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보다 페이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보고

by푸른 꽃

에어컨 바람이 닿는 창가에 앉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본다. 한낮의 햇살은 뜨겁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바삐 걸어간다. 해야 할 일은 그대로인데,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나만 멈춰 있는 기분이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월터가 떠오른다. 그는 상상 속에서는 어디든 달려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한 걸음 내딛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 모습이 지금의 나와 겹쳐 보인다.

영화는 평범한 온라인 게임인 월터가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필름은 ≪라이프≫ 마지막 호의 표지 사진이다. 상상 속에서만 용감했던 그는 낯선 곳을 오가며 조금씩 달라진다.


그토록 헤맨 끝에 찾아낸 마지막 표지에는 장엄한 설산도, 거친 바다도, 희귀한 눈표범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진 속에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월터가 있었다.


왜 하필 월터였을까.


사진작가 숀은 누구보다 많은 절경을 만난 사람이었다. 누구나 감탄할 풍경을 표지로 내세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가장 평범한 사람을 표지로 선택했다.


우리는 표지가 될 만한 삶을 바라며 살아간다. 특별한 한 장을 꿈꾸면서.


그래서 눈에 띄지 않는 오늘은 쉽게 지나쳐 버린다. 반복되는 날들은 기록할 가치조차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삶은 표지를 먼저 만들고 페이지를 채워 가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페이지가 표지를 만든다.

별일 없었다고 넘겨 버린 날들, 반복이라 여겼던 시간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페이지들이 마지막 한 장이 된다.


숀이 바라본 것은 월터의 모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6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성실함, 누구도 특별히 여기지 않았던 날들이 결국 월터라는 사람을 만들었다. 표지에는 한 장의 사진만 담겼지만, 그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페이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히말라야에서 숀은 눈표범을 마주하고도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카메라로 방해받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지.”

그 장면을 보고 나니 마지막 표지가 월터였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매미가 울고 있다. 사람들은 바쁘게 걸어가고 있고, 해야 할 일도 그대로다. 달라진 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는 것.


눈에 띄지 않는 오늘도 언젠가는 한 페이지가 된다.


언젠가 내 삶이 한 권의 연간 잡지로 묶인다면 마지막 표지에는 어떤 사진이 실리게 될까.


아직은 표지를 기다리기보다, 페이지를 채워 갈 시간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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