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당신만 나라 걱정을 하는 듯이 말하는 것은 과대망상이야. 더구나 의견이 다르다고 남의 부모를 소환해 미역국까지 들먹이는 건 지나친 짓이지, 그렇지?”
나름 점잖은 어투였다. 옛날 하이텔 시절 댓글놀이와 채팅에 열심이었던 경험이 있지만, 씁쓸했던 기억이 많았다. 이해관계로 모인 집단은 어떤 형태로든 사단이 나기 마련이다. 온라인 게임생활을 시작하면서 욕설을 하지 않고 살다 보니 뉴스를 보더라도 댓글은 거의 보지 않았다.
비교적 온건하게 댓글을 썼다고 생각하며 다른 뉴스를 서핑하다가, 조금 전 뉴스로 돌아와 댓글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니 단 하나의 단어가 박혀 있었다.
“빨갱이!”
다짜고짜 맥락 없이 툭 던진 단어 하나로 끝이었다. ‘빨갱이’라는 단어에 숨어 있는 역사와 함의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편도체에 충격이 접수되었다. 충격의 정체는 그 흔한 단어를 떠올리게 한 익명의 무례함에 대한 분노라기보다, 그런 한심한 글에 반응하고 있는 K 자신의 천박한 호기심에 관한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지금 뭐 하자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K는 후회가 막심하여 즉시 댓글을 지우고 건물 밖으로 나와 한참 동안 공원을 거닐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예전에 올린 글들이 없는지 하나하나 꼼꼼히 검색하고 모두 삭제했다. 무심코 가입했던 사이트를 찾아 곧바로 탈퇴했다.
퇴근 무렵, 상무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오늘 K의 팀이 큰일을 해냈으니 저녁이나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부장과 K는 의례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상무가 자기 방으로 돌아간 뒤 팀원들에게 넌지시 의사를 물어보았으나, 하나같이 모두 약속이 있다고 하였다. 요즘 세대는 예고 없는 일방적 약속에 익숙하지 않다.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 세대의 이런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생각한다.
실은 K도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오늘이 그의 생일이어서 모처럼 가족과 함께 밖에서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나 상무와 부장이 단둘이 식사하는 장면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K마저 자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불경의 죄에 해당했다.
K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불가피한 사정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 대신 몇 가지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아내에게는 브랜드 가방을, 아들에게는 신형 노트북을 약속했다. 오늘 상무와의 저녁은 아무래도 비싼 저녁이 될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세 사람은 저녁을 함께하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평소 독서를 즐기는 상무가 남미 출신 작가를 소개하며 그 사람 소설이 아주 특이하다고 말했다. 마침 그 바카라을 가지고 있다며 가방에서 꺼내 K에게 건넸다.
K도 한때는 독서를 즐기던 시절이 있었지만, 온라인 게임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순수 문학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래였다. 회사 일과 무관한 바카라을 읽는 것은 월급쟁이 가장에게는 한가한 일이고, 직무 유기라는 믿음이 자리 잡았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잠시 후 술이 확 깨는 일이 벌어졌다. 상무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내일 관계 인사들을 만날 일이 있다고 운을 띄우며, 오늘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요약하고 K가 생각하는 정바카라 대안을 추가한 보고서를 아침까지 제출해 달라는 것이다. K는 잘 알겠다고 대답했다.
대리운전으로 집에 돌아 온 K는 급히 샤워를 하고 술을 깨운 뒤 곧바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새벽 3시쯤 마무리하고 잠시 눈을 붙이려 했으나, 생체 리듬이 깨져서인지 잠이 도통 오지 않았다.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문득 어제 상무가 준 바카라이 떠올랐다.
단편소설집이었다. 그는 우선 아무 제목이나 한 편 골라 읽었다. 현실과 허구를 오가며 문헌학을 빙자한 장난기가 짙어, 읽어 내려가기가 무척 부담스러웠다. 문체가 원래 그런 것인지, 번역이 서투른 것인지, 독자를 모독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행히 분량은 길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남아 하나 더 읽어 내려갔다. 소설은 유럽 전쟁사의 사료 일부를 인용하며 시작되었다. 1차 대전 초기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영국군이 전세를 뒤집기 위해 대규모 반격을 준비했다. 디데이를 1916년 7월 24일로 잡았으나 폭우로 인해 며칠 연기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반격 일자가 연기된 것이 과연 폭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공개하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의문은 상상을 낳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반격 작전을 연기한 배경에는 중국계 독일군 스파이가 얽힌 기상천외한 살인 사건이 개입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바카라에서 확인하는 편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