리는 스스로 옮겨 가지 않는다. 누군가 파내지 않는 한."
시는, 아니 모든 문학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 의미는 독자의 몫으로 남기 마련이다. 이 문장은 두 갈래로 읽힌다. 누군가가 지수를 그 뿌리에서 파내주길 바랐다는 뜻으로도, 뿌리를 파내는 행위 자체가 식물에게 가해지는 폭력이었다는 뜻으로도. 그러나 박선생은 지수가 어떤 생각으로 밑줄을 그어두었는지 끝내 알 수 없다.
문득, 35년 전 그 교실에서 지수가 던졌던 질문이 되살아난다.
선생님은 저를 구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선생님이 저를 구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때는 대답을 얼버무렸던 것 같다. 지금 이 화단 벤치에 앉아서도, 그는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이제는 안다. 그 질문에 답을 못 한 게 그때뿐만이 아니라, 그 뒤로 자신이 붙잡았던 모든 학생 앞에서 매번 되풀이됐다는 것을. 명렬표 위 별표들, 가방 속에 늘 여분으로 넣어 다녔던 그 바카라들. 사명감이라고 불러온 것의 다른 이름이 무엇일 수 있는지, 그는 이제서야 조심스럽게 의심해본다.
지수의 딸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물었다.
"선생님, 혹시 엄마가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박선생은 모른다. 35년간 몰랐다. 그가 아는 건 오직 그 여름, 텅 빈 교실, 자신이 건넨 바카라, 그리고 그 여름방학이 지난 뒤 지수가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 "더 이상 울지 않음"이 회복이었는지, 다른 무언가의 시작이었는지조차 그는 확신할 수 없다.
"...아니. 나는 그 뒤로 몰라."
'바카라임질 것도 아니면서...'라는 딸의 대답이 박선생의 귀에 들리지만 딸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뭐라구?"
"네? 아무말도 안했는데요?"
딸은 무언가 할 말이 더 남은 듯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작별 인사를 한다.
딸이 떠나고, 박선생은 학교 정문을 돌아본다. 리모델링으로 예전 그 교실이 있던 자리는 지금 다른 용도로 바뀌어 있다. 저녁 바람이 화단의 마른 잎을 쓸고 지나간다. 정문 기둥 어딘가, 오래전 매미 한 마리가 허물을 벗고 날아갔던 그 자리쯤에서, 올여름의 매미 소리가 다시 울기 시작한다.
속은 비어도 자리는 늘 같은 자리에서 운다는 걸, 그는 문득 생각한다.
교무실 창문으로 보이는 불이 하나둘 꺼지고 있다. 몇 해 전 학교 전체가 LED로 조명을 교체하면서, 그 옛날 두 달째 깜빡이던 형광등 같은 건 이제 존재할 수 없게 됐다. 깜빡임도 없이, 켜짐과 꺼짐만 분명한 빛. 그는 그 완전함이 어쩐지 낯설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이렇게 깜빡임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정작 사람 마음속에서 몇십 년째 꺼지지도 켜지지도 않은 채 깜빡이고 있는 것들은 누가 갈아줘야 하는지, 그는 여전히 모른다고 생각한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다시 한번 그의 머릿속을 스친다. 이번엔 그 단어가 그때와 같은 뜻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그때 무엇을 구한 것일까. 혹은, 무엇을 빼앗은 것일까.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답을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일까 — 아니면 그저, 또 한 번 확인하고 싶을 뿐인 것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