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 이길 수 없는 게임

잘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망가뜨릴 때




영화 《블랙스완》의 마지막.

발레리나 니나는 흑조 연기를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온다. 자신의 복부가 아파온다. 내려다보니 거울 조각이 박혀 있다. 공연 전 경쟁자를 찔렀다고 믿었는데 정작 찌른 것은 자기였다.


니나는 그것을 알면서 다시 무대로 오른다. 백조가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마지막 장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백조를 연기하면서 그녀는 실제로 죽어가고 있었다.


관객이 환호하고 감독이 달려온다. 니나는 말한다. 완벽했다고.

그녀의 흰 발레복이 붉게 물들어간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예술가의 극단적인 이야기라고 여겼다. 어느 날 다시 보니 낯설지 않았다. 마음에 걸린 것은 니나가 자기를 찔렀다는 사실이 아니라, 알면서도 다시 올라갔다는 사실이었다.


보고서와 논문을 고치며 새벽을 넘기던 밤이 떠올랐다. 그만두는 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파일을 열던 밤.

정도가 다를 뿐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자기를 아프게 한다는 점은 같다.


보낸 원고를 다시 읽는다. 이미 보냈는데도 또 본다. 틀린 데가 없는지 살피고, 오탈자나 맞춤법이 눈에 걸릴까 걱정한다. 일이 복잡하게 얽힌 날은 명치 끝이 당기고 무언가 얹힌 것처럼 조인다.


매사가 그렇다. 흠잡을 데 없는 결과가 나와야 마음이 놓이니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쓰인다. 어제 끝낸 일을 아침에 다시 연다. 나쁘지 않은데 무언가 모자란다.


요즘 세상이 자꾸 더 잘하기를 바라니 그래서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고객의 민원과 항의에 지쳐 일을 놓는 이도 있다. 이런 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어느새 완벽주의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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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런 게 아니다

한동안 내 성격 탓이라 여겼다. 주변을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회사에서, 집안일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 쉬는 시간에도. 정도는 달라도 다들 비슷했다. 나는 오히려 느슨한 쪽이구나 싶을 만큼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얼마나 오래 견뎠으면 저렇게 해낼까 싶었다.


같은 일인데 누구는 견디고 누구는 그만둔다.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은 밖에서 볼 때와 안에서 겪을 때가 다르고, 맞지 않아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는 물러설 데가 없다.


니나는 알고 있다. 어머니가 자기를 낳느라 무용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무대의 성공은 딸의 꿈이 아니라 어머니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러설 데가 없으니 그렇게 매달린다.



살기 힘든 세상에서 살아남기

세상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빠르게 바뀐다. 많은 일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사람 자리가 줄어든다. 어려운 판단을 하는 일,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 몸으로만 할 수 있는 일,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 남은 자리는 이만큼인데, 자리가 좁아질수록 잘해야 살아남는다.


완벽주의자는 예민해서 되는 게 아니다. 경쟁이 심해지면 잘하는 사람이 남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젊은 사람들의 완벽주의가 꾸준히 올랐다는 조사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남들이 나에게 완벽을 바란다고 느끼는 정도가 가장 많이 올랐다고 한다. 학교도 회사도, 사람 사이도 견주고 매기니 완벽주의는 그렇게 자라난다.


부모와 선생과 상사의 기준이 어느새 내 것이 된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 내가 말하고, 아무도 벌하지 않는데 내가 벌한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른 채로 그렇게 산다.


플랫폼도 그렇다. 팔로워수, 조회수, 좋아요수. 남이 정해놓은 숫자가 내 기준이 된다. 예전에는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 가늠했는데 이제는 화면에 떠 있다. 하루에 몇 번씩 그 숫자를 들여다본다. 오르지 않으면 글이 모자랐던 것 같고, 오르면 다음에도 이만큼 나올까 싶으니, 어느 쪽이든 편하지 않다.


완벽주의는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가정과 세상과 일터가 함께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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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서도 안 끝난다

1975년 쾰른. 키스 자렛이 고장 난 피아노로 연주를 했다.


피아노에 관한 한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절대음감을 가졌고 작은 흠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런 사람 앞에 놓인 피아노는 높은 음이 날카롭고 낮은 음이 약했으며 페달은 듣지 않았다.


자렛은 그만두려 했다. 그가 보기에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었다. 열일곱 살 기획자가 빗속에서 매달렸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자렛은 무대로 올라갔다. 그 피아노에서 어떤 소리가 날지 그도 몰랐지만, 그가 고른 것은 그래도 해보자는 것 하나였다.


그 음반은 가장 많이 팔린 재즈 독주 음반이 되었다. 누가 봐도 큰 성취다. 그런데 자렛은 그 녹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이 완벽이라 부른 자리에서도 그는 자기와 화해하지 못했다.


오르지 못한 사람만 힘든 게 아니다. 오른 사람도 그 자리에서 불안하다. 자리가 올라도, 점수를 받아도, 인정을 받아도, 거기서 다음 기준이 생기기 때문이다.


니나가 마침내 흑조를 완성한 그 순간에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완벽에 도달하는 일과 자기를 지키는 일이 같은 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그 장면이 보여준다.



