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리뷰 시리즈(5)

1막 3장~5장 2부

byJuncus

안녕하세요, 준쿠스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리뷰 시리즈 중 1막 3장~5장 부분에 대한 리뷰 및 해설에 대한 2부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1부에는 이 장들이 벌어지는 공간적인 배경이 리어의 장녀인 올버니 공작부인, 거너릴의 집이라는 것과 주요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관계에 대한 보충 및 추가 설명, 그리고 새로운 등장인물인 오스왈드와 광대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지요. 그럼, 이번 2부에서는 해당 장들의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막 1장에서 리어는 코딜리어를 거의 내쫓다시피 프랑스로 시집을 보내버리고, 자신의 왕국을 두 갈래로 분할해서 남은 두 딸, 거너릴과 리이건에게 나눠주었지요. 그리고는 자신은 ‘왕(The king)’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유지하며, 말년을 두 딸의 집을 오가며, 그들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평온하게 보낼 생각을 합니다. 즉, 왕으로서의 현역에서는 은퇴하지만, 왕노릇은 계속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기가 막힐 정도로 어리석은 착각이자 오판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으로서의 모든 권리, 즉, 왕국의 주인으로서의 법률적 권한들(“both of rule”) 및 국토에 대한 영유권(“interest of territory”)과 이에 따르는 의무, 즉 정무의 번거로움(“cares of state”)를 스스로의 의지로 벗어버렸으니(“We will divest.......”)까요. 거너릴과 리이건이 악인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리어로 하여금 이런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 적은 없습니다. 애초에 이 모든 전도적인 판은 리어 자신이 깐 것입니다.


비극의 전형(archetype)이라고 할 수 있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보면, 자신의 친부를 죽이고, 자신의 친모와 결혼을 하는,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그의 오만한 무지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는 당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보이는 선택을 했을 뿐이었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가장 현명하다고 여겨지던 선택들은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선택들이었다는 게 드러나지요. 즉, 이 경우의 모든 전도적인 판은 오이디푸스 본인이 깐 게 아닌, ‘처음부터 깔려진 채로 운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바카라임은 리어의 경우와는 달리, 온전히 오이디푸스에게만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핑크스가 던지는 수수께끼를 간단히 풀어버릴 만큼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여겨진 자일 지라도 정작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완전히 까막눈일 수밖에 없다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실존적인 한계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렇기에 오이디푸스는 모든 파국이 드러난 후, 완전한 절망 속에서 스스로 두 눈을 멀게 해서 ‘진짜 장님’이 되어버립니다. 매우 상징적인 행위인 것이지요.


이 ‘장님’ 모티프는 글로스터 백작을 통해 이 작품 내에서 오마주 비슷하게 다시 쓰입니다. 하지만 이는 해당 장면이 나오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할게요. 아무튼 제가 이 지점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리어와의 대조를 위해서입니다. 오이디푸스도 리어도 둘 다 고결한 신분을 타고난 자들입니다. 즉, 왕이지요. 그리고 이 둘의 선택이 이 두 인물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는 점도 똑같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차이는, 오이디푸스의 경우는 그 선택이 말 그대로 실존적 한계에서 비롯된 무지(그는 정말로 자신이 죽인 그 노인이 자신의 아버지인 줄을 몰랐고, 도탄에 빠진 테베를 구한 후 영웅이 되어, 과부가 된 그 나라의 왕비와 결혼을 했을 때는 그녀가 자신을 낳은 어머니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에서 비롯된 것인 반면, 리어의 경우는 철저하게 그의 오만에서 비롯된, 언제든 의지만 있다면 자계(自戒), 즉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미리 반성과 경계가 가능한 어리석은 무지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작품의 비극성은 비전형적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비장미는 덜하지만, 훨씬 즉물적이고, 조금 어려운 표현을 쓰자면, 박진성 혹은 핍진성(迫眞性, 逼眞性, verisimilitude, truthfulness to life or nature)은 훨씬 크고 탁월합니다. 그렇기에 언제 어느 시점에 읽어도 매우 현대적이지요. 여러분들도 읽다 보면, 누구나 공감하실 겁니다. 리어와 같은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거너릴이나 리이건 등도 마찬가지이지요. 반면, 코딜리어나 광대와 같은 비극의 전형에 가까운 인물들은 실제 현실 속에서는 생각만큼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1막 3장에서 무대 위에 등장하는 인물은 거너릴과 오스왈드입니다. 여기서 거너릴은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는 리어의 횡포를 과장하면서 그를 비난하지요. 말하자면 자신의 종자(從者), 즉 하인과 그 나라의 왕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늙은 노인에 대한 뒷담화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오스왈드를 다음과 같이 종용하지요.


Oswald. He’s coming, madam; I hear him.


Goneril. Put on what weary negligence you please, you and your fellows; I’d have it come to question: If he distate it, let him to my sister, whose mind and mine, I know, in that are one, not to be over-rul’d. Idle old man, that still would manage thouse authorities that he hath given away!


