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저녁 맥주 한 잔의 유혹

by스텔라
그림 : taezin


⠀회식 자리에서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이었다. 분위기에 맞춰 잔을 들기는 했지만, 업무의 연장 같은 느낌이라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회식을 잘 하지 않던 온라인 게임의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집에서 맥주 한 잔을 즐기긴 했지만 온라인 게임인에게는 평일에 술을 먹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불문율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평일에는 술을 마실 이유가 없었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것만으로도 내 하루는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사람을 만나고, 일을 처리하고, 이런저런 신경을 쓰다 보면 ‘맥주 한잔하고 싶다.’거나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나지 않는다. 오로지, 그리고 간절하게 집에 가고 싶을 뿐이다.

집에 가는 것 자체가 온라인 게임인에게는 작지만 소중한 피로회복제이자 하루의 해방인 셈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순간에 비로소 오늘도 끝났다는 기분이 들고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를 보상받는다. 거창한 이벤트는 필요 없다.


 그런데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고 나니 집이라는 장소가 주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 외출이 잦기는 하지만 규칙적으로 출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보니 저녁에 집에 있거나 일을 마치고 돌아와도 하루가 끝났다거나, 집에 온 것만으로 보상을 받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되려 집은 내가 처리할 일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느낌이다. 부지런히 시간을 보낸 나의 낮과 하루의 피로를 해소하는 저녁이 명확히 단절되지 않고 기준이 애매하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거나 TV를 봐도 일과와 휴식의 경계점이 모호해서 피로함이 느껴진다.


오늘 하루 수고했으니 이제 좀 쉬자! 하는 기분이 제대로 들지 않는 것이 은근하면서도 꽤나 신경에 거슬린다.


 그 애매함을 시원하게 날려주는 것이 바로 맥주 한 잔이다. 냉장고를 열고 시원한 캔을 하나 꺼내는 순간, 하루가 마무리되는 느낌이 든다. 사실 간절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날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아니고, 맥주가 너무 먹고 싶은 것도 아니다.


 맥주만으로도 뿌리치기가 힘든데, 심지어 단짝 친구가 하나 더 생겼다. 바로 드라마다. 온라인 게임에 다닐 때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았다. 애초에 거실에 느긋하게 앉아 TV를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은 맥주 한 캔을 홀짝이며 드라마를 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가장 중요한 나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그간 드라마를 통 안 봤으니 봐야 할 것들은 끝도 없이 쌓여 있다. 과거에 바쁘게 살았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혼자 있는 낮에는 왜 드라마를 보지 않게 되었을까? 뜬금없게도 그 이유는 돌아가신 아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엄마 옆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아빠는 꼭 한마디 하셨다. “드라마는 은퇴를 한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려고 보는 거지. 학생들은 그 시간에 TV 보지 말고 나가서 운동을 해야 해.”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노래를 너도나도 부르던 새마을운동 시대를 살아오신 아빠이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당시에는 한 귀로 흘려보낸 잔소리였지만 어린 시절에 들은 부모님 말씀은 한 사람의 가치관에 생각보다 깊이 새겨지는 모양이다.


아직도 낮에 TV를 틀려면 ‘오늘 할 일을 모두 마쳤나?’ 하며 스스로를 점검하게 된다. 결국 아빠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나는 나가서 운동하는 젊은이는 못 되었어도, 은퇴하고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되었으니 말이다.


 얼마 전 한 유명인의 인터뷰를 보았다. 자기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한 40대 남성인데 야식으로는 데친 브로콜리를 먹는다는 것이다. 자극적인 음식이 당길 때는 따로 먹는 것이 있다기에 유심히 들어보니 브로콜리만으로 충족이 안 되면 탄산수를 마신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야 몸도 가볍고, 생활도 건강해질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동시에 ‘그래서 하루가 정리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를 애쓴 나에게 브로콜리 한 접시를 보상으로 준다는 것은 아무리 내 건강을 위한 일이라 해도 내 정신이 그다지 고마워할 것 같지 않다. 결국 나는 냉장고 안에 탄산수를 가볍게 패스하고 맥주를 꺼내고 있는 쪽이다.


 일주일에 한 번 재활용 분리수거장에 맥주캔을 우르르 쏟아버릴 때면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생각이 든다. 그나마 하루에 한 캔 정도니 다행일 뿐이다.


더 웃긴 건 몸의 변화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신경성 위염이 퇴사 이후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예전에는 커피 한 잔도 조심스러웠는데, 요즘은 맥주에 짭짤한 안주까지 더해도 별 탈이 없다. 온라인 게임인이 체질이라고 생각했는데 회사 생활이 내 몸에는 적잖이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었구나 싶다.


몸이 편안해지니 자연스럽게 먹는 양도 늘었고, 당연하게도 체중도 같이 늘었다. 옷이 살짝 타이트해졌을 때는 잠깐 당황했지만, 금세 생각을 바꿨다. ‘너무 마른 얼굴보다 적당히 살이 있는 쪽이 어려 보이는 법이지.’ 핑계 같지만, 생각보다 설득력이 있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결국 요즘의 나는 여러모로 나에게 관대해졌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생활의 리듬도 예전보다 훨씬 느슨하다. 퇴직을 하면 이렇게 되는 건가 싶어 씁슬하다가도, 어쩌면 이게 자연스러운 변화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은 회사라는 틀 안에서 스스로를 조절하며 살았다면, 지금은 그 틀이 없어진 만큼 스스로를 다루는 방식도 달라져야 하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 덜 엄격해지고,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위장이 편안해졌고, 밥도 잘 먹고, 살도 조금 붙었다. 여러모로 몸이 좋아진 건 사실이니까. 나이 들수록 얼굴에 살이 좀 있어야 보기 좋다는 말까지 보태면 더 완벽한 결론이 된다.


퇴직 이후에는 이런 식으로 나에게 조금 더 관대해지는 것이 생각보다 꽤 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매일의 맥주 한 잔이라는 길티 플레저가 운동을 하기 위한 유일한 동기부여라고 하면 너무 억지일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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