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살아보는 일

삶을 짓는 문장 86.

by모카레몬


공간은 삶의 방식을 닮아간다

Spaces begin to resemble
the way a life is lived.





머물고 있는 곳은 바르셀로나 근교의 작은 도시 라가리가(LaGarriga)이다.

오래전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온천수로도 유명해서 19세기말, 20세기 초에는 바르셀로나 근교에 사는 귀족과 예술가들이 쉬러 오던 대표적 휴양지였다. 마을 곳곳에 가우디 시대와 같은 흐름의 카탈루냐 모더니즘 양식의 별장과 고택들이 남아 있어서 볼거리가 많다. 온천과 정원, 모래길과 긴 산바카라길, 전통과 현대가 함께 숨 쉬는 매우 조용하고 아늑한 지역이다.


라가리가(LaGarriga)는 마누엘 호아킴 라스팔(Manuel Joaquim Raspall)의 흔적이 많은데, 그는 가우디와 같은 카탈루냐 모더니즘 계열 2세대 건축가로 분류된다. 그가 사랑했던 자연의 감각과 삶의 방식이 건축물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오랜 자리를 지킨 나무들은 고개를 꺾어서 우러러보아야 할 정도로 키가 높다. 오래 살아있는 것들은 함부로 자라지 않는다는 걸 그 나무들을 보며 배운다. 느리게 뻗어 올라간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가 있다. 초록빛 공간을 가득 채운 하늘과 햇빛이 길로 쏟아지며 만든 그늘의 무늬가 무척 아름답다. 어느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 길. 이곳에서는 시간이 앞으로만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오래된 돌벽과 나무와 정원 사이를 수없이 지났을 계절들을 그려보게 된다.





이 지역은 주민자치단체의 운영이 매우 활발하다. 각 가정의 삼사세대가 함께 마을 잔치나 행사에 모두 참여하며, 다른 마을과 오가며 친교를 나눈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축물은 특정한 행사나 기념일에 오픈을 하며, 일정의 행운이 있는 여행객은 이방인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특히 라스팔 구역의 엘 파세이그(El Passeig) 모래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펼쳐져 있다. 한적한 동네여서 외부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반려견과 산바카라을 하거나 벤치에서 바카라을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카탈루냐 광장과 더불어 바르셀로나의 모든 길들이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라가리가는 안쪽으로 연결된 속길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오래된 벽과 나무들, 또는 새롭게 지은 건물들과 천천히 걷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호흡이 느려진다.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며 한 발, 한 발 내딛게 된다. 하염없이 머물러도 싫증 나지 않는 곳이다.








토요일마다 성당 앞 광장에 장이 선다. 천막이 펼쳐지고, 이른 아침 공기가 걷히기 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모여든다. 갓 채취한 채소와 과일들, 갓 구운 빵과 따끈한 치즈, 각종 올리브는 구미를 당긴다. Mina작가와 장을 보는 일은 오래 마음을 데운다. 처음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낯선 채소 이름과 과일 값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나도 야채들의 윤기와 잎맥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장바구니에 넣기 시작했다. 태양을 그대로 먹고 자란 채소들은 흙의 체온을 아직 다 놓지 못했다.


사람들은 급하게 장을 보지 않는다. 토마토 하나를 고르기 위해 자리를 빨리 뜨지 않고, 빵 냄새를 맡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물건을 사고파는 평범한 장면인데도 환한 혈색이 돌고 스페인어 특유의 억양이 더 활기차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생기 있는 이 시간을 참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 사는 풍경은 말이나 얼굴빛이 달라도 삶의 모습은 무척 닮았다. 시장은 더욱 그러하다.






그녀의 집은 여행객들이 주로 머무른다. 스페인은 물론 주변 여러 나라 사람들이 주로 다녀간다. Mina작가의 까사미나(Casa Mina)와 레스토랑은 자연친화적인 삶과 태도를 담은 공간이다. 정원에서 자란 허브를 식탁으로 올려놓고, 최소한의 음식 쓰레기는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벽난로의 재는 정원의 거름이 되고, 오래된 가구와 그릇들은 시간을 머금고 제자리에 있다.


그녀는 공간을 꾸민다기보다 삶의 순환을 돌보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집에 머물다 보면 호흡도 천천히 하게 되고, 섬세한 감각들이 열리게 된다. 잠시 머물다 떠난 사람들의 웃음과 온기들이 공간마다 스며있는 듯하다.




https://minas.casa/


글벗 되어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쉼이 있는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에게 선물하시는 하루 보내세요♡


사진. by mocalemon.

수, 금 연재
이전 27화이미 다 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