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밀밭의 파수꾼', '이유 없는 반항'으로 본 청년기의 이해
여러 달을 꽉 채워 일해도 통장은 좀처럼 늘지 않는다.
스물아홉의 한 청년은 지난해 조그만 회사에 들어갔다. 소득은 조금 올랐다. 그런데도 그는 저축은 어렵고 그저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정도라고 말한다. 이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나라 청년 상당수의 내역이다. 단기 알바로 하루를 보내는 이도 많고, 그나마 없을 때도 많다. 나머지는 아직 취업을 준비 중이다.
세상은 이런 청년들을 두고 쉽게 말한다. 예민하다고, 삐딱하다고, 할 때 제대로 하지 늦게야 후회하느냐고.
그러나 나는 다르게 묻고 싶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사방이 막힌 듯한데, 흔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불안은 잘못된 감정이 아니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사람만이 흔들린다.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사람, 더 선택할 것이 없는 사람은 흔들릴 이유조차 없다. 불안은 무엇인가를 원하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청년이 유독 자주 흔들리는 것은 약해서가 아니라, 그의 앞에 아직 너무 많은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는 세상을 '가짜'라고 부른다. 학교도, 어른도, 성공도, 교양 있는 대화도 그에게는 속이 빈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 말버릇을 두고 그가 세상을 삐딱하게 본다고 혀를 찼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위선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위선을 알아보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미성숙한가. 홀든이 견디지 못한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순수한 것이 어른들의 언어 속에서 조금씩 훼손되는 장면이었다.
그는 냉소적인 아이가 아니다.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아이다.
그에게는 백혈병으로 먼저 떠난 동생 앨리가 있었다. 동생이 죽던 밤, 홀든은 차고 유리창을 맨주먹으로 다 깨뜨렸다. 손이 다칠 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사랑하는 동생을 살릴 수 없었던 무력감이, 자기 몸을 향해 그대로 돌아온 것이다. 그날 이후 그의 손은 무언가를 붙잡는 대신, 먼저 부수는 법을 배웠다.
그 이야기를 알고 나면 그의 '가짜'라는 말이 다르게 들린다. 세상을 미워하는 아이의 말이 아니라, 진짜였던 한 사람을 잃고 다시는 그렇게 아프고 싶지 않은 아이의 반복되는 말.
정말 무서운 사람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한때 너무 믿었던 사람이다.
홀든이 오늘의 청년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아마 그는 자기소개서를 쓰다가 멈췄을 것이다. '저는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인재입니다.'라는 문장을 몇 번이나 고쳐 쓰다가, 어느 순간 노트북을 덮었을 것이다.
그 글이 완전히 거짓이라서가 아니다. 쓰는 동안 자신이 조금씩 편집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슬롯에 속하려면 나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설명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잃는다.
〈이유 없는 반항〉의 짐 스타크도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그는 문제를 일으키는 소년처럼 등장한다. 술에 취해 경찰서에 오고, 새 학교에서 싸움에 휘말리고, 목숨을 건 자동차 게임에 나선다.
겉으로 보면 무모한 청춘의 치기다. 그러나 짐이 정말 원했던 것은 위험이 아니었다.
또래가 그를 '겁쟁이'라 부르자 짐은 참지 못한다. 그 말이 물러서기만 하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은 공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절벽에서의 치킨 게임. 그는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대신, 사랑을 시험했다. 죽음 앞에서 누군가 자신을 붙잡아줄지, 그 증거 하나를 확인하고 싶었다.
핸들을 놓지 않는 손. 홀든의 손이 부수는 법을 배웠다면, 짐의 손은 놓는 법을 몰랐다. 절벽 끝까지 그 손을 놓지 않은 것은 용기가 아니라, 놓는 순간 아무도 자신을 붙잡아주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었다.
겁쟁이가 되는 것보다 무서운 건,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홀든은 세상을 밀어냈고, 짐은 세상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한 명은 사랑받기를 포기하는 쪽으로, 한 명은 사랑을 증명하려는 쪽으로 갔다. 방향은 정반대다. 삐딱함은 뒤로 물러서는 몸짓이고, 무모함은 앞으로 달려드는 몸짓이다.
그런데 두 몸짓은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다.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자리.
짐에게 필요했던 것은 회피하지 않는 아버지의 자리, 바카라임지는 어른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자꾸 물러섰다. 문제를 덮으려 했고, 조용히 넘어가고자 했다. 짐은 스스로 바카라임지려 하는데, 어른들은 바카라임을 피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를 다치게 한 것은 세상의 위험이 아니었다. 위험할 때 아무도 대신 서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반항은 때로 서툰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홀든과 짐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 사이에는 긴 세월이 놓여 있다. 세상은 달라졌지만 마음의 모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오늘의 청년에게는 한 가지 무게가 더 얹혀 있다.
기성세대는 삶의 모순과 거짓과 불확실을 끌어안고 살아남았다. '하면 된다'는 믿음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을 동력 삼아 자기 자신을 밀어붙이는 일이 가능했다. 홀든이 미워했던 그 어른들의 위선조차, 실은 거짓을 감내하며 슬롯에 자리 잡는 법을 배운 흔적이었다. 그들의 긍정은 위선이기 이전에 생존이었다.
