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 양반은 내게 또 어떤 행운을 안겨줄까?

김민식,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 데이먼드 셔젤, 위플래쉬

by뭉클

민원이다.

말은 말을 붙잡고 말하는 쪽도 듣는 쪽도 고집을 부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거세어지는 습관적 민원러의 난타 같은 말을 듣는다.

고개를 끄덕인다.

네, 네, 그러네요. 아, 예, 그렇군요……

감정의 물결은 파도처럼 일렁인다.

나는 쓰나미에 휩쓸리지 않으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다.

‘그래서 이 양반은 내게 또 어떤 행운을 안겨주려고 이러나.’

얼마 전 읽은 바카라의 한 대목을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다.

고분고분 참고 순응하지 않은 덕에 즐거운 인생이 시작됐다.
이제는 살다가 나를 괴롭히는 인간을 만나면 생각한다.
그래서 이 양반은 내게 또 어떤 행운을 안겨줄까?
— 김민식,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중에서

김민식의 글에서 나는 사람을 바꾸려 하기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방식을 배운다.

불편한 관계를 피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고, 나를 넓히는 계기로 바꾸는 시선.


학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요구로 온다.

민원이라 한다.

민원이라고 해서 모두 쓸모없고 불편한 것은 아니다.
더 나은 방향을 묻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게 하는 민원이라면

그것은 공동체를 살리는 목소리다.

민원은 본래 공동체를 향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것을 드러내고 더 나은 방향을 요구하는 참여의 언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질문이 아니라 결론을 들고 와 밀어붙이는 순간, 민원은 대화가 아니라 압력이 된다.

선한 영향력의 민원은 공동체를 넓히지만, 악성 민원은 타인의 선택지를 지워 공동체를 좁힌다.


여기, 한 학부모가 있다.

그는 늘 확신에 차서 온다.
절차를 설명해도 멈추지 않고, 타협과 대안을 제시해도 물러서지 않는다.

말투는 단호하고, 어조는 강압적이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학부모 다모임에서 그의 공기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와 그를 따르는 일부 학부모의 단합된 언사는 공간을 압도한다.

점차 교직원도 다른 학부모도 그 기세에 눌린다.
누군가는 말을 꺼내다 멈추고, 누군가는 눈치를 보며 침묵한다.

“우리끼리 논의할 것이 있으니 교장과 직원은 자리를 비워달라.”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묻게 되었다.

학교라는 공유의 공간에서 그들끼리만의 논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다시 묻게 된다.

학부모는 어디까지 학교로 들어올 수 있는가.
그들의 참여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고,
그들의 개입은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가.

이 질문의 시작에서 영화 <위플래쉬> 를 떠올린다.

2014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라라랜드> 로 알려진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작품이다.

겉으로는 음악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성장과 지배, 열망과 파괴 사이의 경계가 담겨 있다.

명문 재즈 음악학교에 다니는 드러머 네이먼은 최고의 연주자를 꿈꾼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 플레처는 그를 밴드에 들이지만, 그 순간부터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범주를 벗어난다.

플레처의 방식은 가혹하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네이먼을 몰아붙인다.

위대한 예술은 극한의 압박 속에서 나온다며, 모든 것이 너를 위한 것이라는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

그는 완벽을 요구하고, 그 요구는 점차 강압으로 변한다.

네이먼은 손에서 피가 나도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관계는 하나씩 끊어지고, 오직 연주만을 향해 내몰린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불편했다.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양 플레처는 네이먼의 삶을 자기 기준 안으로 밀어 넣으며 이렇게 소리친다.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은 ‘잘했어’다!”

이 말은 단순한 격려의 거부가 아니다.
자신의 평가 외에는 아무 가치도 없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 순간부터 네이먼은 선택지를 잃는다.

성장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파괴로 기울어가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또다른 질문이 생긴다.

완벽을 이유로, 혹은 성장을 명분으로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방식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플레처의 교육은 결과만 보면 성취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과정은 분명 강압과 폭력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교육일까, 아니면 지배일까.

플레처는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지배했고,
내가 만난 그 학부모는 참여라는 이름으로 공동체의 균형에 개입한다.

서로 다른 얼굴이지만 타인의 가능성을 좁힌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학교의 판단에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절차를 넘어서는 요구를 이어가며
그 영향은 다른 학부모에게까지 번져간다.

한 사람의 의견은 점점 기준처럼 작동하고,
다른 목소리는 조용해진다.

이것은 참여를 넘어선다.
공동체의 균형을 흔드는 방식에 가깝다.

그의 개입은 이미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나아가 내정 간섭과 닮아 있다.

문제는 의도가 아니다.

그가 습관처럼 말하는 “우리 아이와 우리 학부모를 대신하여”라는 문장이
더 나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지라도 그 방식이 타인의 선택을 줄이고 의견을 왜곡한다면

그것은 교육적 참여의 범주를 넘어선다.

나는 그 사이에서 알베르 까뮈의 한마디를 떠올린다.

원칙은 큰 일에 세우고,
작은 일에는 연민으로 다가가라.

원칙은 공동체를 지키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누가 말하든 같은 절차가 적용되고,
어떤 요구도 그 틀을 넘어설 수 없어야 한다.

그래야 학교는 개인의 힘이 아니라, 공동의 기준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원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칙은 선을 긋지만 관계까지 바카라임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연민이 필요하다.

그 요구의 방식이 아니라 그 요구가 발생한 맥락을 바라보는 시선.
왜 그렇게까지 말하게 되었을까,
어떤 불안이 그 행동을 지속시키는가를 묻는 태도 같은 거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 삶의 결과도 언제나 단순하지 않다.

학교 역시 그렇다.

부당한 요구를 단순히 해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과정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태도다.

원칙으로 경계를 세우고, 연민으로 관계를 남기는 것.

그래야 학교는 누군가의 공간이 아니라 모두의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그를 밀어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의 방식이 공동체의 기준이 되지 않도록 경계를 세울 것이다.

자유롭게 말할 수는 있지만 지배할 수는 없는 자리,
참여할 수는 있지만 방향을 독점할 수는 없는 자리가 되게 하겠다.

원칙은 선을 긋고, 연민은 사람을 남긴다.
나는 그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지키려 한다.

민원에서 이기는 법이 아니라

민원의 과정 속에서도 사람을 놓치지 않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민원인이 들어온다.

나는 오늘도 김민식의 문장을 떠올리며 심호흡을 한다.

그래서 이 양반은 내게 또 어떤 행운을 안겨줄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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