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구원2

by로벤

짐을 챙겨 나오는 길, 계단에서 최선생과 마주친다.

최선생은 30대 후반, 담임을 맡은 지 9년 차. 업무분장 회의에서 종종 부딪히는 사이지만, 사석에서는 딱히 나쁠 것 없는 관계다. 계단 창으로 저녁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최선생의 실루엣 절반이 그늘에 잠겨 있다.

"어, 선생님 아직 안 가셨어요? 뭐 정리하시나 봐요."

"아, 예전 자료들이 좀 나와서."

말하면서 그는 어깨에 멘 가방끈을 무의식적으로 한 번 고쳐 멘다. 가방 안, 담임 수첩 사이에 끼워둔 명렬표의 존재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진다.

"(웃으며) 예전 자료라면... 옛날 제자들 자료 그런 거 말씀하시는 거죠? 선생님은 옛날 제자들 진짜 잘 기억하시더라고요. 저번에도 무슨 애 얘기하셨는데, 그 뭐냐, 종교 문제 있던 애."

박선생은 대답 대신 옅게 웃는다. 그 옅은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 나중에 다시 떠올려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생은 별생각 없이 계단을 한 칸 내려서며 덧붙인다.

"근데 솔직히, 선생님. 그런 거 우리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적당히만 하려고요.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고."

가벼운 말이다.

최선생의 목소리엔 냉소도, 비난도 그렇다고 한탄도 없다. 오히려 그건 요즘 젊은 교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일종의 자기 보호에 가까운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박선생의 명치 근처 어디쯤을 스치고 지나간다. 표정에 잠깐 그늘이 지는데, 최선생은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어서 그 그늘을 못 본다. 박선생은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 그 표정을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아주 잠깐 스쳤다는 것도 안다. 그는 그 마음을 곧바로 지운다.

그날 이후 며칠, 반창회 초대 문자는 휴대폰 잠금화면 위에서 계속 그를 기다린다. 갈지 말지 고민하는 게 아니다. 그는 이미 갈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데에 며칠이 걸릴 뿐이다.

8월 15일 저녁, 그는 옷장 앞에 선다. 셔츠 두어 벌을 번갈아 걸쳐보다가, 결국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을 하며 아무렇게나 한 번을 고른다. 셔츠가 하필 옅은 하늘색이라는 걸, 그는 인식하지 못한다.

2030년 8월 15일, 반창회 (도심 고깃집)

낮에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가서 거리는 아직 젖어 있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습기, 가게 앞 화분에 맺힌 물방울. 미닫이문을 열자 불판 연기와 에어컨 냉기가 동시에 얼굴을 덮친다. 안쪽에서부터 밀려나오는 소음들, 잔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의 과장된 웃음소리, 트로트가 낮게 깔린 스피커.

마흔 살 안팎의 얼굴들이 그를 반긴다. "샘,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인사치레가 여기저기서 겹쳐 들려온다. 그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옅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지만, 속으로는 그 인사치레의 정반대, 즉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그들이 모르는 그 25년의 부피의 크기에 대해 가늠해았다. 누군가 반 단체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돌려 보며 옛날 별명들을 하나씩 되짚는다. 그는 자리에 앉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사진이 자기 앞으로 넘어오길 반쯤은 기다리고 반쯤은 두려워한다.

반장이었던 놈-아마도 이름이 기석이였을-이 취기 오른 목소리로 말한다.

"야 근데 우리 반에 걔 있었잖아, 이름이… 지수였나? 걔 완전 연락 끊겼잖아요, 아무도 몰라."

그 이름이 시끄러운 가게 안에서 발음되는 순간, 박선생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는다. 젓가락을 든 손의 움직임이 반 박자 늦어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부잣집 사모님처럼 차려입은 여학생(이었던) 또 하나가 웃으며 끼어든다:

"아 걔, 선생님이 되게 챙기셨잖아. 기억나. 야자 끝나고도 맨날 남아서 상담했잖아, 걔만."

가벼운 웃음들이 오간다. 그러나 악의는 없다. 그저 옛날 얘기다. 그런데도 박선생은 그 말 속에서 "걔만"이라는 단어가 유독 크게 들린다. 그는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물은 어느새 미지근해졌다. 그 이름을 듣게 되었을 때의 마음도 그저 미지근하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샘 그때 걔한테 바카라도 주고 그러셨죠? 저희끼리 그랬어요, 샘 저러다 걔한테 정 붙어서 어쩌나 하고."

웃음이 터진다. 박선생도 따라 웃는다. 이런 순간엔 웃는 게 맞다는 걸, 그는 오랜 세월동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아 그 바카라, 기억이 난다. 왜 그 바카라을 지수에게만 주었을까? 바카라으로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 생각해보지만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특별한 존재, 그래 지수가 박선생에게 특별한 존재였다는 생각은 난다. 그랬으니 바카라을 주었겠지. '뿌리'로 시작하는 제목의 바카라이었는데...

그때 또 한 녀석이 끼어든다.

"근데 샘, 그 바카라 저도 받았는데. 저 대학 안 간다고 했을 때. 저만 받은 줄 알았더니, 나중에 보니까 딴 애들도 다 그 바카라 있더라고요, ㅋㅋ."

이 말이 지나가듯 던져지고 웃음 속에 묻힌다. 모인 이들에겐 그저 스쳐가는 문장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박선생의 얼굴에서 아주 짧은 순간, 표정이라 할 수도 없는 어떤 미세한 재조정이 일어난다. 마치 방금 딛고 있던 바닥의 높이가 1센티미터쯤 달라진 걸 느낀 사람처럼. 그는 웃어넘기며 술잔을 든다. 손끝이 미세하게 늦게 움직인다. 그는 그 지연을 스스로 느끼면서도, 그게 취기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굳이 따져보지 않기로 한다.

가게를 나설 무렵엔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박선생은 우산을 펴며, 자신이 오늘 저녁 내내 지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짓던 그 표정을 누가 봤을까, 하고 잠깐 생각한다.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결론 내리면서도, 그 결론이 안심인지 서운함인지 스스로도 분간이 안 된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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