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깨달음

by로벤

결혼을 하고 나서 우리 가족은 여기저기 해외여행을 다녔지만 패키지 여행을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행 계획 짜기 전문가인 아내 덕분에 초반에 아내를 뺀 우리 셋은 양질의 가이드 한 명을 가족으로 둔 상태로 여행을 다녔고, 어느 때부터인가는 나도 아내로부터 인정받은(?) 가이드가 되어 자유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해왔다.


아내는 대학교 동창 셋과 함께 이번 여행을 다녀왔다.

튀르키예는 여러 도시를 자유여행으로 다니는 게 사실상 어려운 곳이라 패키지 여행을 다녀왔는데,

모름지기 패키지 여행이란 첫째는 가이드요, 둘째는 동행하는 일행이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한 문제다.

다행히도 가이드는 평판이 아주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경상도식 표현으로 깔롱쟁이..였으나 옵션에 적극적으로 임해준 고객님들 덕분에 신이 났다는 후문이..

함께 한 사람들도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었으나,

자매로 보이는 한 팀의, 특히 동생이 아내의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에 적극적으로 리액션하는 것도 마음에 안들고,

멋진 경치를 보면서 감탄사를 연신 내뱉는 것도 마음에 안들고,

작은 이벤트에도 까르르르 자지러지는 모습도 마음에 안들어하다가

나중에는 아내 일행이 들으라는 식으로 무례하게 행동했다고까지 했다.


아내의 캐리어를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나는 연신

"와~ 그런 나쁜 XXXXXXXXXXX 들을 봤나!" 하고 반응을 했는데,

모름지기 결혼한 남자들이 반드시 지키는 것이 좋은 아주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공감능력'이기 때문이지. ㅋㅋㅋ


그런데 가만히 듣다보니 아내가 자꾸 과거형을 쓰는 것이, 나는 속으로

'아... 이 스토리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인가보네. 마지막에 사과를 하거나 했나보구나'

생각했지만,

아내는 그 문제로 스트레스가 상당히 쌓였을 무렵에 함께 여행을 간 다른 친구의 한 마디에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00이 있잖아~ 걔가 그러더라구. 그 사람들? 아~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라고 하더라고. 나 완전 큰 깨달음을 얻었잖아~~"

아내는 이어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 사람 입장에서는 우리의 리액션과 말과 행동이 마음에 안들었을 수도 있는 거잖아.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게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 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마찬가지라는 거지. 나도 누군가의 어떤 언행이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말야. 와~~ 나 큰 거 배웠어" 라고 한다.


아... 이때 그냥 "와!!! 그랬구나~ 좋은 거 배웠네!" 라고 말하고 말았어야 할 것을 나는,

"음... 좋아 깨달음을 얻었다니 정말 좋네. 그런데 말야. 만약 당신이 나에게 그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그 친구처럼 당신에게 말했다면 어땠을 것 같아? 내가 한동안 그렇게 말해왔잖아? 당신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 같아? 아니면... 그게 무슨 말이냐고, 공감 먼저 해주는 게 맞지 않냐고 할 것 같아?" 라고 말하고야 말았다. ㅋㅋㅋㅋㅋㅋ


아내는 미간을 잠시 찡그리긴 했으나 이내 너그럽게(?) 마음을 풀어주었다.

여행 내내 불편해했다던 그 사람은 사실,

한국에서 매우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타인의 행복함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일 테지....

라는 생각은 너무 오바하는 거고 ㅋㅋㅋㅋ


뭐 실제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거고,

그냥 조용하고 고요하게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소녀들처럼 깔깔거리는 네 사람이 일행에 들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애초에 불편했을 수도 있는 거겠다. 그럼 그 사람의 반응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


사실은,

아내에게 한동안 저렇게 이야기를 했던 나 역시도 타인의 말고 행동이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걸 참지 못했었다. 음... 진짜로 참지 못했다면 그에게 따졌어야할텐데 그러지는 않았으니 그냥 속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해야겠다.


암튼,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으면서 다행스럽게도 타인에게 들이대는 채는 조금씩 넓고 성긴 것을 사용하고 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누구에게나 완전하고, 교양있으며, 아주 미량의 피해도 입히지 않는 절대적인 인간인가? 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절대 아니라는 답만 돌아온다.


그럴 수 있다. 늘...

나도, 그리고 누군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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