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구원3

by로벤


2030년, 며칠 뒤. 학교 정문 앞


늦더위가 꺾이지 않은 오후, 매미 소리 대신 이제는 가끔 풀벌레 소리가 섞인다. 박선생은 짐을 챙겨 퇴근하던 길이다. 정문 화단 앞, 낯선 젊은 여자가 서 있다. 종이가방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다. 화단의 봉숭아는 이미 다 져서 씨앗 꼬투리만 남았다.



"저… 실례합니다. 혹시 박선생님 맞으세요?"



그는 걸음을 멈춘다.



"저희 엄마가... 지수라고, 1995년에 이 학교 다니셨대요."



그 순간 그의 표정이 굳는다. 당혹스러운 상황이기는 하지만 반가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 그 가운데 정도의 기분을 느끼지만 아무래도 당혹스러움이 크다.


여자는 종이가방에서 낡은 바카라 한 권을 꺼내 건넨다. 표지는 바래서 제목 글씨가 거의 안 보이고, 모서리가 닳았다. 몇몇 페이지에 접힌 자국들이 얼핏 보인다.



"엄마 유품 정리하다가 나왔어요. 안쪽에 선생님 성함이 적혀 있어서."


"... 어머니는."


"두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정문 화단 옆 벤치에 누가 흘리고 간 우산 하나가 접힌 채 놓여 있다.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을 것처럼.



"아, 갑자기 나타나서 당황하셨겠네요. 죄송해요 다짜고짜... 특별한 걸 뭐 여쭤보려고 온 건 아니고요. 그냥... 이 바카라이 왜 엄마한테 그렇게 중요했는지, 한 번도 말씀을 안 하셔서 늘 궁금했거든요. 제 기억 속에서 엄마는 성경바카라과 그리고 이 바카라을 함께 펼쳐놓았던 적이 많았거든요."



박선생은 바카라을 받아든다. 표지를 넘기기 전부터, 안쪽에 적힌 자신의 필체를 이미 알고 있다.


며칠 전 반창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 바카라을 여러 학생에게 줬다는 것. 그는 잠깐 이 순간이 조금 덜 특별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동시에,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에 조금 놀란다.



여자가 떠나기 직전, 문득 생각난 듯 덧붙인다.



"선생님, 근데 그때 그 교회 있잖아요? 그거... 아니에요."



말은 거기서 끊긴다. 박선생은 뭐가 아니라는 건지 묻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는 이내,



"(조금 망설이다가) 아, 그리고... 엄마가 그러셨는데, 그 교회 없어진 거요. 선생님 때문이 아니라, 그 몇 년 뒤에 세무조사인지 뭔지 크게 있었대요. 그것 때문이라고. 선생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여자가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 던질 때와는 다른 무게가 되어 박선생에게 떨어진다. 아니 여러 조각의 돌이 되어 떨어진다. 그는 그 말을 여러 방향으로 되짚어보지만, 어느 쪽으로도 확정할 수 없다.



여자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선다.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박선생은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뒷모습의 걸음걸이 어딘가에 지수의 흔적이 있는지 찾아보려 하지만, 35년이라는 시간은 그런 걸 확인하기엔 지나치게 길다.



그는 화단 벤치에 걸터앉는다.


우산 임자 없는 우산 옆에, 낡은 바카라을 무릎에 얹어 표지를 넘긴다. 첫 장, 15도 정도 기울어진 자신의 필체를 확인한다. 서른다섯 해 전, 지금과 비슷하지만 아직 각이 서 있던 글씨체. 잉크가 갈색으로 바랬다. 종이에서 나는 냄새, 오래된 바카라 특유의 마른 나무 냄새와 눅눅함이 뒤섞인 냄새가 훅 끼친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그는 화단도, 학교 정문도, 2030년이라는 숫자도 잠깐 잊는다.



바카라장을 넘기는 손끝 아래로, 시간이 거꾸로 접힌다.





1995년 (회상 1), 초가을. 도시 외곽


가정방문을 위해 찾아간 곳. 하늘은 흐리고 바람이 논을 훑고 지나간다. 벼가 아직 푸른 색으로 선선한 바람과 적당히 어울리는 빛이다. 논밭 사이로 예전 공장이나 창고로 썼을 법한 곳을 개조한 듯한 건물이 보인다.



정식 간판도 아닌 팻말에는 '생명의 강 교회'가 적혀있다.


