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가장 평범한 얼굴로 우리를 지나간다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아이가 새벽에 태어났다. 진통이 시작되었을 때 아내는 아프다는 말 대신 내 손을 잡고 괜찮다고 했다.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동안 다니던 산부인과로 갔다.
다행히 순산이었다. 첫째를 낳고 4년을 기다린 딸이다. 수술실에서 처음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탯줄을 잘랐던 순간을 기억한다.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임신 중에 태아의 심장 부정맥이 발견되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했을 때, 둘째 소식에 좋아하던 우리는 그 자리에서 말이 없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대학병원에서는 경과가 좋지 않으면 아이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더 지켜보기로 했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는 결정을 못 하고 앉아 있는 우리를 재촉하지 않았다.
두 달 뒤 검사에서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어렵게 생긴 아이를 참으로 힘들게 낳았다.
아내는 예약해 둔 산후조리원에 들어갔다. 아이는 몸무게가 미달이라 인큐베이터에서 지내야 했다. 나는 퇴근하면 조리원에 들러 아내와 함께 보내고,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간호사가 데려온 아이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는 날이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았다.
그때는 남자에게 출산휴가가 없던 시절이었다. 하루만 쉬고 다시 출근했다. 마흔을 바라보던 나이였다. 한창 일할 때라 일이 몰렸다. 끼니를 거르는 날이 잦았다.
어느 날 밤,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명치 아래가 갑자기 찌르듯 아파왔다. 가끔 쓰리는 정도가 아니라 속에서 뜨거운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집에 와서 물을 마셔봤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누우면 더 심해져서 벽에 기대앉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는데 거울 속 얼굴이 창백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세면대를 잡고 한참 서 있었다.
만약 위암이나 췌장암 같은 불치병이라면. 수술을 할 수 있을까. 초기일까 이미 진행 중일까.
결혼이 늦은 데다 이제는 마흔을 바라보던 나이였다. 한창 일할 나이였다. 그래서인지 일들이 몰려 들어왔다. 힘든 시기였다. 이전에 한 건강검진에서는 특별히 다른 증상은 없었다. 평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 가끔 위가 쓰린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고통스럽게 아픈 적은 처음이었다. 일시적인 증상이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통증이 계속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내가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더 걱정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게 사랑이란 걸까. 아직은 홀로 되기에는 젊은 아내와 아이들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홀로 삼 형제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의지가 강하신 어머니. 이제는 누가 돌볼 것인가. 그게 가장 가장 큰 걱정이었다. 나 자신보다도, 나의 죽음보다도 세상에 남겨질 가족들이 직면할 슬픔과 어려움을 먼저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맡겨 둔 큰아이도 걱정되었다.
아이 방에 들어가 전등을 켰다. 구석에 턱받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 바닥에 앉아 서랍에서 볼펜을 꺼내 노트 뒷면에 이미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혹시 수술하게 되면 살지 죽을지도 모르니까.
연금, 생명보험. 대출. 적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적어보았다.
하나씩 적고 나서 들여다봤다. 아내와 아이 둘이 앞으로 살아갈 시간에 비하면 내가 남겨줄 것은 턱없이 부족했다. 재테크에 무관심했던 자신이 후회되었다. 남들은 일찍부터 부동산이나 주식에 관심을 가지고 애쓰는데.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안 되는 채로 가야 한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먼저 마음에 걸렸다. 더 벌어놓지 못한 것, 더 준비하지 못한 것이 하나씩 떠올랐다. 미안했다. 나한테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먼저 생각나는 것은 가족이라니. 엄습하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불안은 계속 나를 흔들었지만, 오히려 그런 큰 문제가 닥칠수록 의외로 차분해지고 담담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가 그랬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붙들어서 불편한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차분히 나의 죽음을 맞이하는 담담함. 내가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지를 그때서야 알았다.
곧 자리를 비울 다른 사람의 살림을 대신 정리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는 내가, 없어질 나의 뒷일을 처리하고 있는 거였다.
