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 8월 초. 늦은 오후 교무실
방학이라 절반쯤 불이 꺼진 교무실.
에어컨은 켜져 있지만 냉기가 구석까지 닿지 않아, 창가 자리는 여전히 후텁지근하다. 창밖 매미 소리가 유리를 뚫고 들어온다. 창틀 모서리, 방충망 프레임에 매미 허물 하나가 붙어 있다. 등 쪽이 세로로 갈라진 채, 다리 여섯 개가 여전히 방충망 가닥을 움켜쥔 자세 그대로 말라 있다. 안의 것은 이미 오래전에 빠져나갔다. 누구도 그걸 떼어내지 않았다.
복도 저편에서 방역 소독 스프레이 냄새가 희미하게 밀려온다. 여름방학마다 하는 정기 소독. 그 냄새는 달큰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화학약품 냄새로, 오래 맡으면 두통이 온다는 걸 그는 서른다섯 번의 여름을 통해 알고 있다. 강산이 세 번도 더 변했을 이 세월동안 약품 냄새는 변함 없이 한결같다 생각한다. 하긴.. 한결같은 게 꼭 소독약 냄새 뿐일까 하는 생각이 뒤이어 밀려온다.
박선생의 바카라상 위에는 다 마른 볼펜 여남은 자루가 꽂힌 머그컵 - 제자가 준 선물로 손잡이의 이는 나갔다 -, 코팅이 벗겨져 가장자리가 들뜬 명패, 잎은 반쯤 시들었고, 먼지가 앉은 화분 하나, 그리고 정년퇴직 관련 서류가 담긴, 아직 뜯지 않은 누런 봉투 하나가 놓였다. 그는 봉투를 한 번 손끝으로 건드려보다가, 결국 서랍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고는 캐비닛 정리를 시작한다. 종이 박스 두 개, 오래된 성적표 뭉치, 상장 사본들, 학년말마다 써온 담임 수첩 열 몇 권. 교무수첩이랬다가 담임수첩이랬다가 이름이 몇 번쯤 바뀐 이 기록물이야말로 한 해가 마무리되고 난 후에는 늘 애물단지다. 1년동안의 기록들이 고스란히 들어있으니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다가도, 원치 않는 크고 작은 사건들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점에서는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은 물건. 박선생도 몇 개는 버렸지만 버리지 못한 수첩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박선생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이는 - 실제로는 그럴리 없지만 - 낡은 캐비닛 맨 아래 칸을 열자 곰팡내 나는 종이 냄새가 훅 끼친다. 제일 먼저 손에 잡히는 건 다 낡은 교육청 공문 한 장이다. "199X학년도 보충수업 운영 계획(안)" — 지금은 보충수업이라는 말을 쓰지도 않는데, 그는 잠시 그 종이를 들여다본다. 그 시절엔 이런 공문 하나에도 밤늦게까지 계획서를 고쳐 썼는데, 지금은 그 제도의 이름조차 젊은 교사들에게는 낯설 것이다. 그는 이 공문을 버릴지 말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다른 폐지 서류 더미 위에 얹어놓는다. 그 밑에서, 1995년도 2학년 3반 학급 명렬표가 나온다.
교직 초기에는 아이들의 이름을 하루라도 먼저 외우고 싶은 마음에 명렬표를 늘 코팅했었다. 그냥 종이였다면 진작에 버려졌을 그 물건이 그래서 남아있는 것인가 생각한다. 코팅은 변색되어 반쯤 벗겨졌고, 그 모서리는 눅눅했다가 마른 자국. 각 이름 옆에 조그맣게 붙은 증명사진 — 스물다섯 해 전 인화지의 색감이 이미 누렇게 바래서, 얼굴들이 하나같이 실제보다 나이 들어 보인다. 그는 손끝으로 사진 하나하나를 짚어가다가, 지수의 사진 앞에서 멈춘다.
