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사자의 서』
우리 인간 존재에게 죽음은 가장 크고 두려운 장벽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의 끝, 즉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자 돌이킬 수 없는 상실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이 필연적인 종말 앞에서 공포를 느끼고, 가능하면 그것을 외면하거나 잊으려 애쓰며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영적인 길조차도 죽음을 고통스러운 윤회 (Saṃsāra, 삼사라)의 한 과정으로 보고, 다음 생 (生)에 더 나은 곳에 태어나거나 혹은 이 순환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하지만 불교 탄트라 (Tantra), 즉 금강승 (金剛乘, Vajrayāna, 바즈라야나)은 이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습니다.
금강승의 가르침에서, 죽음은 결코 실패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존재가 겪는 과정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결정적인 해탈 (解脫, Mokṣa, 목샤)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일평생 닦아온 모든 수행의 진가 (眞價)가 발휘되는 순간이며, 훈련받지 못한 의식에게는 혼란스러운 혼돈의 순간이지만, 준비된 수행자에게는 무지 (Avidyā, 아비드야)의 모든 굴레를 단번에 끊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궁극의 전환점을 깨달음의 기회로 삼는 심오한 지혜와 구체적인 수행법을 집대성한 문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티벳의 위대한 스승 파드마삼바바 (Padmasambhava)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이며, 서구에는 『티베트 사자의 서, The Tibetan Book of the Dead』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경전의 제목인 ‘바르도 퇴돌’은 ‘바르도 (Bardo)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해탈에 이르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바르도’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바르도’는 티벳어로 ‘중간’ 또는 ‘사이 (in-between)’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상태 사이의 ‘과도기’ 또는 ‘중간 지대’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흔히 ‘삶’과 ‘죽음’을 명확하게 구분하지만, 금강승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존재 전체가 연속된 바르도의 흐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이 순간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의 바르도 (Kyenay Bardo, 껴내 바르도)’입니다. 우리가 잠들어 꿈을 꾸는 순간은 ‘잠듦’과 ‘깨어남’ 사이의 ‘꿈의 바르도 (Milam Bardo, 밀람 바르도)’입니다. 깊은 명상 (Samādhi, 사마디)에 잠긴 순간 역시 ‘산란함’과 ‘깨어남’ 사이의 ‘명상의 바르도 (Samten Bardo, 삼텐 바르도)’입니다.
하지만 『티베트 사자의 서』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사건을 전후로 펼쳐지는 결정적인 세 가지 바르도입니다. 이 세 가지 바르도는, 죽음의 순간에 대한 ‘치카이 바르도 (Chikhai Bardo),’ 죽음 직후 실재 (實在)를 경험하는 ‘초에니 바르도(Chönyid Bardo)’, 다음 생 (生)을 찾아 헤매는 ‘시파 바르도(Sidpa Bardo)’입니다.
이 경전은 본래, 죽은 이의 곁에서 그를 위해 낭송되던 안내서였습니다. 그 목적은 죽은 이의 의식이 ‘바르도’라는 혼란스러운 여정을 무사히 통과하여 궁극의 해탈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바카라의 진정한 가치는 죽은 자를 위한 안내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바카라은 오히려 살아있는 우리를 위한 가장 강력한 수행 지침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바카라은 우리에게 죽음의 순간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미리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결정적인 해방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로 지금 이 삶 속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삶을 갈고 닦아야 하는지를 명확히 가르쳐줍니다.
첫 번째 기회: 죽음의 순간과 ‘정광명 (淨光明)’의 만남 (치카이 바르도)
금강승이 죽음을 가장 위대한 기회라고 부르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죽음의 순간에 우리 마음의 가장 깊고 순수한 본성이 찰나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을 ‘치카이 바르도 (Chikhai Bardo)’, 즉 ‘죽음의 고통스러운 바르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숨을 거두는 과정은 단순히 심장이 멈추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를 구성하던 요소들이 차례대로 해체되는 정교한 내면의 과정입니다. 먼저 땅 (地)의 원소가 물 (水)의 원소로 녹아들면서, 몸은 무거워지고 기력을 잃으며 시각 기능이 약해집니다. 이어서 물의 원소가 불 (火)의 원소로 녹아들면서, 몸의 체액이 마르고 청각 기능이 사라집니다. 불의 원소가 바람 (風)의 원소로 녹아들면서, 체온이 식어가고 후각 기능이 멈춥니다. 마지막으로 바람의 원소가 의식 (識)의 공간으로 녹아들면서, 호흡이 완전히 멎고 촉각 기능이 사라집니다.