남에게는 너그럽고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완벽주의가 강한 사람은 자기에게 너그럽지 못하다. 잣대가 높기 때문이다. 남에게는 넉넉하면서 자기에게는 각박하다. 어릴 때부터 높은 기준에 맞춰 살다 보니 자기를 그렇게 보게 되었다.


넌 아직 부족하다. 더 잘해야 한다.


그 말 아래에는 더 조용한 두려움이 있다. 진짜 내 모습이 드러나면, 지금껏 해낸 것이 운이었다는 게 알려지면, 그때는 버려질 거라는 두려움.


쉬라고 해도 쉬지 못한다. 불안해서다. 쉬면 뒤처질까 봐 쉬지 못하고, 잘되어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며 경계를 놓지 않는다.


나는 바쁘다. 나는 최선을 다한다. 나는 인정받는 사람이다. 이 말들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중에야 알아차린 것이 있다. 나를 재던 자로 남도 재고 있었다는 것.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속으로는 거의 날마다. 나를 아프게 한 자를 내가 들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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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의 효과

자신을 나무라는 것을 그만두면 게을러질까 두렵다. 그 두려움에는 까닭이 있다. 여기까지 온 데에 그 채찍이 한몫했으니까. 조금만 더 몰아세우면 닿을 것 같고, 그렇게 해서 닿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애초에 닿을 수 없다. 완벽은 손에 잡히는 목표가 아니라 자꾸 자리를 옮기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시작할 때 그린 완벽과 막상 닿았을 때의 완벽이 다르다. 자리가 오르면 오른 사람의 기준이 생기고, 인정을 받으면 인정받은 사람의 기준이 생긴다. 시험을 잘 봐도 더 잘 풀 수 있었을 텐데가 남고, 좋은 말을 들어도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겠지가 남는다. 도달할 수 있었던 목표는 애초에 쉬웠다고 여기니, 이룬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채찍은 나를 그 자리에 데려다주지 못한다. 애쓰는 양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목표가 자꾸 뒤로 물러난다. 지금 지쳐 있다면 부족해서가 아니라 끝이 자꾸 물러나는 길을 걷고 있어서다.


세 번 고친 원고와 열두 번 고친 원고가 그렇게 달랐는지, 그 아홉 번에 무엇을 내주었는지, 한 번쯤 정직하게 헤아려볼 일이다.


세상이 바라는 것에 도달하려는 것과, 닿지 못했을 때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다른 일이다. 앞의 것은 이 시대에 사는 조건이라 어쩔 수 없지만, 뒤의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이 나와 같은 일로 힘들어한다면 더 애쓰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아주고, 그런 걱정은 대단한 게 아니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나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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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

니나는 마지막에 내가 완벽했다고 하지 않았다. 그게 완벽했다고 했다.

완벽했던 것은 공연이고, 그 공연을 한 사람은 그때 이미 거기 없었다.


완벽주의가 가장 깊이 들어왔을 때 사라지는 것은 결과가 아니다. 사라지는 것은 그것을 이룬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다정한 일은 여유 있을 때 하는 사치가 아니다. 도달할 수 없는 길을 계속 걸으려는 사람에게 남은 마지막 조건이다.


"넌 아직 부족해."


이 말은 지금도 들릴 것이다. 없앨 방법은 없다. 아니라고 따져봐야 소용도 없다. 따지는 동안에도 그 말을 참말로 여기고 있는 셈이니까.


다만 이렇게 볼 수는 있다. 나를 비판하는 그 말은 그저 떠오른 생각이다. 생각은 왔다가 지나간다. 그 생각이 머무는 동안에도 밥을 먹고 일을 한다. 즐거운 약속을 하고, 사람도 만난다.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사는 게 아니라,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사는 것이다.



과정을 바라본다

완벽주의가 나쁜 게 아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고, 기준을 낮춘다고 마음이 놓이는 것도 아니다.


바꿀 수 있는 건 방향이다. 어디에 닿을 것인가에서, 어떻게 걸을 것인가로. 물론 이것도 잘 안 되는 날이 훨씬 많다.


결과를 목표로 두면 만족은 오지 않는다. 그 자리가 자꾸 물러나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과정에 만족을 두면 조금 달라진다. 오늘 일 하나를 제대로 해냈으면 그날치는 채워진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 시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덜 다듬은 채 넘긴 보고서, 끝내 마음에 들지 않던 결과물. 그런 것들이 하나둘 쌓인다. 못난 흔적으로 볼 수도 있고, 거기까지 걸어간 자국으로 볼 수도 있다. 닿지 못한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일이다.


그렇다고 편해지지는 않는다. 가슴이 답답하고 자신을 나무라는 내면의 소리도 여전히 들린다. 다만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다음 일을 시작할 수는 있다. 완벽해져야 불안이 가시는 게 아니다. 불안한 채로 걷는 법을, 그리고 걷다가 멈추는 법을 조금씩 배울 뿐이다.



완벽주의는 도달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꾸 뒤로 물러나는 자리다.

닿지 못해도 거기까지 걸어간 길은 나에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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