사진 속 얼굴이, 그가 기억하던 얼굴과 미묘하게 다르다. 더 앳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가 기억 속에서 이 얼굴을 조금씩 다르게 고쳐 그려왔다고 해야 할지 — 그는 잠시 그 차이를 가늠하다가, 이내 그 시도 자체를 그만둔다.
이름 옆 담임 메모 칸을 본다. 대부분 "성실", "교우관계 원만", "착함" 같은 단어들인데, 유독 이 이름 옆에만 별표 두 개가 있고, 그 옆에 연필로 뭔가 적혔다가 침으로 문질러 지운 흔적이 있다. 몇 글자였는지도 이제는 알아볼 수 없다.
보호자란에는 "부"가 두 줄로 그어져 지워지고 "모"만 남아 있다. 그때는 무심히 넘겼던 그 두 줄이, 지금은 이상하게 그의 눈에 걸린다. 지웠다는 것은, 누군가 이 서류를 만들 당시 이미 "부"를 지워야 할 사정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그 사정을 정말로 알고 있었던가, 아니면 알고 있다고 생각만 했던가.
명렬표 여백, 그의 필체가 아닌 다른 색 볼펜으로 작게 적힌 메모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 그때 상담부장이나 학년부장이 남겼을 글씨. "가정 내 종교 문제로 학부모 면담 요청 있었음 (5월)." 그는 이 메모를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예전에 한 번 보고 잊은 것 같기도 하다. 5월이라면 그가 기억하는 어떤 상담보다도 앞선 시점이다. 자신이 알아채기 전에, 이미 학교는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종이를 넘기다 손가락 끝을 살짝 벤다. 코팅이 벗겨진 모서리가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짧은 통증, 손끝에 실처럼 가느다란 핏줄이 맺힌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잠깐 멈춰 선다. 종이 냄새와 피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다. 그 잠깐의 통증이, 회상에 잠기려던 그를 다시 이 교무실, 이 여름, 이 순간으로 끌어당긴다.
그는 그 이름을 다시 한참 들여다본다. 지수.
그는 몇 해 전에도 이 명렬표를 꺼내 봤던 적이 있었음을 떠올린다. 그때도 그는 이 이름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문득 다른 상자에서 좀 더 최근 학년도(2008년, 2012년) 명렬표 몇 장이 딸려 나온다. 무심코 넘겨보던 그는 손을 멈춘다. 거기에도, 각 학년도마다 하나씩, 별표 두 개가 찍힌 이름들이 있다. 그는 애써 그 사실에서 눈을 돌린다.
그때 교무실 문이 빼꼼 열린다. 방역 담당 직원이 카트를 끌고 고개만 들이민다.
"선생님, 아직 계셨네요. 소독하고 가려는데."
"…아, 조금만 더요. 다 되면 말씀드릴게요."
직원은 알겠다는 듯 문을 도로 닫는다.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진다. 그는 그 짧은 방해가 지나가고 나서야, 자신이 이 정리를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휴대폰 진동. 모르는 번호. 그는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받지 않는다. 벨이 세 번 울리고 끊긴다. 그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려는데, 곧이어 또 한 번 진동이 온다. 이번엔 문자다. "[1995년도 2학년 3반 반창회 안내] 8월 15일! 선생님도 꼭 오세요 ^^"
그는 명렬표를 서랍에 다시 넣지 않고, 낡은 담임 수첩 사이에 끼워 가방에 넣는다. 왜 그러는지는 스스로도 이유는 알지 못한 채.
문득 '구원' 이라는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때 내가 저 애를 구원했다고, 그는 오랫동안 그렇게 정리해왔다. 문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조금 더 이어지려다, 그는 생각을 서둘러 접는다.
창밖 매미 소리가 한 번 뚝 끊겼다가, 다시 시작된다. 방충망에 붙은 허물은 그 소리와 상관없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빈 채로 매달려 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