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실감
퇴직을 결정하고 난 후의 회사 생활은 의외로 바쁘다.
공중화장실에 붙어 있는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라는 문구는 퇴직에도 적용된다. 뒷사람이 깜짝 놀랄 일은 없도록 물도 잘 내리고, 휴지가 적당히 남아있는지, 불쾌한 냄새가 나지는 않는지 세심히 돌아본다.
내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매너 있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다. 특히 내 뒤에 들어올 사람이 나를 잘 알고 있을 때는 마음이 조금 더 절실해진다.
⠀아무리 건강한 조직이라도 뒷말이 없을 수는 없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고 인수인계도 꼼꼼히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 외에도 나의 사생활과 온라인 게임생활이 뒤범벅되어 있는 사무용 PC를 정리하는 것도 큰일이다.
이 프로젝트 정말 힘들었지. 이 PPT는 꼭 가져가야 해. 이 데이터도 중요하지, 이 매뉴얼도 필요하겠는걸? 이건 대외비니까 삭제해야겠지? 여러 생각을 하며 파일을 하나하나 삭제하거나 보관한다.
폴더를 뒤지다 보면 나오는 유물 같은 사진이나 업무 팁으로 정리해 둔 문서, 업체와 동료들의 연락처 등 25년의 온라인 게임생활을 최대한 간결하게 압축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재직증명서나 연봉 기록표 같은 문서도 왠지 필요할 것 같아 따로 추려본다.
⠀회사에서 요청하는 기본 문서들도 많다. 자의로 퇴사를 한다는 사실도 기록으로 남기고 이런저런 서약들도 해야 한다. 또 이놈의 퇴직금은 퇴사할 때 두둑하게 꿰차고 나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알면 알수록 만만치가 않다. 55세 이전에 퇴직금을 타려면 높은 세율이 적용된다.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봐도 초등학교 운동회의 사탕 따먹기 게임처럼 약만 오른 채 나의 패배다. 얼굴에 밀가루를 범벅하고 씩씩대봤자 별 수가 없다. 결국은 훗날을 기약하며 증권사를 통해 좋은 상품에 묻어 놓는 것이 제일 속 편하다.
⠀⠀그뿐이랴, ‘이메일 주소를 확인해 주세요’ 따위의 자동 회신을 받는 번거로움이 없도록 나와 연락을 주고받던 혹은 주고받을 사람들에게 후임자의 연락처를 적어서 돌려야 한다. 그간의 고마움을 담은 담백한 인사도 곁들인다.
후임자의 연락처만 보낼지 감사 인사를 같이 쓸지를 정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지만 그와 나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감정의 소모다.
그리 넓은 인간관계도 아니었건만 좋으면 좋았던 대로, 소원하면 소원했던 대로 점심이나 커피 한 잔 하는 자리도 꽤나 많다.
⠀이런 수고로운 일을 처리하다 보면 어느덧 퇴직일이 다가온다. 처음엔 퇴직 결정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쏟기 일쑤였지만 정작 퇴직일이 다가오면 “이제 백수예요. 밥 얻어먹으러 올게요.” 하며 너스레를 떨 수 있을 만큼 ‘퇴직’이라는 단어가 오랜 친구처럼 익숙해진다.
⠀퇴직 당일의 저녁은 슬픔이나 불안함보다는 자질구레한 퇴사 준비를 무사히 끝냈다는 후련함, 그리고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뒤범벅된다.
퇴사 당일 늦은 밤, 식구들이 잠든 후 거실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던 내가 아직도 생각난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을 정의하는 것은 아직도 어렵다. 은퇴 경기를 마친 2014년 소치에서 김연아의 밤이 이랬을까? 화려한 업적에 비할 수는 없지만 복잡한 세월을 무사히 마무리했다는 묘한 안도감과 이렇게 끝나는 거구나 하는 허탈한 비애감만은 퀸연아 님도 조금은 공감해 주지 않을까 싶다.
⠀오늘부터 백수 1일이지만 숨 돌릴 틈은 없다. 한가하면 우울해질까 하는 우려 5%와 퇴직 후에도 자유와 커리어를 모두 잃지 말아야지 하는 의욕 95%로 전투력이 최고인 시기가 바로 이때다. 백수가 된 것을 기념하는 길고 짧은 여행, 퇴사라는 빅 이슈를 공유하는 크고 작은 만남, 그리고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신청해 둔 쓸모가 있거나 혹은 없는 교육들로 퇴사 직후는 생각보다 바쁘게 흘러간다.
퇴직연금을 운용하기 위해 증권사에서 주최하는 세미나도 참석하고, 같이 퇴사한 동료들이 있다면 오늘 하루 잘들 지내셨는지 단톡방과 개인톡방을 통해 생존 신고를 나눈다.
낯선 실업자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입문자답게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실업급여 신청 따위의 일들이 무수히도 많다. 따박따박 급여에서 빠져나가기만 하고 실체는 확인한 적 없는 국민연금공단이나 국민건강보험공단 에서도 귀신같이 연락이 온다.
⠀그러나 퇴직해도 뭐 별거 없네. 이 정도면 나 퇴직 잘한 듯? 하고 마음을 탁! 하고 놓았을 때 퇴직의 실감은 허를 찌르듯 밀려온다.
미리 해제해 둔 출근 시간 기상 알람은 잘 피해냈지만 매주 월요일 오후 3시, 화요일 오전 10시에 맞춰둔 정기 회의 알람. 1년의 어느 날 울려서 한참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캘린더 앱에 저장된 창립 기념 휴무일과 노조 창립 기념일, 이게 뭐지? 하고 열어봤다가 불의의 일격에 당황하는 짓궂은 15주년 근속 기념패는 퇴직자의 평온한 마음에 돌을 던진다.
뿐만아니라 1년마다 해오던 프로젝트를 개시할 시점이 되면 심장 깊은 데서 꿈틀꿈틀 어떤 느낌이 든다. 조금은 그립고 궁금하면서도 어떻게 그러고 살았지? 하고 과거의 나 자신이 신기하다.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할 때는 부족함만 보이고 그렇게 오래 일했는데 또 이런 실수를 했어? 라며 나를 바카라망하기 일쑤였는데 한 발 떠나서 보면 그런 어려운 일들을 내가 해냈구나 하고 뿌듯하고 대견하다.⠀
퇴직의 실감은 아직도 예상치 못한 시점에 내 허를 찌른다. 그 실감이 언제나 좋은 추억과 같이 밀려왔으면 한다.
강원도의 어느 길을 지나면서 “여기 워크숍 왔을 때 팀장들이 싸우고 난리였지. 휴게소에서 같이 우동 나눠 먹는 걸 남북 정상회담 생중계 보듯이 지켜보고 다들 몰래 웃었는데.” 하거나, 눈이 펑펑 내리는 늦은 오후 “와~ 우리 회사 인사팀. 이 정도면 조기 퇴근 공지 냈겠지? 다들 서둘러 PC 끄고 신났겠네?” 하면서 집 앞 마트에 장을 보러 가서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도 내 마음 한켠이 내내 따뜻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직은 퇴직 초짜인 나의 작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