이 거친 육체와 감각이 모두 해체된 후, 우리의 의식 또한 더 미묘한 차원으로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분별하는 생각과 거친 마음의 작용이 점차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이원성의 세계에 묶어두었던 모든 거친 에너지, 즉 이다 (Īḍā)와 핑갈라 (Piṅgalā) 나디를 흐르던 모든 ‘업의 바람 (프라나)’이 그 활동을 멈추고 중심 통로인 수슘나 (Suṣumnā) 또는 아바두티 (Avadhūti) 안으로 강제로 흡수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완벽차제 (圓滿次第, Sampannakrama, 삼판나크라마)’ 수행을 통해 살아생전 의도적으로 재현하려 했던 바로 그 순간입니다. 모든 이원적인 프라나의 활동이 중앙 통로 안에서 완전히 ‘녹아들 때 (dissolve)’, 그 바람을 타고 움직이던 모든 거친 마음과 생각들도 함께 소멸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텅 빈 바탕 위에서, 우리 마음의 가장 깊고 순수한 본질, 즉 ‘근원의 정광명 (Primordial Clear Light, Prabhāsvara, 프라바스와라)’이 마치 구름이 걷힌 뒤의 태양처럼 눈부시게 드러납니다.
이 정광명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본래 모습인 불성 (佛性)이며, 텅 비어 있으면서도 (空性, 슈냐따) 모든 것을 아는 (光明, 프라바스와라) 순수한 의식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탈을 위한 첫 번째이자 가장 위대한 기회입니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이 순간, 죽은 자의 의식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오, 고귀한 자여! 지금 그대 앞에 순수하고 텅 빈, 눈부신 빛이 나타났다. 그것을 알아보아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 밖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그대 자신의 순수한 마음 본성이다. 그 빛 속으로 들어가라. 그 빛과 하나가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즉시 해탈할 것이다.”
만약 수행자가 살아생전 완벽차제 수행, 특히 정광명 요가를 깊이 닦았다면, 그는 이 순간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눈부신 빛을 즉시 ‘알아보고 (Recognition)’,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아이처럼 편안하게 그 빛 속으로 합일 (合一)될 수 있습니다. 이 순간의 알아차림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 (成佛, 성불)입니다.
하지만 평생 동안 자신을 ‘육체’와 ‘자아 (Ego)’라고만 믿고 살아온 훈련받지 못한 의식에게, 이 순수하고 실체 없는 빛은 너무나 생경하고 압도적입니다. 그들은 이 빛의 광휘 앞에서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거나, 혹은 자신이 완전히 소멸된다는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이 해방의 빛을 외면하고, 다시 ‘나’라는 분리된 의식을 찾아 과거의 습관적인 어둠 속으로 도피합니다. 이들은 결국 이 찰나의 기회를 놓치고, 의식을 잃은 채 다음 단계의 바르도로 넘어가게 됩니다.
두 번째 기회: 마음의 투영을 알아차리다 (초에니 바르도)
첫 번째 기회인 정광명을 놓친 의식은, 며칠간의 깊은 무의식 상태가 지난 뒤 다시 깨어납니다. 이때 들어서는 두 번째 중간 지대가 바로 ‘초에니 바르도 (Chönyid Bardo)’, 즉 ‘실재의 바르도’ 또는 ‘법성의 바르도’입니다.
