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 <피에타>,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부터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요즘 학교에서 운동회란 설렘보다 걱정이 먼저 앞서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교직원들 사이에서도 올해까지만 하자는 말이 조심스럽게 오갔다.
아이들이 뛰다 넘어질까 봐,
다친 부모가 문제를 제기할까 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요즘 같이 전적으로 학교에 바카라임을 전가하는 슬롯적 분위기 속에서
교직원들이 이런 행사에 긴장하지 않는다면 이상할 일이 아니겠는가.
오월의 운동장은 뜨거웠다.
뛰다가 넘어지는 아이, 게임 중에 미끄러져 피부가 쓸려 울먹이는 아이.
담임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하며 아이 손을 잡고 본부석으로 달려온다.
그럴 때마다 본능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 학교에서 아이의 상처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다.
사고보고, 보호자 연락, 기록은 물론 수차례의 설명과 이해, 안전공제회 신청 등
운이 나쁘면 학부모의 소송에도 휘말리기도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학교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줄여왔다.
놀이를 없애고, 경쟁을 줄이고, 몸으로 부딪히는 활동들을 조심스럽게 지워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정작 아이들의 부모들은 웃고 있었다.
아이들의 쓸린 상처와 붙여놓은 밴드를 쓰윽 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 괜찮아요, 집에 가서 소독해 주면 돼요.”
" 많이 안 다쳤네. 경기할 수 있지?"
" 약 발랐으니 낫겠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슬롯가 아이들의 위험을
단 한 톨도 허락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가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넘어질 기회까지 거두어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걱정과 달리 그날 운동장에는 오랜만에 살아있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줄다리기 줄을 잡은 아이들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이어달리기를 하는 아이와 부모들의 표정은 햇빛만큼 환했다.
누군가는 넘어졌고, 누군가는 뒤쳐졌지만
아이들은 다시 일어나 뛰었다.
부모들은 목이 쉬도록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격려하고 응원했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일을, 삶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독일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 근처에는 노이에 바헤(Neue wache) 추모관이 있다.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를 기리는 독일의 중앙 추모관이다.
나는 그곳에 전시된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케테콜비츠의 조각상 피에타를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에는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녀는 단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시대를 평생 견디며 기록한 예술가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전쟁으로 아들 페테를 잃었다.
그 상실은 그녀의 삶 전체를 바꾸어놓았다.
베를린 노이에 바헤의 피에타는 바로 그 슬픔의 끝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천장이 뚫린 추모관 안으로 비와 눈이 그대로 내려앉는 자리,
그 한가운데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품에 안고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었다.
전쟁과 폭력, 가난과 억압 속에서 한 인간의 삶 자체가 부서지는 것을 온몸으로 막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유달리 아이들을 끌어안은 어머니들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콜비츠의 수많은 판화 중에 인상적인 제목의 작품이 있다.
한 여인이 자신의 외투 속에 소년들을 감싸고 있는 모습의 석판화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Saatfrüchte sollen nicht vermahlen werden)
그녀는 아이들을 씨앗이라고 부른다.
씨앗은 연약하다.
그래서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씨앗은 끝내 흙을 뚫고 나와야 한다.
비를 맞고 바람을 견디며 자기 힘으로 뿌리를 내려야 한다.
너무 완벽하게 덮인 씨앗은 자라지 못한다.
나는 요즘 우리 슬롯의 양육을 보며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정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제대로 교육하고 양육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주려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넘어질까 봐 막고,
실수할까 봐 대신 결정해 주고,
갈등 속에 놓일까 봐 먼저 개입해 준다.
그러나 아이는 결국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언젠가는 혼자 선택해야 하고,
혼자 견뎌야 하며,
자기 힘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넘어져 보지 못한 아이가
과연 삶의 거친 바닥 앞에서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날 운동회에서 나는 조금 다른 희망을 보았다.
아이들이 넘어지는 것을 무조건 두려워하지 않는 부모들,
작은 상처보다 아이의 환한 얼굴을 먼저 바라보는 부모들,
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달리는 아이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부모들.
교사에게 모든 바카라임을 돌리기보다 아이의 오늘 하루를 함께 바라보려는 시선.
그것은 무바카라임한 방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를 하나의 독립된 삶으로 이끌어주는 건강한 사랑에 가까웠다.
생각해 보면 진짜 모성애란 아이를 영원히 품 안에 가두는 일이 아니다.
언젠가 자기 삶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힘을 길러주는 일이다.
어쩌면 교육은 아이를 한 번도 넘어지지 않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보태주는
어른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