페인트가 반쯤 벗겨지기는 했으나 글씨는 최근에 덧칠한 듯 선명하다. 건물 옆에는 낡은 승합차 두 대가 나란히 주차돼 있다. 차량의 양 옆 유리창에는 '주일학교 픽업'이라는 손글씨 스티커가 붙어있다.



마당에 신발이 줄지어 놓여 있다. 어린아이 것부터 노인 것까지, 크기순으로 정갈하게. 신발 정렬의 완벽해보이는 규칙성이 무언가 기이하다.



안에서 합창 소리. 소박한 찬송이지만 박자가 지나치게 일치한다.


마당 한켠에는 교회 이름처럼 손글씨로 쓴 현수막이 붙어있다. '우리는 가족입니다.'라는 나름 공들여 쓴 글씨. 그 아래, 작은 게시판에 이번 달 헌금 내역과 다음 절기 행사 일정이 단정한 글씨로 붙어 있다. 무언가 숨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왜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내용들이 조목조목 지나치게 투명하게 공개돼 있어서, 오히려 박선생은 뭘 봐야 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박선생은 마당 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신발 한 켤레 놓을 자리가 없어 그는 맨 끝, 조금 삐뚤게 자기 구두를 벗어놓는다. 오와 열이 완벽한 그 규칙성 속에 삐뚤어짐 하나가 유독 눈에 띈다. 가정 방문이야말로 학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교사란 담당하고 있는 학생들의 삶을 좋은 길로 이끌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직업이기 때문이며 발령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박선생의 눈빛에서는 그 강력한 사명감이 언제든 빛나고 있었다. 박선생은 생각한다.



'이곳은 학교나 교실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곳에서 구원을 행하고야 말겠다. 그래야 한다'





1995년 (회상 2), 지수의 집


좁고 낡았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집. 벽에 성경 구절이 담긴 액자, 색 바랜 조부모 사진이 하나 벽에 걸렸다. 남루한 옷차림을 통해 그 시절의 가난했던 흔적이 묻어난다. 창틀에 작은 화분 하나 놓여있는데, 잎이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다. 부엌 쪽에서는 된장국 끓는 냄새가 넘어온다.



지수의 어머니는 지치고 마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상하게 눈빛만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듯 평온하다. 물기도 없는 손을 앞치마에 연신 문지르며 박선생을 맞는다.



밥상 위, 낡은 성경바카라 옆에 지수의 문제집이 나란히 놓여 있다. 상 다리 하나가 짧아 밑에 접은 종이를 괴어 놓았다. 성경바카라 갈피에 코팅된 기도문 카드가 여러 장 꽂혀 있다. 지수 이름이 손글씨로 적힌 것도 하나 보인다. 몇마디 인사말을 건넨 후 박선생이 말한다.



"어머님, 지수가 대학 진학에 뜻이 있어 보이는데, 어머님 생각은 어떠신지…"


"선생님, 저는 여기 오고 나서요, 선생님. 제가 처음으로 웃었어요. 그전엔 웃을 일이 없었거든요."


말을 잇는다.


"지수 아빠 떠나고, 저는… 아니, 그건 됐고요. 여기 사람들이 저희를 받아줬어요. 그게 다예요."


'아니, 그건 됐고요'에서 끊긴 이야기는 다시 이어지지 않는다.



박선생은 말문이 막힌다. 창문이 작아 빛이 겨우 들어오는 방, 그 각도가 오래된 종교화 속 조명처럼 어머니의 얼굴에 비스듬히 걸린다. 자신보다 훨신 더 나이 많은 이들을 '학부모'라는 이름으로 대해야 하는 일은 늘 그렇듯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수를 위해 준비했던 이야기를 잘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큰 벽에 막힌 기분을 느끼던 박선생은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이 사람한테서 뭔가를 빼앗으려 하는 건가.'



아무런 줄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박선생은 갑자기 몇 년 전 민재가 떠오른다.





1993년경 늦겨울. 상담실


창밖에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히터가 오래돼 소리를 내며 돈다. 상담실 바카라상 위엔 그때그때 걷은 반성문 뭉치, 색이 바랜 상담 기록 카드, 종이컵에 담긴 식은 믹스커피가 놓였는데 커피 표면에 얇은 막이 앉았다. 창틀에는 서리가 껴서 바깥 운동장이 뿌옇게 보인다. 형광등 하나가 미세하게 깜빡이는데, 아무도 그걸 갈아달라고 요청서를 올리지 않아서인지 벌써 두 달째 형광등은 자신의 존재감을 그런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생활기록부 정정 때문에 한자 이름을 물어보는데, 민재가 모른다고 한다. 박선생은 볼펜 끝으로 상담 기록 카드를 톡톡 두드리며 대수롭지 않게 되묻는다.



