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불안에 관하여
고등학교 때 이웃에 사는 여고생들이 배드민턴 같이 치자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바쁘다고 거절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던 것 같다. 그렇게 방에 들어와 한참 동안 바카라상 앞에 앉아 있었다. 잠시 우리 집에 머물던 먼 친척뻘 여동생이 호감을 표시할 때도 모르는 체 지나갔다. 그냥 잘 지내자는 아무렇지 않은 친근감이거나 재미있게 놀고 싶어서 그랬을 터인데, 그때는 모든 게 미숙하고 서툴렀다. 남자와 여자라는 경계 앞에서 나는 망설였다.
저녁이면 부엌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왔다. 죽음의 달콤한 상상에 빠지곤 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가슴 아플 사람은 아마도 가족뿐이겠지... 그렇게 조용히 그 연기처럼 공기 속으로 소멸되어 가는 게 인생이라는 길이겠지. 가야 할 길이지만, 가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삶의 한편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죽음의 지평선까지 맞닿아 있던 시기였다.
나는 옛 시가 중에 제망매가를 무의식적으로 읊조렸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나는 이제 간다는 말도 못 하고 사라지는가. 떠난다는 말도 채 못 하고 멀어져 간 누이를 기리는 노래였다.
몇 권 읽지도 않은 바카라들을 겉핥기식으로 읽고 아는 체하는 지적 허영. 풋기 가득한 미지의 희망. 밑줄 그으며 밤새 읽었던 바카라들.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건져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릴 적 호기심으로 신문지를 말아서 아궁이 속 불을 붙여 피워보았다. 낮에 보았던 걸인이 남이 버린 담배꽁초에 남은 것을 모아 피우던 걸 흉내 냈다. 그냥 신문지만 말아 피웠으니까, 종이 탄 연기만 흡입하는 거였다. 한참을 기침했다. 담배도, 사랑도, 죽음도. 남이 하는 걸 보고 그냥 따라 하는 게 아니구나 후회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소년의 머릿속에는 이 어둠의 통로 같은 세계가 두렵기만 했다. 바카라에서 읽은 관념은 체화되지 못한 채, 사유의 먼지처럼 떠돌 뿐이었다. 유식한 체 내뱉는 겉멋의 말들은 친구나 아는 어른들에게 이 자식 좀 또라이 아니냐는 시선을 갖게 했을지 모른다.
이 어둠만 지나면 어딘가에 다른 삶이 있을 것 같았다.
검은 안개 뒤에 빛나는 태양이 넘실대는 아름다운 숲, 강, 들판이 있는 그런 곳.
여성을 사랑했다. 지향했다. 그녀의 이름을 순수라고 붙였다.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순수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었다. 어디서 읽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한 줄이 내 사랑의 교리가 되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온 한 줄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용기가 없었다. 그게 사랑인지 이상인지 관념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잡다한 생각으로 순수라는 여성을 사랑했다. 없었다. 그냥 관념이고 존재하지 않은 허무였다. 그래도 그 상상 속의 여인이 언젠가 나타나 나를 순수하게 사랑해 줄 거라 믿으며 외로운 마음을 위로했다.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의 서사가 먼저 완성되어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처음으로 첫사랑 비슷한 감정을 가진 여자가 생겼다. 첫눈에 호감이 갔다. 마음에 들었다. 사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첫 번째 여자였다.
강의실에서 그녀가 앞자리에 앉아 있으면 나는 뒷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녀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어떤 목소리인지도 몰랐다.
친구가 말했다. 좋으면 말 걸어봐. 그게 뭐 어렵다고 그래.
그런데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어려운 게 아니라 두려웠다. 사랑하는 순간 어쩌네 저쩌네 하는 사랑의 지침서는 내 마음의 쓰레기통으로 이미 사라졌다.
만져본 적 없는 따뜻한 촉감을 상상했다. 그 속을 흐르는 사랑.
나는 혼자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다. 만약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건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혹시 나를 거절하면, 그 상처는 어떻게 하지. 불안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왔다.
내 존재의 성(城)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못한 한 청년의 두려움이었다.
그렇게 일 년을 혼자 사랑했다. 짝사랑이었다.
한 번은 하교 길에 같은 버스를 타게 되었다. 나는 몰랐다. 먼저 올라서 버스 중간에 있었다. 학생들이 들어오자 공간이 생기도록 뒤로 이동하던 순간 그녀가 버스에 올라탔다.
그녀를 본 순간, 온몸이 정지하듯 멈추었다. 세상이 소용돌이처럼 그녀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버스 안의 소음도 전부 사라졌다. 그녀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는 오직 그녀와 나만 존재했다.
이게 실제일까. 내가 본 것은 당시 내가 온몸으로 지각하고 느낀 실제 맞닿은 경험이었다. 아직까지도 결코 잊지 못하는 강렬한 감정과 경험. 정말 좋아하면 이런 순간을 지나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한 여자를 일 년이나 짝사랑하니 헛것이 보이는 거야.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가 그 자리에 여전히 서있었다.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이 불안이었는지 희열이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몸이 반응한 것은 하나인데, 그것을 부르는 이름이 둘이었다.
비교적 짧은 거리인데도, 한없이 긴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녀가 서 있었다. 나는 먼저 내렸고, 그녀도 어딘가에서 내렸을 것이다.
사랑은 한 사람만을 남기고 세상을 지운다. 사랑은 그녀만이 유일한 세상이 되는 것. 그런 사랑을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게 불가능하다. 사랑하는데, 온전한 사랑을 건넬 수 없다면 그런 사랑을 시작해도 되는 것일까. 불완전하고 성숙하지 않은 존재가 진짜 사랑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데는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11월의 늦가을, 가로수의 잎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늦가을 햇살이 주는 조그만 빛과 온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그렇게 우리는 잠시 만났다. 나란히 걸었다. 손이 닿을 만한 거리였는데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 아직 나는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존재였다. 그런 나를 사랑한다면 그녀도 힘들지 모른다는 직감이었다.
나의 존재적 불확실함 때문에 그녀에게 어떤 좋아한다는 감정도 건넬 수 없었다. 사랑에는 바카라임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카라임질 수 없는 감정을 건네서 상대를 힘들게 해서는 안된다는 게 이유였다.
잠시 만났다고 해서 그 사랑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가질 수 있었는데 먼 미래의 길을 내다보며 차마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사랑은 잃은 것일까, 버린 것일까.
불쌍한 녀석. 나의 경우는 늘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