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낮의 공기

by스텔라

⠀신경성 위염이 있어서 커피를 최대한 자제했다. 주로 두통이나 급체 또는 고혈압과 관련해서 회사 앞 병원을 찾곤 했는데, 의사에게 높은 확률로 들었던 말이 “커피 마시지 마세요.”였다.


사실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생이 돼서 갈 곳이 없거나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해서 카페를 갔다. 오죽하면 카페 죽순이, 죽돌이라는 말까지 생겼겠나? 하지만 정작 커피 맛은 잘 몰랐다. 달달한 봉지커피라면 모르겠지만 블랙커피는 어떤 포인트로 즐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KakaoTalk_20260824_184605478.jpg그림 : taezin


 커피의 진가는 내가 온라인 게임인이 돼서야 드디어 알게 된다. 초년생일 때는 아직 괜찮다. 상사의 진한 뒷담화나 사내의 핫한 소식을 공유할 안주거리였던 커피는 1년, 2년 연차가 쌓이다 보면 나른한 오전의 유일한 도파민이자 무거운 몸을 움직일 유일한 연료가 된다. 오후의 찐득한 공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커피 한 잔은 필수다.


과도한 카페인에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사르르 속이 쓰려올 때면 ‘내 몸에 잘 받지도 않는 커피, 회사만 안 다녔다면 마실 일도 없는데 이놈의 회사를 그만둬야 커피를 끊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퇴사를 한 후 가장 설레면서도 걱정스러운 시간은 평일의 낮이다. 12시까지는 제법 바쁘다. 아이를 두드려 깨워 학교에 보내고 시계를 보면 9시. 출근이 규칙적이지 않은 남편은 그보다 늦게 집을 나서기도 한다.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내 퇴직연금은 일을 잘하고 있나, 주식은 빨갛나 파랗나, 비트코인은 얼마나 떨어졌나, 지난밤 지구 안팎은 별일 없었나 확인하고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12시다. 선 채로 간단히 챙겨 먹은 점심 밥그릇을 개수대에 던져 놓고 나서야 조금 여유가 생긴다.


 ‘이제 좀 쉬자.’ 하는 말이 절로 나오면서 소파에 앉으면 오늘 일어나서 처음 소파에 앉았네 하는 생각에 조금은 억울하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후 주부 모드로 돌입하기 전에 좀 재미나게 쉬고 싶은데 잠이 솔솔 몰려온다. 달달한 주전부리, 그리고 커피 한 잔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커피야말로 온라인 게임인이 아닌 백수의 벗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를 지켜보는 이도 없고 정해진 일의 기한도 없다. 그래도 자잘한 할 일이 있고 오늘까지 해야지 하는 나와의 약속들도 있다. 내일 하지 뭐~ 하고 미루면 끝도 없음을 안다. 그렇게 조금씩 미루다 보면 결국 나와의 약속 따위는 헤진 걸레처럼 구석에 처박아두고 게으른 백수가 될까 봐 경계심이 든다. 소파에 벌렁 눕고 싶은 나를 채찍질할 무엇, 나른한 오후를 깨워줄 무엇, 오전의 자잘한 일들에서 나를 분리시켜줄 무엇. 바로 커피와 달달한 간식이 등장할 타이밍이다.


 회사에서는 ‘줄여야 하는 걸 알지만…’ 하며 약간의 죄바카라감과 함께 커피 한 잔을 뽑아 들었다면, 백수가 된 이후에는 ‘아싸, 커피 한 잔 해야지.’ 하며 그 시간을 제법 즐기게 됐다는 것이 커피를 대하는 가장 큰 변화라면 변화다.


참 신기하게도 퇴사하고 나서 마시는 커피는 예전처럼 속이 쓰리지 않다. 예전엔 한 모금만 넘어가도 위장이 찌르르한 느낌이 들어서, “아, 내 위장은 왜 이리도 예민할까?” 하고 한탄을 했는데 퇴사 후에는 커피를 마셔도, 밥을 먹은 직후 벌렁 누워 있어도 내 위장은 평온하기만 하다. 그동안의 고생은 뭐였지? 싶어 제법 배신감이 느껴진다.


마음이 느슨해져서인지, 아니면 퇴사와 함께 은근슬쩍 붙은 뱃살이 위장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고질적이었던 신경성 위염의 원인은 내 위가 예민해서가 아닌 회사 생활의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는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전보다 훨씬 덜 비장하다. 그 또한 퇴사의 효과라면 나쁘지 않은 변화가 아닌가 싶다.

작가의 이전글퇴사 실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