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육체 (肉體)를 ‘나’라고 굳게 믿고 살아갑니다. 이 몸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무지 (Avidyā, 아비드야)와 과거의 행위 (Karma, 카르마)가 뭉쳐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그것은 거친 다섯 가지 원소 (五大, 오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필연적으로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이 ‘거친 몸 (Gross Body)’에 깃든 거친 의식 (意識)을 통해 세상을 경험합니다. 이 의식은 무지와 업의 바람 (業風, karma-vāyu, 카르마-바유)을 타고, 척추 좌우의 이다 (Īḍā)와 핑갈라 (Piṅgalā) 나디 (Nāḍī)를 통해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이 육체와 거친 마음은 우리가 윤회 (Saṃsāra, 삼사라)의 고통을 겪는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우리는 이 몸이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의 의식 역시 이 거친 육체와 함께 해체되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리고 가장 미묘한 마음은 업의 바람에 휩쓸려 통제력을 잃은 채, 다음 생 (生)을 향해 떠다니게 됩니다. 이 중간 상태를 우리는 중유 (中有, Bardo, 바르도)라고 부릅니다. 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우리는 과거의 습관적인 힘 (習氣, vāsanā, 바사나)에 이끌려, 또다시 무지와 고통의 세계로 태어나는 윤회의 바퀴를 멈추지 못합니다.
금강승 (金剛乘, Vajrayāna, 바즈라야나)은 이 근본적인 한계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이 길은 우리에게 ‘이 죽을 수밖에 없는 거친 몸’ 대신, ‘깨달음의 빛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몸’을 지금 이생에서 닦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환영의 몸 (Māyā-deha, 마야-데하)’을 닦는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환영’이라는 말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거친 육체보다 훨씬 더 실재에 가깝고 정교하며 영원한 몸입니다. 이 몸은 무지와 업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혜 (prajñā, 프라즈냐)와 자비 (karuṇā, 카루나)의 순수한 에너지로 빚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몸은 늙거나 병들거나 쇠퇴하지 않으며, 오직 깨달음의 지혜와 자비만을 그 본질로 삼습니다.
이 경이로운 몸을 왜 ‘환영 (Māyā, 마야)’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몸이 공성 (空性, śūnyatā, 슈냐따)의 진리를 완벽하게 체현 (體現)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맑은 날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아름다운 색깔과 형태를 분명하게 봅니다. 즉, 그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나타나 (顯現, 현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붙잡으려 손을 뻗을 때, 그 안에는 어떤 고정된 실체도, 견고한 물질도 존재하지 않음을 압니다. 그것은 단지 태양빛과 대기 중의 물방울이라는 여러 조건이 만나 잠시 드러난 현상일 뿐이며, 그 본질은 텅 비어 (空) 있습니다. 환영의 몸도 이와 정확히 같습니다. 그것은 깨달은 지혜의 빛으로 이루어져 가장 찬란하고 완벽한 모습 (예를 들어 본존의 모습)으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살과 뼈와 같은 거친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도 갖지 않습니다 (空性, 공성).
이것이야말로 금강승이 추구하는 궁극의 진리, 즉 ‘나타남 (顯現, Appearance)’과 ‘텅 비어 있음 (空性, Emptiness)’이 둘이 아님 (空色不二, 공색불이)을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지금 ‘나’라고 집착하는 이 평범한 육체는 ‘불순한 환영 (impure illusion)’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착각하지만, 그것 역시 연기 (緣起)에 따라 잠시 생겨났다가 반드시 사라지는, 본질적으로 텅 빈 존재입니다. 반면, 수행자가 닦아낸 환영의 몸은 ‘청정한 환영 (pure illusion)’입니다. 수행자는 이 몸이 텅 비어 있음을 명확히 알면서도 (지혜), 그것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자비의 도구로 자유롭게 활용 (방편)합니다. 환영의 몸을 닦는다는 것은 이처럼 ‘불순한 환영’을 ‘청정한 환영’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경이로운 환영의 몸은 어떻게 닦아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지적인 상상이나 단순한 의지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환영의 몸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생기차제 (生起次第, Utpattikrama, 욷빧띠크라마)와 완벽차제 (圓滿次第, Sampannakrama, 삼판나크라마)라는 두 가지 핵심 수행이 정교하게 결합된 결과물입니다.
먼저, 생기차제 (본존 요가) 수행을 통해 수행자는 ‘평범한 나’라는 낡은 정체성을 해체합니다. 그리고 공성의 바탕 위에서 ‘나는 부처 (본존)다’라는 청정한 관점을 확립합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본존의 빛나는 몸으로, 세상을 본존의 만다라 (Maṇḍala)로 끊임없이 시각화하고 그 거룩한 자부심을 유지합니다. 이 생기차제가 완벽하게 숙달되면, 수행자는 이 시각화된 본존의 몸 (Samayasattva, 사마야사뜨바)이 마치 실제 육체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경지에 이릅니다. 이 생기차제에서 닦은 ‘청정한 관점’과 ‘시각화된 본존의 몸’은, 이후 환영의 몸이 실제로 현현할 수 있는 ‘청사진’ 또는 ‘틀 (framework)’의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 시각화된 몸은 아직까지는 ‘마음 (Mind)’으로 빚어낸 개념적인 몸입니다. 이것을 실제적인 에너지의 몸, 즉 환영의 몸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완벽차제의 강력한 요가 기술이 필요합니다. 완벽차제의 핵심은 우리 몸 안의 가장 미묘한 에너지 시스템을 직접 다루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툼모 (Tummo)와 같은 내면의 불 수행, 강력한 호흡 보유 (Kumbhaka, 쿰바카), 그리고 에너지 잠금 (Bandha, 반다) 기법을 사용합니다. 이 강력한 수행은 척추 좌우의 이다 (Īḍā)와 핑갈라 (Piṅgalā) 나디를 흐르던 모든 ‘업의 바람 (프라나)’들을 강제로 중앙 통로인 수슘나 나디 (Suṣumnā Nāḍī) 또는 아바두티 (Avadhūti) 안으로 불어넣습니다.