이 상태에서 의식은 더 이상 거친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생각으로만 이루어진 매우 미묘한 ‘의생신 (意生身, mental body)’을 가지게 됩니다. 육체의 감각기관이 없기 때문에, 의식은 자신의 내면에 저장된 카르마 (Karma)의 인상 (saṃskāra, 삼스카라)들을 외부 세계로 직접 투영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강력한 환각이나 생생한 꿈속에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이 초에니 바르도에서 의식이 무엇을 보게 되는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처음 며칠 동안, 죽은 자의 의식 앞에는 눈부신 빛과 함께 지극히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의 ‘평화의 본존 (Peaceful Deities, Shitro, 쉬뜨로)’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자비로운 부처와 보살들의 형상으로, 각각 다섯 가지 색깔의 빛 (백색, 청색, 황색, 적색, 녹색)을 뿜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해탈을 위한 두 번째 기회입니다.
이 경전은 죽은 자에게 간절히 외칩니다.
“오, 고귀한 자여! 두려워 말고 현혹되지 말라! 그대가 보는 이 아름다운 부처님들은 그대 밖에서 온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바로 그대 자신의 마음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던 다섯 가지 지혜 (五智, 오지)가 정화되어 나타난 모습이다. 그들은 그대 자신의 순수한 본성의 표현이다. 그것을 알아보고 그 빛 속으로 합일하라!”
만약 수행자가 살아생전 생기차제 (生起次第, Utpattikrama) 수행, 즉 본존 요가 (Deity Yoga)와 만다라 (Maṇḍala) 시각화를 충실히 닦았다면, 그는 이 순간 나타난 본존의 모습을 즉시 알아볼 것입니다. 그는 이들이 자신이 평생 동안 수행해 온 자비로운 본존임을 깨닫고, 기쁜 마음으로 그들과 하나가 되어 해탈을 성취합니다.
하지만 훈련받지 못한 의식은 이 눈부신 지혜의 빛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순수한 빛과 함께 나타나는, 자신들의 번뇌 (五毒, 오독)가 만들어낸 더 흐리고 편안한 빛 (예: 아귀도의 흐린 황색 빛, 축생도의 흐린 청색 빛 등)에 본능적으로 이끌립니다. 그들은 부처의 빛을 외면하고 자신의 업 (業)이 이끄는 흐린 빛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평화의 본존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기회를 놓치면, 며칠 뒤 더욱 무서운 시련이 닥칩니다. 이번에는 피를 마시고,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었으며, 불길에 휩싸인 흉측하고 ‘분노의 본존 (Wrathful Deities, Trakma, 트록마)’들이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기회입니다.
경전은 다시 외칩니다.
“오, 고귀한 자여! 경악하거나 도망치지 말라! 이 무서운 존재들 역시 그대 밖에서 온 악마가 아니다. 그들은 그대가 알아보지 못했던 저 ‘평화의 본존’들이, 그대의 두려움과 혐오라는 업력 (業力)에 의해 모습을 바꾼 것뿐이다! 그들은 그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며, 본질은 자비로운 지혜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들의 본질이 공 (空)함을 꿰뚫어 보아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간, 그대는 해탈할 것이다!”
이 역시 생기차제 수행과 깊이 연결됩니다. 금강승 수행자는 평화로운 본존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분노와 공포를 상징하는 분노존 또한 의도적으로 관상하고 그와 합일하는 훈련을 합니다. 따라서 잘 훈련된 수행자는 이 무서운 광경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들을 자신의 깨달은 마음이 가진 강력한 힘의 표현이자, 무지를 파괴하는 자비의 활동으로 알아보고, 그들과 기꺼이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훈련받지 못한 의식은 이 끔찍한 광경 앞에서 완전히 압도당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옥에 떨어졌다고 생각하거나, 악마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믿으며 극심한 공포 속에서 도망치려 합니다. 그들이 도망치려 할수록, 그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 환영이 ‘실재한다’는 믿음을 더욱 굳히게 되며, 해탈의 문은 굳게 닫힙니다.
마지막 기회: 환생의 문턱에서 (시파 바르도)
정광명의 빛도 놓치고, 본존들의 자비로운 초대도 알아보지 못한 의식은, 이제 마지막 중간 지대인 ‘시파 바르도 (Sidpa Bardo)’, 즉 ‘존재의 바르도’ 또는 ‘환생의 바르도’로 넘어가게 됩니다. 초에니 바르도에서 자신의 마음이 투영한 환영을 실재라고 믿어버린 결과, 이제 의식은 ‘나’라는 분리된 자아 관념을 다시 확고하게 가지게 됩니다.