오스왈드: 왕께서 오고 계십니다. 마님. 돌아오시는 소리가 들려요.


거너릴: 어떤 식으로든 이젠 지쳐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지못해 말을 듣는 티를 내거라. 너를 포함한 종자들 모두가 말이야. 그럼, 난 이걸 문제로 삼을 생각이니까. 만약 아버지가 이를 불쾌해하신다면, 뭐, 동생 집으로나 가시라고 해야지. 하지만 그 애 생각 또한 이 점에서 있어서는 나와 마찬가지일걸. 명령받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해. 멍청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이미 손아귀에서 놓아버린 권력들을 여전히 휘두르려고 한다니 말이야!


지금 거너릴은 오스왈드, 즉 일개 종자에게 앞으로 노왕(老王)이 무슨 명령을 내려도 대놓고 무시하면서 태업을 하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고 있지요. 왕녀이자 공작부인이라는 그녀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이는 분명 정명(正名)하지 못한, 즉 자신의 위치에 걸맞지 않은, 매우 천박한 악행입니다.


물론 리어가 잘못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미 1막 1장으로 통해 밝혀졌듯이, 그의 성정은 매우 급하고, 제멋대로이지요. 하지만 이는 평생을 왕으로서 군림해 온 자의 ‘습관’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움(nature)’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겁니다. 왜냐하면 만약 저게 온전히 리어의 ‘천성(nature)’라면, 이 작품은 비극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전형적인 희극, 즉 알라존Alarzon, 다시 말해 과장된 자의식을 가진 주인공을 비웃는(mocking) 이야기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거너릴이 저런 식으로 행동할 만큼의 잘못이 리어에게 있는 건 아니지요. 단지 그녀는 지금 핑계를 대고 있는 겁니다. 뭐, 이제는 1막 1장에서 보였던 과장된 가식은커녕, 눈치도 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권력을 양도받았으니, 이제 아쉬울 게 없다는 것을 저렇게 자신의 종자에게조차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거너릴의 성정(nature)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nature’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각 등장인물마다 각기 다르게 사용하고, 또 적용되고 있지요. 즉, 이 작품 자체가 ‘nature’라는 단어에 대한 고도의 pun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 ‘nature’는 인물에 따라, 또 맥락에 따라 ‘습관(질서)’, ‘본능’, ‘천성’,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 등으로 다양한 의미의 변주를 보이고, 이 의미들의 복잡한 함수 관계가 이 작품 속 갈등의 내용이니까요.


그러므로 ‘리어’라는 인물을 이 키워드로 이해하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 드러나고 또 추측할 수 있는 건, 리어 본인이 스스로 야기해버리기 시작한 이 비극의 원인은 바로 그의 어리석은 오만 때문이지만, 이는 80년에 가까운 세월을 왕으로 군림해 온 자의 오랜 습관과 그 보수적인 질서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움(nature)’일뿐이며, 그의 타고난 ‘천성(nature)’ 자체는 ‘매우 순박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순박한 인물이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왕좌에서 물러나지 않은 채, 왕홀을 꽉 쥔 채로 이를 근거로 딸과 사위들을 자기 입맛대로 쥐락펴락 하려고 했을 겁니다. 즉, 그는 너무도 ‘순진하게도’ 자식들이 자신에게 그동안 보였던 ‘호의’를 진심에서 비롯된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위로 여겼던 겁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정말로 진심으로 대한 자식은 그가 배은망덕한 패륜(unatural)적 존재라고 힐난을 하며 내쫓은 코딜리어뿐이었지요.


1막 4장으로 넘어가며, 드디어 다시 리어가 등장합니다. 사냥에서 막 돌아온 그는 자신을 왕답게 대우하며 맞이해야 할 종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 분개합니다. 그때 그 앞에 등장하는 어떤 미지의 인물이 있으니, 그 자는 바로 변장을 한 채 다시 등장한 켄트 백작입니다. 1막 1장에서 그는 리어에게 직언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을 명령받았었지요. 하지만 타고난 충신인 그는 그가 존경해 왔던 왕의 안위가 너무도 걱정이 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철저히 변장을 한 채 왕 앞에 다시 등장을 합니다.


한편, 오스왈드는 거너릴의 명령대로 리어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동을 시전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이제 그를 ‘왕(The king)’으로 부르지도 않아요.


Lear. O! you sir, you come you hither, sir. Whom am I, sir?


Oswald. My lady’s father.


Lear. ‘My lady’s father!’ my lord’s knave: you whoreson dog! you slave! you cur!



리어: 오! 너, 너 좀 이리로 와보거라. 내가 대체 누구냐?


오스왈드: 저희 마님의 아버지이지요.


리어: ‘저희 마님의 아버지’라고? 이 공작 집안의 종놈이! 이 창녀가 낳은 개 같은 놈아! 이 노예 같은 놈! 이 성질 더러운 똥개 같은 놈!


