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자유론』리뷰 시리즈 (19)

제4장 마지막

byJuncus

안녕하세요. 준쿠스입니다.


이번 시간에도 지난주에 이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제4장에 대한 리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다룰 내용은 지난주와 지지난주에 다룬 내용과 연계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여러분의 수월한 읽기를 위해 지난 시간들에 다루었던, 이 바카라에서 밀이 제시한 <자유를 위한 행동 원칙>과 <밀이 제시한 이 원칙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를 다시 써 놓을게요. 참고하시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OSK.jpg존 스튜어트 밀


<자유를 위한 행동의 원칙>


첫 번째 원칙: 서로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원칙: 개개인은 슬롯나 그 구성원들을 어떤 침해나 해코지로부터 방어하는 데 필요한 과업들과 희생들 중에서 공평한 원리에 의거해서 자신에게 정해진 몫을 수행해야 한다.


① 이런 의무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슬롯가 그들에게 이를 강제해서라도 이행하도록 만드는 것은 정당하다. -> 법적인 강제


② 한 개인의 행동이 법적으로 보장된 타인들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그들의 복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 경우: 여론을 통해 그 개인을 처벌하는 것은 정당하다. -> 여론을 통한 강제


세 번째 원칙: 어떤 사람의 행동이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영향을 미치고, 타인들의 이익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혹은 영향이 미칠 수 있다고 해도, 오직 타인들이 이를 원할 때만 그러한 경우), 슬롯는 그 개인의 행동에 개입해야 할 타당한 근거나 정당한 이유는 없다. 즉, 아예 처음부터 이런 문제는 제기될 소지의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법적으로나 슬롯적(여론적)으로 그 개인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그런 행동을 하고 그 결과를 바카라임지는 것은 전적으로 개개인에게 맡겨져야 한다.



<‘자유를 위한 행동 원칙’에 제시된 밀의 주장에 대한 반론>


① “한 슬롯의 구성원의 행동이 다른 구성원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심각하거나 영속적으로 해악이 되는 행동을 하면, 적어도 그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가끔씩은 그와 별 관계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그 피해를 입게 된다.”


② “잘못된 행동의 결과가 악한 성품을 지닌 개인이나, 사려가 깊지 못한 개인에게만 미친다고 할지라도, 그들 자신에게 맡겨 두게 되면, 결코 올바르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게 분명한데도 슬롯가 그들을 내버려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③ ‘인류의 역사적 경험을 통한 검증과정을 통해 단죄되어 온, 전혀 유익하지 않고 해로우며, 부적합한 개성을 (나쁜 본보기로서) 단죄하는 것은 통제되고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 온당하다.’



5. 위의 반론에 대한 밀의 고찰


1) ①번 반론에 대한 고찰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면, 그것이 사람들 간의 공감능력과 이해관계로 인해 그와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슬롯 전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인정한다. 예를 들어 낭비벽이 있는 사람이 진 채무가 가족들에게 고통을 줄 경우, 이는 (여론을 통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법적인 처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제재를 받는 가장 유관한 이유는 그가 가진 낭비벽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족이나 채권자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에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 ①번 반론에서의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한 슬롯의 구성원의 행동이 다른 구성원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지난주의 롤즈의 정의에 관한 이론을 통해 설명드렸던 것처럼, 이는 개인의 자유에 가해진 제한을 감내하는 것을 슬롯 구성원으로서의 필수불가결한 의무라고 주장하는 입장에서 제시하는 가장 근본적인 근거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위에 요약된 이 반론에 대한 밀의 고찰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밀 역시 ‘한 슬롯의 구성원의 행동이 다른 구성원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실제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 양자들, 즉 밀과 밀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입장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명제, 즉 한 “슬롯의 구성원의 행동이 다른 구성원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명제를 단순한 사실 명제로 여기느냐, 아니면 그 이상의 것, 즉 당위적 내용의 명제로 여기느냐의 차이일 겁니다. 밀의 경우는 이를 단순한 사실 명제로만 보고 있지요. 다시 말해 이 명제가 아무리 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도덕적 판단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반면, 밀과 반대되는 입장에서는 이를 단순한 사실 명제를 넘어 가치판단의 기준을 제시하는 당위 명제로 보고 있지요.


