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이 온라인 게임을 떠나는 것을 많이도 지켜봤다. 이직, 학업, 건강 등 다양한 개인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여직원인 경우는 가사, 육아, 남편의 온라인 게임 등 가족을 위한 경우가 추가된다.
임신과 육아의 벽은 온라인 게임의 유무와 상관없이 높지만, 온라인 게임과 병행하기에 힘에 부치거나 한쪽에만 집중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시기가 온다.
임신 후 의사의 절대 안정이라는 소견 앞에서 고민 없이 퇴사하는 동료도 보았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교육때문에 회사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의 온라인 게임 여성들이 스트레스를 더 받고 있다면 그건 아마도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사교육 때문일 탓이 크다. 아이의 학원 스케줄과 라이딩, 성적 관리는 엄마의 바카라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고 긴 결혼, 임신, 육아의 파도 속에 온라인 게임인으로 살아남고 50대 언저리에 오면 상대적으로 집에 손 이 덜 간다.
집안일이나 아이의 일 때문이 아니라 내 일정에 맞춰 휴가를 내는 호사도 누려보고 나쁘게 얘기하면 예전만큼의 열정이 없고 좋게 말하면 조금은 내려놓은 조직 생활이 이제 익숙하고 여유로워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정년퇴직이라는 이벤트가 더 이상 머나먼 일이 아니기에 지금 내가 다니는 온라인 게임이 전과 달리 소중하게 보인다. 이제야 회사 다니며 여유가 생기고 내 취미생활도 열심히 할 만하다. 회사에서의 나의 입지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저 하던 대로 성실히 회사에 다니는 게 편한 일상처럼 느껴진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시기에는 ‘어른들은 저렇게 회사를 오가면서 무슨 재미로 살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돈 벌려고 억지로 회사 다니는 어른은 되지 않을 것이다. 열정도 없으면서 월급 때문에 회사와 집을 오갈 뿐인 재미없는 어른이 될 바에야 박차고 나가서 내 열정과 꿈을 좇을 거야.’ 하는 치기 어린 결심을 했었다.
어지간히 굳은 결심이었던지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드라마에 나올 법한 성공 신화 속 회사원이 아닌 평범한 샐러리맨은 어린 나의 머릿속에서 그렇게도 따분한 느낌이었나보다.
2,30대에는 나는 몇 살까지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 제법 심각하게 미래를 점쳐보곤 했다. ‘이대로라면 3년도 버티기 힘들겠는데?’ 하고 불안하다가도 ‘좋아, 지금처럼만 가는 거야!’ 하고 안도하는 시절이 반복된다.
30대 초반에는 마흔 살이 넘어서도 회사에 다니는 내가 상상이 안 된다. 40살까지만 다니자 45살까지만 다니자 50살까지만 다니자 하는 머나먼 계획은 어느새 현실이 되고 그 미래의 나는 막상 되어보면 별다를 것도 없다. 심지어 예전의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며 일상을 흘려보내고 있음을 깨닫고 당혹감을 느끼기도 한다.
20대의 나에게 ‘너는 50살에도 이 회사에 다니게 돼.’라고 얘기해주면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한데 그게 무슨 저주 같은 말이냐!’라며 펄쩍 뛰겠지만 어느 새 시간이 흘러 50세까지 일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날은 오고야 만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나보다 선배들, 특히 동성의 선배들은 귀하고 귀하다. 2,3살 위라고 해봐야 인생의 경험이 얼마나 많겠냐만 숫자로 경계를 그어야 할 때는 한 살, 두 살의 차이가 크다.
임금피크제, 정년퇴직을 나보다 먼저 겪을 사람. 우리 팀에서 내가 제일 연장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주는 사람.
그 사람이 일을 잘해 나가면 내가 다 기분이 좋고, 그 사람이 조직에서 겉돌면 내가 다 속상하다. 그들을 통해 나의 미래를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덧 회사에서 나이가 많은 축이었기에 여전히 존재감을 뽐내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선배들을 마음 깊이 응원하곤 했다.
“어떻게 한 온라인 게임을 25년이나 다녔어요?” 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고, 물러나고, 다시 이어가는 선택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아이를 위해 멈췄고, 누군가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또 누군가는 스스로 시점을 정해 걸어 나왔다.
그 선택의 좋고 나쁨을 나눌 수는 없다. 다만, 포기하고 싶거나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느껴져도 어떻게든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또 다른 시기가 이어진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일들은 희미해진다.
어린 시절 그토록 시시하게만 보였던 ‘월급이 필요해서 출퇴근을 반복하는 재미없는 회사원’은 막상 해보니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대단하지는 않아도, 때로는 괴롭고 때로는 별로인 하루하루를 모두 모아서 돌아보면, 그 시절을 견뎌낸 내가 기특하고 또 조금이라도 잘 해낸 것들이 대견하다.
업계에서 이름 석 자를 새기거나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거듭하는 화려한 커리어는 아니다. 때로는 파도를 정면으로 맞아 정신을 못 차리기도 하고, 가끔은 파도에 올라타 내 등을 밀어주는 바람을 만끽하기도 했다.
좋거나 싫었던 그 모든 시절은 그 자체로 나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된다. 그 자부심만으로도 출퇴근을 반복하는 재미없는 회사원으로 살아온 가치가 있다.
어렸을 때는 40대, 50대까지 지긋지긋한 이 회사에 다니며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껴야 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 나이까지 일을 하고 있는 내 모습도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와 일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그런 시간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그리고 막상 어느 나이에 회사를 떠나더라도 마음 한편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퇴사를 앞두고 그 아쉬움 때문에 고민이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감정이야말로 내가 온라인 게임 생활을 잘 마무리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까지 일에 애정을 갖고 즐겁게 온라인 게임을 다녔기에 떠나는 순간이 아쉽게 느껴지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온라인 게임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그런 아쉬운 퇴사를 하기를 바란다. 내 젊음을 고스란히 묻어둔 회사를 떠나는 것이 아쉽기만 하고 그 시절이 끝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면 직업란에 ‘회사원’이라고 적어 왔던 시간들 역시 꽤 괜찮은 여정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