그렇다면 이런 하극상이 대놓고 일어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거너릴이 그대로 밝히고 있는 대로 이미 손아귀에서 놓아버린 권력을, 여전히 보유하고는 있지만 이제는 허울뿐인 ‘왕(The king)’이라는 칭호에 기대어 휘두르려고 하는(“would manage thouse authorities that he hath given away.”) 리어의 어리석음 때문이지요. 광대, 즉 fool은 리어의 이와 같은 태도를 두고 다음과 같이 비아냥거립니다.


Fool. Can you make no use of nothing, nuncle?


Lear. Why, no, boy; nothing can be made out of nothing.


Fool. [To KENT] Prithee, tell him, so much the rent of his land comes to: he will not believe a fool.


광대: 아저씨, 무(無)에서는 유(有)를 만들 수는 없어?


리어: 응, 안돼. 무(無)에서 생기는 건 무(無)뿐이야.


광대: (켄트에게) 제발, 이 사람에 말 좀 해줘요. 당신의 영지(領地)의 지대 역시 마찬가지라고. 이 사람은 광대 말은 들을려고도 하지 않거든.


여기서 광대는 이미 왕국(즉 땅)과 그에 귀속된 권리를 모두 두 딸들에게 다 줘버려놓고, 이제와서도 여전히 왕노릇을 하려고 하는 리어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하지요.


Fool. Nuncle, give me an egg, and I’ll give thee two crowns.


Lear. What two crowns shall they be?


Fool. Why, after I have cut the egg i’the middle and eat up the meat, the two crowns of the egg. When thou clovest thy crown i’the middle, and gavest away both parts, thou borest thine ass on thy back o’er the dirt: thou hadst little wit in thy bald crown when thou gavest thy golden one away.


광대: 아저씨, 내게 달걀 한 개만 줘요. 그러면 난 아저씨한테 왕관 두 개를 줄게.


리어: 그게 어떻게 왕관 두 개가 된다는 거지?


광대: 뭐냐니, 내가 그 달걀을 둘로 갈라서 그 안에 든 계란 속은 다 먹어버리면, 왕관 두 개가 남잖아. 당신이 당신의 왕관을 둘로 쪼개서 줘버렸을 때, 당신은 진창 속에서 당나귀를 등에 업고 가는 바보와 같아진거야. 당신이 황금 관을 줘버린 순간부터 이제 당신에게 남은 그 대머리 왕관 속에는 지혜라고는 별로 남은 게 없거든.


‘crown’은 원래 왕족 등이 머리에 쓰는 관(冠)을 의미하지만 달걀 껍데기를 둘로 쪼갠 모양을 두고도 ‘crown’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이 부분에서 광대는 ‘crown’이라는 다의어를 이용한 ‘pun’을 통해서, 모든 실질적인 권리, 즉 달걀로 치면 껍질 안의 속은 쉽사리 버려 버리고, ‘왕’이라는 허울뿐인 호칭만은 고집스레 보유하려고 한, 즉 달걀로 치면, 달걀 껍데기만을 뒤집어 쓴 채 스스로를 왕인 양 놀고 있는 것과 같은, 리어의 어리석음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한편, ‘진창 속에서 등에 업고 가는 당나귀’는 또 뭐냐? 라고 하실 분도 계실 것 같은데, 이건 이솝 우화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찾아서 읽어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이것도 앞뒤가 뒤바뀐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이야기지요. 즉 진창일수록 당나귀를 타고 가야 하거늘, 오히려 그 당나귀를 자신의 등에 없고, 진흙투성이가 된 채 진창을 힘들게 건너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어리석은 부자를 비꼰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리어는 거너릴과 그의 종자들에게 매우 노골적인 천대를 받습니다. 오직 올버니 공(公)만이 이 광경을 보며 당황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거나, 상황을 해결할 의지를 보이거나 하지는 않지요. 그리고 이런 남편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잘 아는 거너릴은 더욱 가차 없이 리어를 한계로 내몰고, 결국 리어의 이성의 끈은 점점 그 장탄성의 비가역적인 임계점을 향해 가속적으로 치닫게 되기 시작합니다.


1막 5장은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서 올버니 공의 성에서 나온 리어가 fool 그리고 반토막이 난 그의 종자들을 데리고 둘째 딸 리이건의 집, 즉 콘월 공의 성을 향해 출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발 전에 전령(변장한 켄트)을 통해 리이건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이 역시 거너릴이 먼저 수를 써 놓고 있었지요. 그녀 역시 자신의 동생에게 리어의 횡포를 과장하며, 혹시 아버지가 오더라도 그를 쉽게 받아주지 말라는 식의 편지를 써서 오스왈드 편으로 보내거든요. 여기까지가 1막 3~5장의 내용입니다.


그럼, 일단 다음주에는 <소금과 맞바꾼 시계> 시리즈의 최종화로 찾아뵐게요.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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