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밥을 먹으며

by로벤


아내가 튀르키예로 일주일 동안의 휴가를 떠났다.

오롯이 나 혼자서 두 딸아이들을 돌보며 지낸지도 일주일이 지났고 아내는 모레 귀국하게 된다.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거창할 것은 없고,

아침 거르지 않게 챙겨주고, 학원 가기 전에 저녁 식사를 차려 주고, 빨래를 두 번 정도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집청소를 하고, 분리수거를 하는 정도다.

신기하게도 아내와 함께 있을 때보다 집상태가 더 깔끔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것은,

얼마전 김신영이 말했던 그 '나 아니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제일 컸던 듯 하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설거지를 하는 것은 누구도 대신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고,

빨래도, 청소도 마찬가지다.

뭔가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닌 상태라 힘들다고 느끼지도 않는데 생각보다 내가 조금은 더 부지런한 사람인가? 생각해보았다.


어제 큰 아이가 학원을 가고 작은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온 저녁 7시 무렵에 근처 상가에 잡채밥을 먹으러 갔다.

학원이 끝나고 저녁을 뭐 먹고 싶냐는 내 말에 작은 아이는... 잡채밥을 먹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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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대체로 집에서 차려 먹으니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던 듯 한데 가자고 하니 저렇게 좋아한다.

작은 아이는 잡채밥을 참.. 좋아한다. ㅎㅎ


모자이크 처리된 저 식당의 잡채밥은 참 맛있다. 짬뽕맛이 예전과 너~무 달라져서 거의 안 가게 되긴 했지만

아이들이 잡채밥 먹고 싶다 할 때는 저집이 최고다.

생각해보니 나 어릴 적에는 중국집 가면 짜장면 아니면 짬뽕이었고, 볶음밥도 비싸서 잘 못먹었던 것 같은데,

아이들은 기본 메뉴 짜장면, 짬뽕 말고도 매우 다양한 메뉴들을 주문하곤 한다.

암튼, 예전에 아이들과 함께 저 식당 갔을 때 우리 부부는 면요리를 먹는동안 아이들은 잡채밥을 먹었는데 한 입 먹어보니 참 맛있었다. 그렇다고 애들 메뉴를 내가 더 많이 먹을 수도 없고... ㅋㅋ


암튼 작은 딸과 둘이서 하는 데이트에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도 가져다주기 전에 '잡채밥 두 개요!'를 외쳤다.

잠시 후 자리로 가져다준 잡채밥...중 내 밥에서 '목이 버섯'을 자기에게 조금 더 주면 안되냐고 말하는 작은 아이 그릇에 목이버섯을 듬뿍 옮겨준다.


부추, 양파, 죽순, 목이버섯, 피망.. 등이 다양하게 들어간 잡채밥이지만 작은 아이는 주로 '당면'을 공략하는데 ㅋㅋ 누구 닮았겠나? 나도 어릴 적에 편식이 참 심했다. 그나마도 우리 아이들을 나 어릴 적보다는 훨씬 편식이 덜해서 어지간한 음식을 가리지 않아 다행이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던 중에 작은 아이가 '아빠 근데 할아버지는 직업이 뭐였어요?'하고 묻는다.

'시장에서 만두 가게 하셨지~'라고 대답하고는 잠시 그 시절 만두 가게를 떠올려본다.


그 때 우리 네 식구는 가게에 딸린 단칸방에 살았었다.

300~400m 거리에 있는 할아버지가 계실 방 한 칸을 근처에 구하게 되고 우리 형제가 그곳을 잠잘 때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렇게 살았다. 그때까지 우리 식구는 한 번도 '아파트'라는 곳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서남시장 근처에는 지금도 '대운아파트'가 있다.

두 동밖에 없는 이 아파트가 우리 식구가 처음으로 살았던 아파트였다.

A 동 101호에 살았는데 메이커 있는 아파트도 아니고, 자재를 좋은 것을 쓴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작디 작은 작은방을 넓히느라 방풍, 방한도 안되는 샤시가 달린 베란다와 무리하게 확장공사를 해둔 아파트에 들어가 살다보니 겨울이 되면 나와 동생이 함께 지내던 방에서는 입김이 나오곤 했다. 너무 추워서 울었던 적도 있었고..

그래도 처음 이런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은 나쁘지 않은 기억이기는 했었다.


새벽부터 새벽까지 부지런히 일하시던 부모님은 차곡차곡 돈을 모으셨다.

당시 은행의 적금 이자가 20~30%에 육박했다 하니 돈을 모으는대로 저축했던 부모님은 비록 작디작은 가게이기는 했지만 복리의 효과를 누리시면서... 대운아파트에서 약 1km 남짓 떨어진 청실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청실아파트는.. 그래도 대구에서는 이름 있는 건설사인 보성주택의 아파트였고, 동은 세 동이나 있었던 데다가 전에 살던 대운아파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래도 아파트다운 아파트였다.


1동 > 2동 > 3동 순으로 면적이 좁아지고 가격이 쌌는데,

1동을 사기에는 당시 너무도 큰 금액이었기 때문에 2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지금도 계약을 했던 그날 밤 아부지, 어머니, 나, 동생 이렇게 넷이서 이사를 나가고 비어있는 그 집에 갔던 날이 생생하다.


일단 방 세 개가 운동장만큼 넓게만 보였고, 나와 동생이 쓰게 된 방도 바카라상 두개를 놓고 더블 침대 하나를 놓아도 될 정도로(물론 그렇게 놓고 나면 남은 면적은 없었다.) 만족스러운 넓이였다. - 사실 이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바카라상과 침대라는 것도 처음으로 사게 되었다. 할아버지께서 방 하나를 쓰시고, 안방 하나, 그리고 우리 형제방 하나 그렇게 방3 화장실1의 번듯한 아파트였다. 그래도 그 시절에 '청실아파트 산다'고 하면 부끄럽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도배만 하고 들어가기로 했던 이 아파트에 이사를 들어가기 전에 우리 네 식구는 참 자주도 갔었다. 매일밤 장사가 끝난 늦은 시각에 우리 네 식구는 청소할 도구들을 챙겨서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남아있던 도배지를 떼기도 하고, 바닥을 정성스럽게도 쓸었었다.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2동에서 10여년 정도를 살고 나서 저축한 돈을 보태서 우리는 무려 '1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운동장처럼 넓었던 거실을 기억한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아도 되는 건가.. 우리 이제 부자된 거 아닌가.. 했던 이집은 지금 찾아보지 25평짜리였다.


21평의 집에서 우리 네 식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25평의 집에서는 너무 으리으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곳에서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 합격증도 받아들고, 임용고사 합격 소식도 식구들과 함께 들었었다.


'할아버지 직업이 뭐였어요?'라는 작은 아이의 물음에 답을 하다보니,

간만에 떠올려보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지금이 참 좋다.. 그리고,

그때도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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