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타 지우기(4)

단편소설

by김진광

K를 진지하게 만드는 사건은 따로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7월 23일이었다. 바카라을 읽고 있는 지금은 7월 24일, 정확히 말하면 어제부터 오늘 새벽까지 일련의 사건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다시 태어나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영국군이 독일군과 대치하는 전선에 집중 포격을 하기로 계획한 날과 같은 날, K는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다. 독일군 스파이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영국군 진지가 노출되고, 불가피하게 포격 일자는 연기된다. 팀원이 만든 자료가 신문에 크게 실리고, K는 자신의 생일날 ‘미역국’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족과의 식사 약속이 취소되고, 상무에게서 바카라 한 권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7월 24일 새벽, K는 그 바카라을 읽고 있다. 1916년의 오늘과 21세기의 오늘이 양자역학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이 중에서 어느 하나의 사건이 삐끗했으면 K는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약 10년 후, K는 자택에서 잠든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였다. 가족들은 뒤늦게 K를 발견하고 119에 연락하여 구급차가 출동했다. 심장과 폐, 뇌가 거의 기능을 소실한 상태였으나, K의 시신은 구급차 안에서 심폐소생술과 자동심장충격기의 압박을 수차례 받아 갈비뼈가 골절된 채 응급실로 실려왔다. 급히 새우잠에서 깨어난 의사는 몇 가지 정황을 확인한 뒤 DOA(병원 도착 전 사망) 판정을 내렸다. 사망진단서가 작성되자 K의 시신은 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지고 일사천리로 장례 절차가 진행되었다. 사흘 뒤, 시신은 화장장을 거쳐 유골은 가족들이 다니는 교회 동산 한켠에 자연장으로 묻혔다.


여기에 1차 대전의 반전 계기가 될 어느 날이 공식적인 문서상으로는 폭우로 며칠 연기된 사연을 주제로 한 소설이 있다. 그날로부터 백여 년이 지난 오늘, 그 소설에 나온 일자와 같은 날에, 전날이 생일인 누군가에 의해 그 소설이 다시 읽히는 흐름은 과연 단순한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것일까. 지금부터 이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K에게 심장마비가 일어나던 새벽, 그는 의학적 사망 판정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지나온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경험을 하였다. 소위 임종이라 불리는 그 순간은 지상에서는 단 몇 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겠지만, K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동공은 남은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려는 듯 빠르게 움직였다. 시간과 공간의 좌표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공간은 사라지고 시간은 휘어지고 중첩되었다. 중력과 에너지의 법칙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K는 포근하고 따뜻함을 느꼈다.


그때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곁에 있음을 감지했다. 이어서 들려온 소리는 오감을 거치지 않고 멀리서 울려오는 듯했다. 알아듣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잘 압니다. 나는 당신을 천상으로 안내하는 가이드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모든 게 잘 될 것입니다. 편안히 내 안내를 따르면 됩니다. 먼저 천상에 가기 전에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정리할 시간은 짧을 수도 있고 무척 길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오기 전에 당신의 기억 저장 장치를 살펴 본 결과, 몇 가지 강도 높은 기억들이 있음에도 정리 작업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끝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축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감정 기억을 정리하는데 몇 겁의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흔히들 지옥 여행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지상의 감정 기억을 청소하고 정리하기 전에는 천상에 갈 수 없습니다. 너무 많아서 다 정리하지 못하면 육신을 입고 지상에 한 번 더 갔다 와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K는 파노라마의 모든 내용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다. 이미 사라진 기억들이다. 어떤 기억은 클릭 한 번에 간단히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저배속의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당시 상황이 사면 거울에 비친 입체 형태로 나타나면서 괴로움과 고통을 동반하였다. 여기서는 한 가지 예시만 들기로 하겠다. 바로 10여 년 전 K가 인터넷 공간에 남겼다가 곧 후회하며 지운 댓글 더미가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K는 당황해 하며 가이드에게 물었다.


“이것들은 제가 생전에 모두 지워버린 것들인데, 어떻게 된 겁니까?”


가이드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인터넷 공간에 남긴 흔적은 컴퓨터나 클라우드에서 지운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남긴 흔적에 숨어 있는 에너지는 분리되어 우주 팽창을 위한 암흑물질로 쓰이지만, 감정 기억은 우주 기억 장치에 보관되어 당신이 육신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남아 있습니다. 지금 그것들을 정리하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당신은 육체와 온전히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에 필요한 시간은 무한대로 연장될 것입니다. 청소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본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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