둘째 얼굴도 떠올랐다. 아직 몇 번 보지 못한 아이인데, 그 순간 보고 싶었다.
아프니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 창밖이 아주 천천히 밝아졌다.
아침을 알리는 알람이 울려서 일어나 씻고 양복을 입었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단정히 매는데, 낯설고 초췌한 얼굴이 서있었다.
온라인 게임에서 그날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약을 먹고 버텼는데, 통증은 계속됐다. 퇴근 시간이 되자 조리원으로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에서 분유 데우는 냄새가 났다. 아내가 있는 방문을 열었다. 아내는 침대에 기대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가 나를 보고 웃었다.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라 병원에서 준비한 산모용 식단으로 밥과 국, 반찬이 차려졌다.
"밥 먹었어?"
먹었다고 했다.
"아이 오늘 많이 잤대. 순하다."
눈이 살짝 부어 있었지만 예정보다는 다소 편해 보였다. 몇 달 동안 태아의 심장 때문에 잠을 설치다 이제야 출산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어젯밤에 이 사람에게 남겨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파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안했다.
아이를 안았다. 작고 따뜻했다. 손가락이 내 검지를 쥐었는데 힘이 의외로 단단해서 놀랐다. 형광등 아래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이 살짝 감겨 있었다. 이 아이는 지금 아빠가 안고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한참 안고 있었다.
간호사가 와서 아이를 데려갔다. 아내에게 잘 쉬라고 말하고 조리원을 나왔다.
주차장으로 가다가 병원 인근 약국에 들렀다.
"위장약 주세요."
약사가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속이 좀 쓰려서요."
약봉지를 받아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이 정도 통증에 위장약이면 되는 건가' 싶었지만, 약사에게 더 묻지는 않았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거는데 백미러에 조리원 건물이 보였다. 3층 어딘가에 아내와 아이가 있다.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아내 이름 위에 엄지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목소리를 들으면 말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괜찮은 척 전화를 끊을 자신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 불을 끄지 않은 채 누웠다.
다음 날 병가를 내고 병원에 갔다. 접수를 하고 대기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데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시경실에 들어가 옆으로 누웠다. 수면마취 없이 시술이 시작됐다. 관이 목을 지나갈 때 구역질이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화면에 위 안쪽이 비쳤다.
끝나고 나니 생각이 다 사라졌다. 결과가 궁금했다.
급성 위염이라고 했다.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진료실 의자에 앉은 채 한참 일어나지 못했다. 급성 위염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한 동안 몸이 풀리지 않았다. 며칠 동안 내가 겪은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만 알고 온 속앓이였다. 진단명 하나로 그게 정리될 리가 없었다.
병원을 나서서 처방약을 받아 주차장까지 걸었다. 걷는데 다리에 힘이 없었다.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으니 손이 떨리고 있었다. 며칠 동안 출근하고, 아이를 안고, 아내에게 웃어 보이는 동안 한 번도 떨지 않았던 손이었다.
핸들을 잡은 채 한참 앉아 있었다. 주차장에 혼자였고,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이 뜨거워졌다. 참 다행이다. 아직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시간이 남아서.
이제는 오래전 일이다.
큰아이와 둘째는 잘 자라주었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 교통편이며 식당이며 숙소까지 아이들이 먼저 알아본다. 이제는 세상 사는 게 버거워질 때가 있는데, 아이들이 자기 몫을 해내는 걸 보면 다행이다 싶다.
아내도 나도 나이가 들었다.
그런데 가끔 이유 없는 불안이 찾아오는 날이면, 그때가 생각난다. 아이의 앙증맞은 손가락이 내 손을 쥐던 떨리는 감촉이. "밥 먹었어?"라는 아내의 물음에 먹었다고 대답하던 내 목소리도.
혹시 아이들도 아빠를 닮아서, 힘든 일을 혼자 안고 있으면서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끔 그것이 궁금하다.
우리는 잃을 것이 있어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 잃는 일을 두려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