"야 자기 이름 한자 뜻을 몰라? 아이고, 아버님한테 여쭤보지 그랬어."


"... 물어본 적 없어요. 아버지가 알려준 적도 없고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데, 아이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어 있다. 신경질적으로 손톱 끝을 물어뜯는 민재의 손은 이미 다 뜯겨서 붉게 일어난 살거스러미가 보인다. 박선생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릴까 하다가, 몇 마디를 더 건넨다. 아이의 아픔은 치유해주는 게 교사의 몫이니까. 그러자 민재가 시선을 창밖 눈발에 고정한 채 툭 뱉는다.



"아빠가 술 마시고 그랬어요. 너 원래 안 태어날 뻔했는데, 태어난 거라고..."



박선생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한다. 볼펜을 두드리던 손도 멈춘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아이는 오히려 담담해진다. 이미 여러 번 곱씹고 곱씹어서 이제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무뎌진 얘기라는 듯이. 심지어 민재의 입가엔 아주 옅은 웃음기 같은 것마저 스친다, 마치 자신도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사람처럼. 창밖 진눈깨비가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어 있다. 운동장의 뿌연 시야가 조금씩 하얗게 덮인다.



"... 그거, 언제 들은 얘기야."


"몰라요. 초등학교 때부터 몇 번. 아빠는 기억 못 할 걸요? 이름도 뭐 그냥 대충 지었겠죠. 자기도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을까요?"



그 뒤로 박선생은 민재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한 문장을 며칠 붙잡고 있었다.


'너 원래 안태어날 뻔 했는데 태어난 거라고'



뒤에 생략된 문장이 '너만 아니었으면 새끼야..'으로 시작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뒤이어 들었다. 퇴근길에도, 채점을 하다가도 문득 그 말이 떠오른다. 그는 메모지에 '학부모 통화 - 민재'라고 적어놓고도 며칠간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몇 번이고 속으로 문장을 고쳐본다.



"민재 아버님, 다름이 아니라"로 시작할지, "아버님,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으로 시작할지 이런 사소한 선택 하나에도 그는 오래 머뭇거린다. 꺼질지, 켜질지를 결정하지 못하는 깜빡이는 형광등처럼.



결국 어느 저녁, 그는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네 번 정도 울리고, 텔레비전 소리를 배경으로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받는다.



"저기 아버님, 민재가 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요. 다름이 아니라…"


"(술기운 섞인 목소리)예? 뭔 일 있었어요, 걔가?"



박선생은 최대한 신중하게, 자신이 들은 말을 에둘러 전한다. 상대는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다가, 점점 말수가 줄어든다. 나중엔 그저 "예, 예" 하는 짧은 대답만 돌아온다. 통화가 끝나기 직전,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런 얘기를… 민재가 선생님한테 했다는 말이죠."



그 말투에 담긴 것이 놀라움인지, 배신감인지, 박선생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오래 헤아려본다.


통화는 그렇게 어색하게 끝난다. 며칠 뒤 민재의 자리가 하루 비어 있다. 담임에게 전달된 사유는 "가정 사정"이라는 짧은 네 글자뿐이다. 다음 날 돌아온 민재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인사도, 대답도 평소보다 한 톤 낮아졌다. 박선생을 바라보는 눈빛은 원망인지 경멸인지 후회인지 알 수 없을만큼 초점이 없다. 민재 아버지는 그 뒤로 학부모 상담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고, 가정통신문 회신란도 늘 비어 돌아온다.


민재가 그 뒤 어떻게 됐는지 박선생은 알지 못한다.



민재 생각을 하다 지수 어머니 얼굴을 보며 현재로 돌아온 박선생은 생각한다.



'그때 나는 무엇을 구하려 했나. 왜 구하려 했나. 그 애의 상처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그 상처를 알고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내 안의 어떤 명령때문인가. 그때의 나는 그 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 자격이 있었나. 고작 1년을 함께 하는 그 교사라는 알량한 직업과 사명감이 그런 자격을 만들어주는 건가? 그 전화 한 통으로 내가 구한 것과 잃게 만든 것 중, 어느 쪽이 더 컸는지 나는 지금도 계산할 방법을 모른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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