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와 약속이 있을 때 한 시간 정도 먼저 카페에 간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멀리 외출할 일이 있으면 은근히 기대감이 차오른다. 남편이 출장을 간다고 하면 살짝 설레기까지 한다.
출근할 온라인 게임이 없어졌으니까 당연히 낮에 혼자 집에 있는데도 꽤 자주 혼자 있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인다.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이 기분의 정체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1. 먼저 출퇴근 시간이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기동성이 필요하던 차에 회사에서 주차 지원을 해주었다. 운전을 좋아하지 않아 마뜩잖게 시작한 자차 출근이었으나 그 장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던 시절에는 당연히 집에 도착해서야 퇴근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차를 가지고 다닌 후로는 회사 지하 주차장에 내려와 차에 타는 순간부터 퇴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자동차 안이지만 출퇴근 통합 한 시간 반 정도는 분명 고요하고도 익숙한 사적인 공간이 보장되었던 셈이다. 그 공간에서 나는 구독 중인 팟캐스트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DJ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끔은 퇴근길 정체에 꼼짝 못 하고 발을 동동 굴렀을지라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 시간이 싫지 않았다.
2. 업무 시간은 어떠한가.
회사는 분명 공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25년간 회사 생활을 했던 사무실이라는 공간과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팀원이라는 사람들은 공과 사가 모호한 영역에 속하게 된다.
업무에 집중을 하거나 잠깐 짬을 내어 커피를 한 잔 하는 것도 나의 계획하에 진행된다. 점심시간에 혼자 남아 여행 계획을 짜거나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기도 한다. 회사는 분명 공적인 공간이지만 묘하게 사적인 공간이며, 그 어디에서보다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이가 아직 어린 남자 직원들은 때때로 퇴근 후까지 회사에서 노닥노닥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비록 혼자서 아이와 씨름하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면 남 일 같지 않아서 얄미운 마음이 들었지만 회사라는 곳이 어느 순간에는 집보다도 편할 수 있는 곳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나도 가끔 업무 이후에 회사에 남아 간단히 저녁을 먹고 개인적인 일을 정리하곤 했는데 오롯이 나에게 집중한 후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면 왠지 모를 차분함과 만족감이 느껴졌다.
3. 퇴사 후 집에 있는 시간을 살펴본다.
운동이나 취미, 자기 계발을 위해 외출을 할 때는 아이가 학교에 있는 시간을 택한다. 오전에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남편이 출근하고 간단한 정리를 하고 나면 로봇청소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느새 로봇청소기 예약 시간인 12시다. 늦어도 12시 전에는 나가야 아이 하교 시간에 맞춰 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으니 허겁지겁 밖으로 나간다.
외출을 하지 않는 날은 고양이 밥을 주거나 모래 화장실을 치워준다. 제때 모래를 치워주지 않았다가 아무데나 소변을 보는 낭패를 당했던 바다. 아이 방에 널부러진 옷을 정리하고 인스타에서 눈여겨본 요거트 따위도 만들다 보면 혼자 있어도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내가 상상했던 퇴직 후의 일상과 달리 편하게 소파에 몸을 묻고 재미있다고 소문난 드라마 한 편 볼 시간이 나지 않는다. 3시 30분에 아이가 오면 상황은 더해진다. “엄마 맛있는 거 만들어줘”, “내 검정 후드티 빨았어?”, “국어 선생님이 이 바카라 내일까지 사 오라고 하셨어.”처럼 크고 작은 아이의 시중을 들게 된다.
심지어, 학원 가기 전까지 아이와 같이 있을 수 있는 그 짧은 시간에 뭐 더 해드릴 게 없는지 하고 아이 방 문 앞을 서성이기도 한다. 급기야 아이로부터 “혼자 있게 좀 나가.”라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무례한 요구를 듣는 일도 허다하다.
4. TV나 넷플릭스를 볼 때를 생각해 보자.
회사에 다닐 때는 당연하게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선택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나는 평일 낮에 보지 뭐.’ 하면서 남편에게 리모컨을 양보하게 된다.
주말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을 때도 내일 출근할 사람이 피곤하지 않을지 조금은 의식한다.
5. 평일의 낮 시간을 생각해 본다.
회사에서 사적인 전화가 오면 당연한 듯 “업무 중입니다.” 하며 통화를 거절한다. 그러나 백수의 낮 시간은 친구의 수다나, 친정엄마로부터의 안부, 가스 검침이나 정수기 AS 등을 피할 도리가 없다. 이런 자잘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온라인 게임을 다니던 시절에는 보장되어 있었던 혼자만의 시간들이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회사를 그만둠으로써 내 개인 시간이 사라졌다고 인식하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번 주는 은행 일을 처리해야 하니 내내 바쁘네, 지난달에 신청한 8주짜리 강좌만 끝나면 좀 한가해지겠지, 이번 가족 여행을 가려면 계획도 짜고 가방도 꾸리고 아이 학원 일정도 조정해야지 하며 내 개인에 집중할 시간은 다음 주, 다음 달, 여행이 끝나면 오리라 연거푸 기대를 하지만 나의 티 나지 않는 분주함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내가 왜 이렇게 나만의 시간에 목마른지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집은 가장 편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이의 엄마, 집의 관리자, 누구의 아내로서의 잡다한 일들이 끊이지 않는 공간이며 정작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는 가장 어려운 곳이기도 했다.
요즘은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가거나 집 앞 도서관으로 가는 일이 많아졌다. 전에는 평일 낮에 바카라이나 노트북을 보는 어르신을 보면 ‘와~ 대학 교수님이신가? 아니면 중차대한 일을 결정해야 하는 기업의 임원? 혹은 심심한데 친구랑 약속 잡기는 귀찮아서 사람 구경하러 나오신 건가?’ 하는 다채로운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집에 있어 보니 그런 생각들은 대부분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분들은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을 벗어나 공적인 장소로 나와야지만 비로소 스스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때만이 채워지는 마음속의 허기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노트북을 들고 집을 나선다.
혼자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로소 나 자신과 함께 있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