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두 편(고향의 천정, 밥물 눈금)

by로벤

(가)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도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후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온 하늘 가득

별로 피어 있는 어릴 적 메밀꽃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꽃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 이성선, 「고향의 천정(天井) 1」 -




(나)

밥물 눈금을 찾지 못해 질거나 된 밥을 먹는 날들이 있더니

이제는 그도 좀 익숙해져서 손마디나 손등,

손가락 주름을 눈금으로 쓸 줄도 알게 되었다

촘촘한 손등 주름 따라 밥맛을 조금씩 달리해본다

손등 중앙까지 올라온 수위를 중지의 마디를 따라 오르내리다보면

물꼬를 트기도 하고 막기도 하면서

논에 물을 보러 가던 할아버지 생각도 나고,

저녁때가 되면 한 끼라도 아껴보자

친구 집에 마실을 가던 소년의 저녁도 떠오른다

한 그릇으로 두 그릇 세 그릇이 되어라 밥국을 끓이던 문현동

가난한 지붕들이 내 손가락 마디에는 있다

일찍 철이 들어서 슬픈 귓속으로

봉지쌀 탈탈 터는 소리라도 들려올 듯,

얼굴보다 먼저 늙은 손이긴 해도

전기밥솥에는 없는 눈금을 내 손은 가졌다

- 손택수, 「밥물 눈금」 -


모의고사 문학 문제를 풀 때에는 반드시 문제 중에 '<보기>를 참고하여~'로 시작되는 문제의 <보기>를 먼저 읽는 것이 좋다. 그러나 문제를 풀 때가 아니라 공부를 할 때라면 작품을 자신의 생각으로 감상하고 해석해본 다음, 그것이 <보기>에 나와있는 주제의식, 표현상의 특징, 작가의 특성, 시대적 배경 등과 잘 맞는지를 확인해보는 일은 무척 재미있다.


(가)의 화자는 '나'이다. 할머니는 시적 대상. 문제에서는 밭둑이라는 단어에 밑줄이 쳐져있었으므로 이 공간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면서 읽으면 좋다. 늦여름이라는 시어는 계절감이 드러나는 시어이고, 하늘빛과 같은 시어에서는 시각적 심상이 두드러짐을 확인할 수 있다. 3연에서는 아주 커서도 덜자랐다는 말을 통해 시간이 경과하여 지금의 화자는 할머니와 함께 있는 그 시점보다는 훨씬 뒷시간을 살고 있다. 5연의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에서는 과거를 떠올리다가 현재로 돌아오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과거를 떠올리게 되는 계기가 나오는 장면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화자는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워 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할머니 생각이 난 거다. 과거 회상의 매개체랄까. 계기랄까. 둘 다 맞다. 화자는 별을 보면서 할머니가 그 오랜 세월을 자신을 보살피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나 감사할까... 따뜻한 시다.


(나)의 화자는 손에 주름이 많다. 밥을 하다가 옛시절을 떠올리는데, 이때 밥을 짓는 행위는 보통 일상적 행위의 반복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앞의 작품의 화자가 떠올린 옛시절은 할머니 앞에서 맘껏 장난을 치고 있던 동심이 가득한 시간이었다면 (나)는 좀 다르다. '저녁때가 되면 한 끼라도 아껴보자'는 생각으로 친구집에 가던 소년은 화자의 어린 시절일 거다. 한 그릇으로 두, 세 그릇이 되어라 밥국을 끓이던 문현동에서의 기억은 '가난'이다. 가난하므로, 철없는 행동은 가난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가족의 생계를 바카라임져야 했으므로 그 시절 그 집에서 자란 화자는 빠르게 철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일찍 철드는 걸 바라는 사람이 있나 어디. 화자는 슬프다. 소리라는 시어에서는 청각적 심상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 힘든 시절에 대한 아픔과 슬픔으로 시가 끝나지 않는다. 얼굴보다 늙은 손이기는 하지만, 전기밥솥에는 없는 눈금을 가졌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조금 아프지만 끓기 전 밥물처럼 미지근하고 뿌연 시다.


그럼 이제 문제에 나오는 <보기>를 보자.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은 어떤 계기를 통해 되살아나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의 화자는 할머니와의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깨달음과 정서적 충만감을 얻고 있다. 한편 (나)의 화자는 일상적 행위의 반복 속에서 유년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 기억을 현재와 연결하며 자신의 현재 모습을 긍정하게 된다.


크으... 보람 있다. (가)의 화자는 돌아가시고 몇 년이 지나면서 잊고 지내던 할머니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을 것이며 그것으로 정서적 충만감을 느낀다. (나)의 화자는 밥물을 맞추면서 과거를 떠올리는데 그게 비록 슬픈 기억이기는 하지만 현재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긍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 이거 사실 수필 한 편 보다가 마음이 동해서 키보드 잡았는데,

이 시 두 편도 놓치기는 아쉽다.

수필도 써둬야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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