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요코 사건과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안녕하세요, 준쿠스입니다.
이번 시간은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대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의 마지막 장인 제5장을 리뷰하기에 앞서 네 번째 인터미션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에 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매우 쉬운 것일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 보도록 할게요.
몇 년 전 제가 우연히 알게 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이 사건에 대해 일본 언론에서는 “ノコギリ惨殺老婦事件”이라고 부릅니다. 직역하자면, ‘톱참살노부인사건’인데, 톱으로 자신의 남편의 목을 잘라 죽인 할머니에 관한 사건이지요. 해당 피의자 노인은 당시 76세였고, 사망한 남편은 83세였습니다. 21년도에 징역이 8년 선고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이게 최종심 판결인지는 여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이 할머니의 이름이 마루 요코(丸洋子)였기에, ‘마루 요코 사건’이라고 기억하는 일본인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검찰의 구형은 징역 13년인가 그랬습니다. 톱으로 남편의 목을 잘라 죽인 사건치고는 적은 구형이지요. 하지만 선고는 이보다 더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만한 충분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저 죽은 남편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거든요. 결혼한 이후, 아이가 둘이나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생활비를 전혀 가져다주지 않았어요. 멀쩡히 온라인 게임을 다니고 있었음에도 아내가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구걸하듯이 빌고 빌어야 가끔씩 조금 던져주는 정도였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아내를 힘들게 했던 것은 결혼 생활 내내 이어진 극심한 폭력과 폭언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슈퍼마켓 아르바이트 등으로 힘들게 두 아이를 길러냈습니다.
이후 아이들이 성인이 된 이후, 이 둘은 이혼을 했습니다. 살고 있던 집 이외에 아내에게 주어진 재산은 하나도 없었지요. 왜냐하면 그 남편이 탈탈 다 털어서 가져갔거든요. 그래도 드디어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는데, 6~7년 정도가 지난 후 재산은 다 탕진하고 뇌경색으로 반신불수가 된 남자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15여 년의 시간 동안 지옥이 다시 시작되지요.
이미 이혼을 했으니 전남편을 돌봐 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딸은 결혼을 했고, 아들은 정신질환이 있었기에, 자식들을 위해 마루 부인은 결국 치명적인 선택을 합니다. 즉, 다시 남편과 혼인신고를 한 것이지요. 스스로 차꼬를 자신의 발목에 다시 채운 것입니다. 이후 그 남편은 자신의 부인 손에 목이 잘려 죽을 때까지 15여 년의 시간 동안 머리고 얼굴이고 몸이고 전혀 씻지 않은 채, 심지어 양치도 한번 하지 않은 채 생활을 합니다. 이제 몸이 불편하니 예전처럼 때리지는 못했지만, 늘 입에서 튀어나오던 온갖 욕설과 폭언은 여전했지요. 그 악취를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제 생각인데 이 악취만 아니었어도 이런 최악의 파국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가 사건의 개요입니다. 흔하지 않으면서도 흔한 매우 불쾌하고 불운한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이 사건이 저의 관심을 끈 건, 이제부터 소개해드려는 마루 부인의 이 말 때문입니다. 우선 그녀는 늘 일기를 썼는데, 결과적으로 이 일기가 그녀의 살인이 계획된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량은 상당히 낮게 구형되고 선고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에는 평생의 걸친 경제적, 신체적 학대와 노령의 나이 등도 있었겠지만, 이 일기에 쓰인 그녀의 이 말 역시 영향을 분명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私には寿雄と結婚した責任がある。子供に迷惑をかけるわけにはいかない。だから夫を殺そうと思った。
(내게는 토시오와 결혼을 한 바카라임이 있다. 자식들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남편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 괴로울 정도였지요. 왜냐하면 무슨 심정으로 저와 같은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확실히 일본인답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평생을 자의와는 상관없는 철저한 피해자로 살아왔으면서도, 이를 ‘자기 바카라임’과 ‘폐’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어찌 보면 다소 자학적일 수도 있는 윤리의식은 분명 매우 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떠오른 또 다른 생각은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 내용 같다는 것이었지요. 그다음에는 ‘죄’와 ‘바카라임’ 그리고 ‘용서’와 같은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단상이 끊임없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이 문제들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볼게요. 이건 한 소설 작품과 관련된 것입니다. 한국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청준’이라는 작가는 누구나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작가이지요.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셨습니다. 동명의 영화로도 유명한 연작소설 『서편제』 라든지, 단편소설 『병신과 머저리』 등이 이 분 작품입니다. 예술적으로나 종교적, 도덕적으로 근본적이고 문제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벌레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유명한 한국영화가 바로 전도연 주연의 <밀양>이지요. 전도연에게 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그 작품 말입니다.
마루 요코 사건의 주제를 ‘죄와 바카라임’으로 압축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의 주제는 ‘죄와 용서’ 일 겁니다. 이 작품의 내용 역시 간략하게 소개해드릴게요. 한 아이가 유괴당해서 결국에는 살해된 채로 발견됩니다. 그리고 아이를 죽인 범인은 아이가 다니던 학원의 원장인가 하는 사람입니다. 아이의 엄마가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 미치기 일보 직전일 때, 한 동네에 사는 어느 교회 집사가 그녀에게 종교에 의지해보기를 권유합니다. 그렇게 그녀는 말 그대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매달리듯이 다니게 되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결국에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릅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그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에 면회를 가기에 이르지요. 즉, 용서를 실행하기로 마음먹은 겁니다. 하지만 이 만남으로 인해 그녀는 완전히 무너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용서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용서를 받고 편안한 모습으로 있었거든요. 바로 그가 교도소에서 믿기 시작한 ‘예수님과 하나님’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녀는 절규합니다. ‘엄마인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쉽게 용서하실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몇 년 전 있었던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여성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판사에게 했지요. ‘피해자인 제가 그 남자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판사님이 무슨 권리로 그 자를 용서하냐’고 말이지요.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종의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해볼게요. 이 두 경우를 종합해서 알 수 있는 건,
가혹한 경험의 피해자에게
‘용서’의 권한은 없고, ‘바카라임’의 업은 있다.
라는 점 같지 않나요?
또 다른 질문들을 던져 보겠습니다.
‘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그 죄의 고통을 감내해야 되고, 또한 (마루 요코 사건의 경우처럼) 그 고통으로 인해 더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자신의 바카라임을 다해야 하는가?’
‘왜 죄를 지은 자는 오히려 용서에서 자유롭고, 죄를 짓지 않은 피해자는 결코 용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일까?’
‘애초에 자유의지라는 것은 도덕적인 영역의 것이 아닌, 본능적 욕망의 실현을 합리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것일 뿐일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위에 던져진 질문들은 매우 근본적인 질문들이지요. 그리고 매우 괴로운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헤르만 브로흐의 말, ‘소설이 소설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부도덕이다.’라는 말처럼, 이런 질문들을 회피하지 않고 천착하는 것, 마치 스피노자가 당장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 것과 같이....... 그것이 바로 인문학적인 태도의 본질이자 의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