문제는 청년에게 그 '할 수 있다'가 더 이상 유효한 화폐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마감된 매표소 앞에서 표를 사려는 것과 같다.
말은 그대로 반복된다. 노력하라, 버텨라, 하면 된다. 그런데 그 말이 가리키는 안정된 일자리, 나의 집, 인정받는 자리는 이미 앞 세대가 선점했고 남은 자리는 많지 않다. 성과의 주체로 자신을 채찍질하라는 명령은 그대로인데, 도달할 목적지는 극히 적거나 이미 누군가 차지할 자리다.
노력하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 노력을 걸 판이 애초에 평등하지 않다.
이것이 청년이 느끼는 배신의 구조다. 홀든의 배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조용한 상실이었다면, 오늘의 배신은 매달 갱신되는 청구서처럼 돌아온다. 그래서 오늘의 삐딱함은 홀든의 것보다 더 지쳐 있다. 철학적 절망은 밤새 뒤척이다 아침이면 조금 가벼워지지만, 생계의 절망은 다음 달에도 똑같은 무게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오늘의 짐과 홀든은 절벽으로 차를 몰지 않는다. 그들은 방 안에서, 화면 너머의 무한한 비교 속에서 매일 다른 방식의 절벽 끝에 선다.
부모는 아이가 다칠까 봐 밖에 내보내지 않으면서도, 아이가 밤새 무엇을 들여다보는지는 모른다. 현실에서는 너무 이르게 보호받고, 화면 안에서는 너무 일찍 혼자가 된다. 넘어져 본 적 없는 몸과, 이미 너무 많이 비교당한 마음이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자란다.
성적, 취업, 연봉, 외모, 관계, 조회수, 인정. 무엇 하나 그냥 지나가지 않고 점수처럼 남는다. 혼자 있어도 혼자인 시간이 아니고, 쉬고 있어도 쉬는 시간이 아니다.
계속 비교당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먼저 비웃는 법을 배운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줄고,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거절당할 일도 없으니까.
그러니 냉소는 기대가 사라진 자리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기대가 꺾인 자리에서 태어난다.
성과슬롯의 배신, 과속 시대의 비교, 홀든의 상실, 짐의 두려움.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이유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흩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구조가 있다.
절벽 앞으로 달려가는 아이를, 아무도 붙잡아주지 않는 구조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물러서고, 학교에서는 교사가 물러서고, 슬롯에서는 제도가 물러선다. 각자의 이유는 다 있다. 먹고사는 일이 바빴거나, 규정이 없었거나, 바카라임 소재가 애매했거나. 그러나 결과는 같다. 절벽 끝에서 아이가 흔들릴 때, 그 자리에 붙잡아주는 손이 없었다는 것. 이것은 극단적인 예일지 모른다.
삐딱함은 그 부재에 대한 몸의 반응이다. 붙잡아주는 손이 없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스스로 방패를 세우는 일이다. 원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서 흩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인은 여럿이지만, 그것들이 향하는 결핍은 하나다. 붙잡아줄 사람의 부재. 그 손의 부재. 사람을 우선시하는 마음이 아이를 붙드는 손이다.
여기서 나는 조심스러워진다. 청년의 냉소를 철없음으로 깎아내리고 싶지 않고, 기성세대의 긍정을 위선으로만 몰고 싶지도 않다. 양쪽 다 각자의 생존이었다.
다만 그 방패를 평생 들고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위로는 필요하지만, 냉소에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이어서는 안 된다. 슬롯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조가 사람을 밀어냈다면, 우리는 동시에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회복은 곧장 긍정하는 일이 아니다. 먼저 자신이 무엇에 실망했는지 알아차리는 일이다. 무엇을 기대했기에 이토록 화가 났는지, 무엇을 사랑하고 싶었기에 이토록 냉소하게 되었는지 묻는 일이다.
홀든도, 짐도 결국 나쁜 아이가 아니었다. 세상을 비웃고 어른을 불신하고 규칙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정작 끝까지 원했던 것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파괴가 아니라 보호였다.
소설의 후반부, 홀든은 여동생 피비에게 자신이 꿈꾸는 것을 말한다. 넓은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그 밭 끝에는 절벽이 있다. 아이들은 놀다가 정신없이 절벽 쪽으로 달려간다. 그때 어딘가에 숨어 있던 홀든이 나타나 아이가 떨어지기 직전에 붙잡아준다. 그는 그 일만 하고 싶다고 말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것.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걸 그도 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정말로 원한 일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붙잡아주지 않았던 아이가, 결국 붙잡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 대목이 이 소설에서 가장 슬프면서 가장 희망적인 문장이다. 상처는 사람을 냉소로 이끌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결핍을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역할로 이끈다. 자신이 붙잡히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붙잡는 일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짐에게도, 오늘의 청년에게도 필요했던 것은 다르지 않다. 절벽 끝에서 손을 뻗어줄 파수꾼 한 사람. 삐딱함이라는 방패를 거두어도 안전하다고 말해줄 단 한 사람.
삐딱한 사람을 탓하기 전에, 우리 각자가 누군가의 파수꾼이 되어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청년의 불안을 푸는 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절벽 앞에서 손을 뻗는 단 한 사람의 존재일 때가 많다.
삐딱함은 끝이 아니다. 이 세계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다는 비스듬한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