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의 그 상담 이후, 여름이 오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몇 번의 짧은 대화가 더 오갔다. 복도에서 스치듯, 혹은 야자 감독 중 잠깐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이선생의 그 한마디는 박선생의 머릿속 어딘가에 박혀서, 그는 이후로 지수를 부를 때마다 문을 조금 더 활짝 열어두거나, 상담 시간을 일부러 짧게 끊는 식으로 스스로도 잘 설명 못 할 조심스러움을 덧붙이게 됐다. 그 조심스러움이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것인지, 그는 그때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야자 시간. 다른 학생들 다 나가고 둘만 남았다. 초저녁,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고 운동장은 텅 비어 있다. 열어둔 창으로 매미 소리와 함께 후텁지근한 바람이 들어온다. 선풍기 한 대가 낡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젓는다. 복도 저편에서 다른 반 야자 감독 교사의 발소리가 지나갔다가 멀어진다. 오늘도 그는 교실 뒷문을 열어둔 채다.
칠판에는 그날 수업 판서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시 한 구절, 화자의 정서를 묻는 질문. 지난봄 상담실에서 지수와 나눴던 바로 그 시다. 분필 가루가 교탁 위에 얇게 앉아 있다. 지수의 바카라상 위엔 문제집과 나란히, 손으로 접은 종이학 하나가 놓여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박선생은 교탁 앞에 선 채, 지수의 바카라상 쪽으로는 다가가지 않는다. 그와 지수 사이엔 바카라상 두 줄만큼의 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 여름방학 계획은 좀 세웠어? 이모님 댁 얘기는."
"...아직요."
그 대답의 짧음에서, 그는 이모님 댁 얘기가 결국 없던 일이 됐다는 걸 짐작한다. 그날 그 마당에서 봤던 것들이 다시 떠오른다. 정렬된 신발들과 손글씨 현수막에 쓰인 글씨. "우리는 가족입니다."
"너는 아까워. 네가 그 안에서 이렇게 지내는 게, 나는 정말 못 견디겠어."
'아까워'라는 말이 진학지도, 상담의 언어인지, 그 이상의 무엇인지 모호하게 걸쳐 있다. 지수는 잠시 그를 바라본다. 시선의 길이가 심상치 않게 길다. 학생과 상담할 때 지긋이 바라보는 일은 박선생의 일이었는데, 이번에는 그 역할을 지수가 가져간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지수가 말한다.
"선생님은... 저를 왜 이렇게까지 신경 쓰세요?"
박선생은 대답하지 못한다. 대답할 말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 어느 것도 완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한참 후 박선생은,
"... 네가 담임인 나한테는, 그냥 학생 중 한 명이 아니어서."
말을 뱉고 나서 그 자신도 당황한다. 그리고는 정정하듯 덧붙인다.
"아, 그러니까 내 말은, 네 잠재력이, 네가 가진 게 아깝다는 거야."
지수는 그 말을 잠자코 듣다가, 조금 다른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왜 이렇게까지 신경 쓰냐고 물었을 때보다 지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온도가 2도 정도는 내려간 느낌이다.
"선생님은... 저를 구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선생님이 저를 구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교실 안의 공기가 순간 다르게 느껴진다. 박선생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열일곱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정확해서, 그는 잠깐 자신이 오히려 상담받고 있는 쪽처럼 느껴진다. 선풍기가 고개를 돌리며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한 번 휘젓고 지나간다.
"아... 잘 모르겠다. 둘 다인 것 같기도 하고."
그건 그가 그날 한 말 중 가장 정직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가방에서 바카라 한 권을 꺼낸다. 표지가 이미 낡은, 절판된 지 오래인 지역 출판사의 시집으로 작가도 이 시집 한 편을 남기고 사라졌고 사람들에게 그리 주목 받지도 못한 바카라이다. 제목은 <뿌리의 자리>.
그는 바카라상 사이 통로로 두 걸음 다가가, 팔을 뻗어 바카라을 건넨다. 손끝과 손끝이 스치지 않도록, 바카라의 모서리만 정확히 지수의 손에 놓이도록. 그 거리를 지키는 게, 그 순간 그가 유일하게 확신을 갖고 해낸 동작이었다. 진심어린 선의와 오만함 사이에는 원자 하나의 지름만큼의 거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막아세웠다.
"이거 읽어봐. 나는... 네가 세상에는 다른 삶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그 바카라에서 그 길을 찾았으면 좋겠구나."
지수는 아무 말 없이 바카라을 받아 쥔다. 표지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본다. 그 눈빛엔 고마움과 함께, 아까 그 질문을 던졌을 때와 같은 어떤 서늘한 정확함이 아직 남아 있다. 마치 그를 다 꿰뚫어 보고도, 그럼에도 이 바카라을 받기로 한 사람의 눈빛.
창밖 해는 거의 다 졌다. 선풍기가 계속 고개를 젓는다. 박선생은 두 걸음 물러나 다시 교탁 뒤로 돌아간다. 그 두 걸음이, 그날 그가 지킨 유일한 선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