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를 청소하는 데 몇 겁이 소요된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청소를 다 끝내지 못한 사람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다음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여전히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려야 하겠지요. 천상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운행하려는데 쓰레기통을 들고 갈 수는 없습니다."
가이드는 말을 이어갔다.
“예외가 있습니다. 감정 기억 중 꼭 가져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이드와 상담을 거쳐 가져갈 수 있습니다. 청소하는 과정에서 그때그때 요청하면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법 긴 영화를 감상하면서, 당신이 남긴 인생의 잔재를 스스로 청소하기 바랍니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청소하기 쉽도록 내가 미리 목록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파노라마 극장은 클릭 몇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러기에는 살아 온 삶이 너무 길었다. 훗날 K는 필경사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경험을 일일이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고 하였다. 한사코 두번 다시 재생되어서는 안 되는 기억들도 있었다. 지옥을 두 번 다녀올 수는 없었다. 여기서 필경사(Scribe)라 함은 천상계의 K와 텔레파시로 소통하는 지상의 파트너를 말한다.
다만 지상의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의미에서 개략적인 내용만은 알리기로 했다. 단언컨대 그것은 일회성 화생방 훈련이 아니었다. 미처 기억하지 못하던 시절부터 죽음 직전까지 K를 당혹스럽게 만든 사건들이 천천히,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조절할 수 없는 초저속 리얼리즘 앞에서 K는 창피함, 죄바카라감, 무력함, 비겁함, 열패감, 비참함에 몸부림쳤다. 장면 하나하나가 사차원으로 펼쳐지며, 한 인간의 밑바닥이 통째로 드러나 만인 앞에 발가벗겨지는 듯한 심판이 있었다.
내가 나를 심판하라는 무언의 외침 속에, 나로 인해 고통과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의 심정이 날것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와 강둑에서 장난을 치며 놀다가 심술이 나, 친구를 아래로 밀어서 물에 빠트린 장면이 그 친구의 마음이 되어 생생하게 다가왔다. 용서를 구하는 마음 외에는 어떤 변명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사기와 위선, 배신과 멸시의 현장이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 힘들게 한 전과 기록이 낱낱이 드러날 때마다 K는 단테가 이야기한 말레볼제와 코키투스의 지옥을 경험하였다. 수십 가지는 됨직한 리얼리즘의 현장에서 K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시간이었다. 어떤 장면은 마감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백년 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