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인의 한 달은 1일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달력 첫 장을 넘기는 순간보다 더 명확한 기준이 따로 있다. 바로 월급날이다.
내 급여일은 매달 20일이었기 때문에 통장 잔고가 0이 되어도 불안하지 않은 날은 말일이 아닌 급여 하루 전인 19일이었다. 20일 오전에 입금 알림이 울려야 나의 한 달은 비로소 시작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달력에서 월급날이 갑자기 사라졌다. 월급날이 사라지자 한 달이 시작되는 날짜의 개념도 같이 흐릿해졌다. 처음에는 며칠쯤 헷갈리는 정도였다. “오늘이 19일인가, 20일인가?” 정도의 가벼운 혼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균열이 점점 커졌다. 날짜가 내 생활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퇴사 전에는 월급날을 중심으로 앞뒤가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급여일을 기준으로 카드값이 빠져나가도록 세팅해 두었고, 급여가 들어오면 아이 학원비를 결제하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것이 나의 패턴이었다 굳이 오늘이 며칠이지? 라던가 내가 이번 달 학원비 결제했던가? 하는 혼선은 절대 오지 않았다. 굳이 자동이체를 걸어놓지 않아도 급여가 입금되는 땅! 하는 신호음으로 나의 한 달 달리기는 시작된 셈이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어딘가 느슨하다. ‘이건 언제 결제되는 거였지? 이번 달에 이미 보냈나?’ 아차하면 날짜가 지나 있다. 친정 엄마의 용돈을 건너뛰거나 한참이나 늦게 보내면서도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다가 한참 후에 언니를 통해 전해듣고야 ‘내가 진짜 기준을 잃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지만, 그 사소한 어긋남이 신경 쓰이고 내가 허술한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아 약간의 무력감이 든다.
웃긴 건 그래도 급여일이었던 20일만 되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월급도 없고 특별히 달라질 일도 없는데 오랫동안 같은 리듬으로 살아온 흔적이 이렇게 남아 있는 모양이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달력에서 20일을 보면 행운의 날짜 같은 기분이 들고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날과 20일은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괜스레 은행 앱도 열어보고 싶다. 출금할 곳이 있으면 왠지 20일로 지정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사람이란 참 길들이기 쉬운 동물인지 모르겠다.
월 단위만 그런 게 아니다. 연말이 되면 괜히 연말정산 서류를 챙기고 싶고, 5월이 가까워지면 회사에서 해주던 건강검진을 해야 할 것 같다.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의 규칙에 맞춰 살아왔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달라진 점이라면 전에는 메일 회신이나 정해진 양식을 작성하는 것 만으로 해결했던 그런 일들을 이제는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직접 해야 한다는 점이다.
회사에 갈아 넣은 내 노력과 시간,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회사의 이익을 저울질하면 나의 월급은 참 적기도 하다며 동료들과 자조적인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한 발 떨어져 바라보니 회사 덕분에 귀찮은 일들을 생략하고 여러모로 편리하게 살아오기도 했다.
한 달을 살아갈 월급을 정확한 날짜에 입금해주고 건강보험이나 연금 따위도 자동으로 납부해준다. 때가 되면 ‘연말정산 진행하세요.’하고 메일도 보내주고 건강검진이나 독감백신까지도 매년 챙겨준다. 여름 휴가에 사용할 숙소도 신청할 수 있고 시어머님 칠순에는 ‘여사님 생신을 축하’하는 그럴싸한 화분을 보내줘서 온라인 게임 다니는 며느리의 어깨를 활짝 펴준다.
회사라는 틀 안에 있으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삶이 일정한 간격으로 정리됐다. 그런데 지금은 그 틀이 없다.
퇴사 직후에는 그것들이 버겁게 느껴졌다. 자잘하게 챙길 일들이 많아졌고 그것들을 챙기기에는 나의 일상이 너무도 느슨했기에 결국 새로운 규칙들이 필요했다. 날짜 대신 요일에 리듬을 얹는 방식도 도움이 되었다. 일주일에 몇 번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간다. 아이에 관한 일이나 내가 준비 중인 것들, 하다못해 연휴에 놀러 갈 계획까지도 조용히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다.
가끔은 남편의 출근 길에 따라 나서서 남편 온라인 게임 근처의 카페에 앉아 일상을 정리한다. 평일 오전의 오피스 거리는 적당히 분주하면서도 묘하게 여유가 있어서 그 풍경 속에 앉아 있으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한결 가벼워진다.
달력에서 월급날을 지우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그래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회사 중심으로 짜여 있던 시간표를 하나씩 덜어내고, 그 자리에 나만의 기준을 얹는 중이다.
완전히 새로운 달력을 만들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다. 다만 한 달에 한 번, 일주일에 하루쯤 잠깐 멈춰서 나를 점검하는 시간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렇게 나의 한 달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조금 느슨하지만 그만큼 오래 가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