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상 위에 클립 하나가 구부러진 채 놓여 있다.
누가 무심코 폈다가 다시 대충 접어둔 거겠지. 그걸 한참 봤다. 그러다 문득, 이 쇳조각은 어디서 왔을까 싶었다. 철광석이었을 거고, 광산이었을 거고, 결국 땅속 어딘가를 파낸 거다. 그럼 그 땅속의 철은. 무한할 리가 없잖아.
(N 인간의 고질병이다. 클립 하나 보다가 지구 끝까지 간다. ㅋㅋ)
한번 생각을 밀어붙여 봤다. 철이든 석유든, 보석이든 희토류든. 이건 다 인간이 지금처럼 살기 전에는 단 한 번도 '소비된' 적이 없는 것들이다. 수억 년 동안 그냥 땅속에 얌전히 박혀 있던 걸, 우리가 삽 들고 와서 퍼내기 시작한 거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그리고 이 짓을 하는 건 우리뿐이다. 사자가 철광석을 캐지 않고, 고래가 석유를 시추하지 않는다. 지구상에 그 많은 생명체 중에 오직 인간만이, 땅을 뒤집어 물질을 꺼내 쓰고, 다 쓰면 버린다.
이쯤 되면 결론은 뻔해 보인다. 지구 입장에서 인간은 해악이다. 46억 년을 잘 굴러오던 행성에 붙은, 자원이나 게걸스럽게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좀 우울해졌다. 나도 인간인데.. 근데 이거 사실 관계를 좀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ㅋㅋ 그래서 좀 알아봤다.
하나. "오직 인간만이 소비한다"는 문장부터가 틀렸다.
약 24억 년 전, 남세균(시아노박테리아)이라는 미생물이 광합성으로 산소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때까지 지구 생명 대부분에게 산소는 맹독이었다는 거다. 이 미생물들이 무심코 대기 조성을 통째로 갈아엎었고, 그 결과 지구 역사상 최대급으로 꼽히는 대멸종이 일어났다. 이걸 '산소 대폭발 사건'이라고 부른다. 누가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방식대로 주변을 바꿨을 뿐이다.
그러니까 지구를 게걸스럽게 뜯어고치는 건 인간의 특기가 아니다. 그건 생명의 기본 동작이다. 우리는 그저 최신 버전일 뿐이고. (이게 위로가 되는지 더 무서운지는 잘 모르겠다.)
둘. "곧 고갈된다"는 것도, 숫자를 보면 좀 이상해진다.
전 세계 철광석 매장량은 대략 1,900억 톤(조광석 기준), 그 안에 든 순철분이 약 850억 톤이다. 연간 채굴량은 2025년 기준 26억 톤 정도. 단순히 나누면 70년 남짓 남은 셈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내 우울이 맞다.
그런데 매장량 옆에는 '자원량'이라는 게 따로 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 기준 8,000억 톤 이상(조광석), 순철분으로는 2,300억 톤 이상.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매장량'은 지구에 묻힌 총량이 아니라, "지금 기술로, 지금 가격에 캐서 남는 장사가 되는 양"만 센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웃긴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열심히 파내는데도 매장량 수치는 줄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이 좋아지고 값이 오르면 늘어난다. 예전엔 못 캤던 저품위 광석이, 어제까지 '자원'이던 것이 오늘 '매장량'으로 넘어온다. 내가 걱정하며 들여다보던 그 통은, 내가 퍼내는 행위 때문에 오히려 커지고 있었던 거다.
셋. 그리고 "지구의 해악"이라는 결론. 이게 제일 흔들린다.
지구는, 사실 아무렇지도 않다. 약 50억 년 뒤면 태양이 부풀어 올라 지구를 통째로 삼키거나 태워버릴 거다. 그 스케일에서 보면 인간의 채굴이든 소행성 충돌이든 다 지나가는 잔물결이다. 우리가 망가뜨리는 건 '지구'가 아니라, 인간이 살 수 있는 '지금 이 조건'이다.
게다가 철은 사라지지도 않는다. 클립이 녹슬어 흙으로 돌아가도 철 원자는 그대로 지구 어딘가에 남는다. 태워 없어지는 석유와 달리, 금속은 위치와 형태만 바뀔 뿐 총량은 그대로다. 우주적으로 보면, 소비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유한한 건 자원이 아니었다. 유한한 건, 이 물건들을 '자원'이라고 부르며 걱정할 수 있는 이 짧은 창(窓). 그러니까 우리 쪽이다.
"지구를 위해서"라는 말에는 은근한 자기과대가 섞여 있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46억 년짜리 행성을 죽인단 말인가. 죽는 건 우리인데.
여기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클립은 여전히 구부러진 채로, 그 자리에 있다.
흐음... 이걸 다시 펴야 하나, 그냥 둬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