모든 프라나 에너지가 이 중심 통로로 모여들어 안정되고, 마침내 그 안에서 완전히 ‘녹아들 때 (dissolve)’, 우리의 모든 거친, 이원적인 마음 (오감의 의식과 분별하는 생각)은 그 지지대를 잃고 활동을 멈추게 됩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죽음의 과정을 의도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지 (地) · 수 (水) · 화 (火) · 풍 (風)의 사대 (四大) 원소가 차례로 해체되고, 의식이 점차 미묘해지는 것을 내면에서 체험합니다.
이 모든 거친 의식의 작용이 멈춘 바로 그 순간, 우리 마음의 가장 깊고 미묘하며 근원적인 본성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정광명 (淨光明, Clear Light, Prabhāsvara, 프라바스와라)’입니다. 이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아는 순수한 앎의 빛은 우리 마음의 진정한 본성이며, 공성의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환영의 몸은 바로 이 정광명의 마음에서 태어납니다. 정광명을 체험하는 가장 미묘한 마음 (心, Citta, 찓타)과 그 마음이 타고 다니는 가장 미묘한 에너지 바람 (風, Prāṇa, 프라나)이 결코 둘이 아님을 깨달을 때, 이 ‘미묘한 바람-마음 (subtle wind-mind)’이 바로 환영의 몸의 재료가 됩니다. 즉, 툼모 수행 등을 통해 모든 거친 바람 (업의 바람)을 정화하여 가장 순수한 형태의 ‘미묘한 프라나 (지혜의 바람)’를 얻고, 이 프라나가 모든 개념적인 생각을 넘어선 ‘정광명의 마음’과 완전히 합일할 때, 이 합일된 에너지-의식 (Energy-Consciousness)이, 생기차제에서 닦아온 본존의 청사진(틀) 안에서, 마침내 환영의 몸으로서 실제로 현현 (顯現)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마음으로 상상해낸 몸이 아니라, 가장 정제된 에너지와 의식으로 이루어진 실제하는 미묘신 (微妙身)입니다.
‘환영의 몸을 닦는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 존재의 가장 미묘한 에너지와 의식을 정화하고 재구성하여, 부처의 몸 (報身, 보신, Sambhogakāya, 삼보가카야)의 원형을 미리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 수행을 성취한 요기는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될까요?
첫째,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거친 육체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비록 겉모습은 평범한 인간처럼 보일지라도, 그의 진정한 의식은 이 빛나는 환영의 몸에 안주합니다. 그는 이 미묘한 몸으로 물질적인 육체의 한계를 넘어 자유롭게 활동하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신통 (Siddhi, 싯디)을 나타낼 수 있다고도 합니다.
둘째, 그는 낮 동안에 닦은 환영의 몸을 밤의 ‘꿈 (Dream)’ 속에서도 유지하는 훈련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꿈의 요가 (Dream Yoga)’입니다. 그는 꿈속에서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자각하고, 꿈의 내용을 자유롭게 변형시키며, 꿈의 상태를 이용하여 환영의 몸을 더욱 견고하게 닦습니다. 꿈 자체가 환영임을 깨닫는 것은, 이 낮의 삶 또한 환영임을 깨닫는 훈련이 됩니다.
셋째,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는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죽음을 맞이할 때, 자신의 거친 몸과 마음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의식을 잃고 공포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강력한 업의 바람에 이끌려 중유(Bardo)의 혼란스러운 상태로 내던져집니다. 하지만 환영의 몸을 성취한 수행자는 다릅니다. 그는 이미 살아있을 때 완벽차제 수행을 통해 이 죽음의 과정을 수없이 연습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모든 거친 의식이 해체되고 마침내 ‘죽음의 정광명 (Clear Light of Death)’이 드러날 때, 공포에 빠지는 대신 그 빛을 명료하게 ‘알아봅니다’. 그는 그 빛과 하나가 되어 고요히 머무릅니다. 그리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의 힘으로, 자신이 이미 닦아온 그 환영의 몸을 타고 다시 의식적으로 현현합니다. 그는 더 이상 업력 (業力)에 이끌려 수동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몸 (환영의 몸)을 지닌 채 중생을 돕기 위해 의식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 환영의 몸이 바로 그가 부처의 보신 (Sambhogakāya)을 성취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환영의 몸을 닦는다’는 것은 금강승 수행의 가장 빛나는 성취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나는 중생이다’라는 불순한 환영 (우리의 육체)을 버리고, ‘나는 부처다’라는 청정한 환영 (환영의 몸)을 성취하는 가장 빠르고도 심오한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 몸 안의 가장 미묘한 에너지인 프라나를 다스려, 마음의 가장 깊은 본성인 정광명을 체험하고, 마침내 죽음의 공포마저도 깨달음의 기회로 변형시키는 위대한 연금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