이 상태의 의식은 거친 육체는 없지만, 매우 가볍고 미묘한 ‘의생신 (意生身)’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몸은 생각만으로 어디든 갈 수 있고 벽도 통과할 수 있지만, 안정감이 없고 업의 바람 (카르마의 힘)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닙니다. 죽은 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지만, 살아있을 때의 집착과 습관에 여전히 묶여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가족과 재산을 찾아 헤매지만, 그들과 더 이상 소통할 수 없음을 깨닫고 깊은 슬픔과 좌절에 빠집니다.
이때, 의식은 단 하나의 강력한 충동, 즉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힙니다. ‘나’라는 존재가 머무를 수 있는 견고한 육체를 다시 얻고 싶은 욕구가 맹렬하게 일어납니다. 이 갈망에 이끌려, 의식은 자신의 과거 업 (業)에 따라 다음 생의 부모가 될 남녀가 성적 (性的)으로 결합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업력과 맞는 그 광경에 강렬하게 이끌린 의식은, 그들의 결합에 질투나 욕망을 느끼며 그 사이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의식은 어머니의 자궁 속 수정란에 갇히게 되며, 이전 생의 모든 기억을 잃고 새로운 윤회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통제되지 않는 환생입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순간에도 해탈을 위한 기회, 혹은 최소한 더 나은 환생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이 혼란스러운 시파 바르도의 의식을 향해, 다음 생을 결정짓는 강력한 업력에 휩쓸리지 말고 마지막까지 마음을 다스리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것은 환영임을 기억하라! 특정 대상에 집착하거나 혐오하지 말라! 자궁의 문을 닫고, 청정한 정토에 태어나기를 서원하라!”
바로 이 순간, ‘환영의 몸 (幻影의 身, Māyā-deha, 마야-데하)’을 닦은 수행자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는 완벽차제 수행을 통해, 이미 살아있을 때 거친 육체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미묘하고도 ‘청정한 환영의 몸’을 성취했습니다. 평범한 의식이 죽음과 함께 혼란에 빠지고 업력에 휩쓸려 ‘의생신’이라는 불완전한 몸을 받는 것과 달리, 이 수행자는 죽음의 정광명을 경험한 뒤, 자신이 이미 닦아온 그 완벽하고 의식적인 환영의 몸으로 깨어납니다. 그는 시파 바르도의 혼란스러운 환영들에 속지 않습니다. 그는 업의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대신, 자신의 의지로 이 바르도를 자유롭게 항해합니다. 그는 더 이상 환생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장소와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여’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를 Tulku, 툴쿠 또는 화신, 化身, Nirmanakāya, 니르마나카야라고 합니다).
이처럼 『티베트 사자의 서』는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님을, 오히려 그것이 우리 존재의 본질을 마주하고 완전한 자유를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장엄하고도 결정적인 기회의 순간임을 보여줍니다. 이 경전은 죽음의 과정에서 우리 앞에 펼쳐질 내면의 지도를 미리 보여줌으로써, 그 낯선 길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준비시킵니다.
금강승의 모든 위대한 수행들 – 생기차제 (본존 요가)와 완벽차제 (정광명, 툼모, 환영의 몸) – 은 결코 난해한 밀교 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결정적인 죽음의 바르도를 성공적으로 통과하기 위한 가장 실질적이고도 강력한 ‘삶의 준비’입니다. 생기차제는 초에니 바르도에서 마주칠 신성한 본존들을 미리 친견 (親見)하는 연습입니다. 완벽차제는 치카이 바르도에서 빛날 정광명을 미리 체험하는 연습이며, 시파 바르도를 헤쳐나갈 환영의 몸을 미리 구축하는 작업입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두려움 속에서 수동적으로 맞이할 수도 있고, 혹은 일생일대의 가장 위대한 기회로 삼아 영원한 자유를 향해 비상할 수도 있습니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우리에게 그 선택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수행하느냐에 달려있음을 엄중하게, 그리고 자비롭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