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여름인데 잎이 떨어진다

몸이 먼저 알아차리는 시간에 대하여

by이화윤 lee hwayoon




8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벌써 잎을 떨구는 나무들이 보인다.


며칠 동안 강한 햇살이 땅을 말렸다. 길가에는 누렇게 마른 잎이 몇 장씩 떨어져 있다. 아직 여름인데 나무만 먼저 가을을 알아챈 듯하다.


아침 공기도 며칠 전과 사뭇 다르다. 출근할 때 에어컨을 계속 켜놓지 않아도 견딜 만하다. 밤새 써큘레이터 바람을 제대로 맞았는지 목 안이 뻑뻑하고 몸도 조금 무겁다.


감기 기운이 있는 모양이다.


몸이 조금 아픈 날에는 세상이 별로 재미가 없다.


평소에는 그럴듯하게 들리던 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살아라. 관점이 결과를 낳으니, 좋은 쪽을 보아라. 세상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몸이 괜찮을 때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아픈 날에는 그런 말들이 좀 멀어진다. 좋은 말도 그것을 받아낼 힘이 있을 때 마음에 와닿는 것 같다.




몸살 기운이 있는 날에는 바카라도 잘 읽지 못한다. 평소 좋아하던 것도 귀찮아지고, 하려고 했던 일은 잠시 미룬다.


그럴 때 문득 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전에는 하루쯤 몸이 좋지 않아도 금방 나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제는 작은 통증도 며칠 지켜본다. 낫는 데 시간이 걸리면 이유를 생각하고, 몸의 이곳저곳에 전보다 자주 마음이 머문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평소에는 그것을 잊고 살 뿐이다.


몸이 아픈 날에는 안 좋은 생각이 더 자주 들고 마음도 심란해진다.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실까지 미리 살아보게 한다.





어린 시절에도 그런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다.


한여름 밤이었다.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보았다. 별이 아주 많았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이 높아진다기보다 깊어지는 것 같았다.


가끔 옥상에서 회전팽이처럼 빙빙 돌곤 했다. 한참을 돌다가 그대로 드러누우면 별과 하늘이 함께 움직였다. 하늘이 도는 것인지 내가 도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저렇게 큰 하늘이 그대로 무너져 나를 덮치면 어떻게 하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심장이 빨리 뛰었다. 내가 누운 땅도 그다지 믿을 만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 몰랐다. 부모에게 말한 기억도 없다.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이미 내가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어린 날의 나는 거대한 밤하늘 앞에서 작아졌다.


그 뒤로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잊고 살았다. 학교에 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해나갔다. 바쁜 동안에는 자신이 얼마나 작고 약한 존재인지 생각할 겨를도 많지 않았다.


이제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날이면 그 여름밤이 생각난다.


다만 두려움의 모습은 달라졌다.


어린 날에는 하늘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지금의 불안은 그렇게 크고 요란하게 오지 않는다.


아침 공기가 조금 서늘해진 것을 알아차릴 때처럼 온다.


평소보다 오래 남는 피로 속에서도 오고, 며칠째 낫지 않는 작은 통증 속에서도 온다. 어제까지 가지에 붙어 있던 잎이 오늘 아침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에도 온다.


몸이 아픈 날에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계속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읽고 싶은 바카라이 있고, 가보고 싶은 곳이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쓰고 싶은 글도 아직 남아 있다.


예전처럼 꼭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할 수 있다면 하나씩 해보고 싶은 정도다.


이상하게도 몸이 약해진 뒤에야 남은 날들이 아깝게 느껴진다.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퇴근길에 아침에 보았던 가로수길을 다시 지나갔다.


마른 잎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가지에는 여전히 푸른 잎이 무성했다.


아직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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