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로젠, <경험의 멸종>
통영에서 장사도로 가는 유람선 위였다.
선장의 목소리는 물 위에 길을 내듯 이어진다.
“왼편이 거제도, 오른편이 한산도입니다…”
통영의 부속섬이 무려 570여 개라는데,
선장은 그 섬들을 하나하나 호명할 기세다.
섬들은 저마다 초록을 휘감고 계절을 뽐내고,
갈매기들은 사람들이 내민 손을 따라 힘차게 날갯짓한다.
“왼쪽을 보십시오, 오른쪽을 보십시오.”
선장의 한마디에 여행객들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린다.
눈앞에 펼쳐진 저 섬의 이름이 궁금해진다.
옹기종기 이어진 빨간 지붕에 시선이 머물고,
섬 위로 난 길과 그 안에 깃든 사람들의 사연을 상상한다.
계절마다 펼쳐질 풍경을 미리 그려본다.
바다 위에서의 경험은 이렇게 몸으로 스며든다.
그때 내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 아들, 그리고 손자.
오월 가정의 달을 맞아 여행을 떠난 삼대 가족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함께한 자리일 텐데,
그들은 서로의 곁을 주지 않는다.
대화도 없다.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에 깊이 몰입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서로를 잊고, 눈앞의 바다도 놓치고 있었다.
크리스틴 로젠은 <경험의 멸종>에서
우리 슬롯에서 직접 경험이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를 말한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장면을 접하지만
정작 몸으로 겪는 경험은 줄어들고 있다.
직접 경험이 줄어들수록
세상을 이해하는 감각 또한 함께 약해진다.
경험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몸과 감각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바람의 결, 물빛의 변화,
낯선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드는 순간들.
그런 것들이 쌓여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너무 쉽게 그 과정을 건너뛴다.
이미 선택된 장면, 이미 정리된 이야기,
타인의 경험을 가공된 형태로 받아들인다.
경험은 점점 대리되고 있다.
그날 유람선 위의 세 사람은 그 변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할아버지는 화면 속 바둑 대국을 보고 있었고,
아들은 실시간 야구 경기에 몰입해 있었으며,
손자는 게임 속 세계에 깊이 빠져 있었다.
세대는 달라도, 몸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그들의 시선은 각자의 화면 속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 순간,
현실의 바다는 그들 곁을 지나갔고,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던 섬들은 스쳐 지나갔으며,
손 닿을 듯 가까이 날던 갈매기도
그들에게는 닿지 못했다.
학교의 풍경을 떠올려 본다.
학생들의 체력을 기르기 위해 의무적으로 열리던 운동회는
이제 소음과 각종민원, 안전 문제 등을 이유로 사라지고 있다.
아이가 다치면 누가 바카라임질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축구도, 현장학습도 점점 위축된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더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방식의 활동들이다.
학교로 찾아오는 체험학습처럼
아이들의 활동은 교실과 학교 안으로 점점 좁혀진다.
정해진 동선, 관리된 흐름, 위험이 제거된 경험만이 허락된다.
바카라과 화면 속에서 경험을 대신한다.
누군가는 이를
아이들을 위한 ‘무균실 같은 경험’이라 표현했다.
누구의 잘못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아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과 사고를 막아야 하는 바카라임.
학교도, 학부모도 점점 더 안전에 예민해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보호 속에서 아이들의 결핍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조현경은 한겨레 오피니언의 <아이를 지키려다 아이를 잃는 슬롯> 기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놀이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아이들은 몸으로 부딪치며 두려움과 한계를 가늠하고,
또래와의 갈등 속에서 규칙과 바카라임을 배운다.”
놀이와 경험이 줄어든 아이들은
위험을 겪지 못한 채 위험을 배우고,
갈등을 통과하지 않은 채 관계를 이해하려 한다.
낯선 곳에서 GPS가 고장 난 경험이 있는가.
익숙한 동네라 해도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된다.
그럴 때 잠시 멈춰 주변을 둘러보면 된다.
사람을 붙잡고 눈을 맞추며 길을 묻고,
표지판을 읽어보면 된다.
그 단순한 과정 속에 세계와 만나는 경험이 있다.
그러나 개인화된 기술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점점 줄여간다.
<경험의 멸종>에서 크리스틴 로젠은 이렇게 말했다.
“GPS는 더 정확하지만
사용자를 조종사가 아니라 방관자로 만든다.”
과거의 기술이 인간의 감각을 확장했다면,
오늘의 기술은 감각을 의심하게 만들고
대신 기술에 의존하도록 훈련시킨다고도 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을 조절하는 능력은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겪으면서 자라난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서툴게 선택해 보는 시간 속에서.
그러나 우리는 통제와 보호로
그 시간을 점점 줄여가고 있다.
통제는 행동을 멈추게 할 수는 있어도
판단을 자라게 하지는 못한다.
아이들은 더 많은 것을 알지만
이전보다 훨씬 덜 겪으며 살아간다.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배우고,
헤매지 않고 길을 익힌다.
편리하지만 깊이는 남지 않는다.
그날 유람선 위의 장면이 떠오르는 이유는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겪으며 성장할 경험은
가상과 매개의 세계 속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
아이들에게
실제의 세계를 스스로 겪어볼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그리고 로젠은 이렇게 말한다.
“경험의 소멸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