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타 지우기(8)

단편소설

by김진광

K의 가이드이자 스승의 이야기는 이후로도 계속되었지만, 충직한 필경사는 K의 양해를 얻어 지면 관계상 이하 생략하고자 한다. 스승의 이야기는 K에게 순식간에 전달되었지만, 지구의 인간들에게는 만연체로 늘어지고 지루하다 못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것이 뻔했다.


K는 지상의 삶에 각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답변을 강요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여유를 부릴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스승도 K 자신도 잘 모르는 것이기도 했다. 영혼 상태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레테의 강을 먼저 지나온 입장에서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승의 말씀을 통해 K에게 한 가지 역할은 분명해졌다. 죽음 앞에서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는 육신들에게, 죽음의 연습이 곧 새로운 생명의 연습임을 알리고 좀 더 의연하고 담담해지도록 돕는 일이다. 영겁의 함정에 빠질지 모를 영혼들을 위해, 지옥의 여정을 단축하고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는 일이다. 미심쩍은 성직자나 의사 외에도 믿을 만한 가이드가 한 명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나름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마기스테르 디킷).


지상의 전문가들은 가이드가 주관하는 일을 ‘임사체험’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열심히 관찰하고 논쟁할 것이다. 그들은 사라진 매머드의 그림을 재현하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아닌 것을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시도에는 한계가 있다. 과학의 본질적 한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유인력과 에너지 보존을 부인하고, 엔트로피 균형과 자연선택을 단념하라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내려놓으라는 말에 다름아니다. 쉽게 포기할 수 없을 일이다. 이는 이 땅의 성직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마침내 고통의 끝은 해피엔딩이었다. 감정 기억이 지워지고 숨어 있던 에너지가 증발하면서 K는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비로소 자유로운 영혼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영혼들과 마찬가지로 K는 지상의 기억 중 몇 가지는 그대로 가져가기를 원했다. 저 세상에서도 기억하고 속죄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혼의 마을에 이사하면서 K의 역할은 더욱 분명해졌다. 세타(θ) 지우기 작업을 통해 그의 영혼은 평안해졌다. 새로운 언어를 장착하고 먼저 온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며 더 많이 행복해졌다. 그는 빅뱅의 현장을 찾아가보기도 하고, 광활한 우주에서 블랙홀을 탐사하기도 했다. 캠브리아기로 건너가 생명체가 다양하게 분기하는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았으며, 한반도 남해안에서 공룡의 마지막 울음에 증인으로 참관하였다. 그리고 고인돌 인류와 눈물로 작별 인사를 나누기도 하였다. 시간과 공간의 좌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시기와 질투, 수치와 탐욕이 사라진 곳에서 느끼는 자유와 평화는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예기치 못한 기쁨이었다(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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