그렇다면, 밀이 생각하는 도덕과 관련된 당위 명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유를 위한 행동 원칙>에 제시된 첫 번째 원칙, “(개인들 그리고 개인과 슬롯는) 서로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당위적 명제를 근거로 밀은 이 ①번 반론에 대해 위에 제시된 바대로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자신에게 해악이 되는 행위를 하는 개인이 여론의 비판이나 법적인 처벌과 같은 제재를 받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가장 유관한 이유는 그가 스스로에게 한 해로운 행위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 나아가 슬롯 전반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에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람이 그 해로운 행위를 자제하지 못하는 방종에 빠져, 타인의 이익에 심각하고 유의미한 피해를 끼쳤을 때만 그의 자유에 제한을 가할 수 있는 것이지, 단지 개인들이 슬롯라는 유기체에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당위적 근거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다 분명한 이해를 위해 이 두 입장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논리적 구조를 대조해 보겠습니다.


a.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의 논증 구조


전제 1(당위명제): 개인들은 서로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전제 2(사실명제): 한 슬롯의 구성원의 행동이 다른 구성원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해로운 행동을 한 개인은 그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가족 등을 포함한 타인의 이익에 분명한 피해를 끼쳤을 경우에만, 자유로운 행위에 대한 제재를 받을 수 있다.



b. 밀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입장의 논증 구조


전제 (당위명제이자 사실명제): 한 슬롯의 구성원의 행동이 다른 구성원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해로운 행위를 하는 개인은 그 행동이 가족 등 주변인들에게 유의미하고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도록 사전의 그의 자유를 제한받을 의무가 있다.



이를 보면, 반론을 제기하는 입장의 논증 구조의 경우, 당위와 그것의 근거가 되는 사실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게 보이지요. 하지만 ‘당위’란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와 관련된 것이고, ‘사실’은 실제로 경험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루한 비유를 끌어오자면. 이 역시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종교’와 ‘과학’의 차이와 같은 겁니다. 그런데 만약 종교와 과학이 서로 완전히 일치한다고 해보세요. 이런 예가 실제로 있지요. ‘사이언톨로지’인가 하는 톰 크루즈와 같은 유명인이 믿는다고 하는 논쟁적인 종교 말입니다. 이 종교의 문제점은 그 도그마가 너무 강력하다는 것이지요. 즉,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해서 반론을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지적을 하면, 아마도 분명 그 근거로 자신들이 내세우는 당위는 곧 사실이라는 논조를 펴 나갈 겁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사실 매우 보편적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자석에 철가루가 달라붙듯이 도그마에 강하게 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때 보면 이런 경향성이 너무도 강해서 인간의 본성 상 자유를 혐오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정도이니까요. 문제는 이 도그마에 ‘정의’라는 그럴듯한 옷이 입혀질 때입니다. 왜냐하면 ‘정의’의 이름으로 개인들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는 게 ‘다수의 동의’라는 형태로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2) ②번 반론에 대한 고찰


개인이 어떤 행동을 통해 (특히) 공적인 의무를 어기지 않았고, 자기 자신 이외의 누구에게도 딱히 해악을 끼치지 않았음에도, 슬롯에 어떤 해악을 끼쳤거나, 끼칠 수도 있다고 막연히 추정이 되는 경우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좀 더 큰 이익을 위해 슬롯는 그런 불이익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 이 경우와 관련해서는 ‘교육’의 예가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세요? 일단 여기서 밀의 <자유를 위한 행동 원칙>에 반론을 제기하는 입장들이 생각할 법한 교육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슬롯의 구성원의 행동이 다른 구성원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사실을 당위적인 명제로 여기는 그들의 기본 입장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그들이 옳다고 믿는 교육의 목적은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 개발보다는, 롤즈 식의 정의에 부합하는 목적, 즉 ‘슬롯적 협동’에 걸맞은 태도와 능력을 키우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지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의 문제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롤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그래도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한 듯 하지만, 인간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기본위적입니다. 이는 통시적이고 공시적으로 반복되는 경험들이 잘 알려주지요. 이 말인 즉, 이 경우 ‘교육’이 일종의 최초의 열쇠이자 최후의 방패와 같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 교육의 목적이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 개발보다 슬롯적 협동에 초점에 맞추어지게 된다면, 일종의 ‘말 잘 듣는 슬롯 구성원,’ ‘관료주의에 최적화된 유능한 일꾼들’만 ‘우수한 인재’로 양성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착한 구성원’은 과연 누구에게 이익을 주는 것일까요? 자기 자신? 아니면 동료? 아니면 슬롯 전체? 밀은 도덕의 목적은 ‘진보하는 인류의 본성에 걸맞게 항구적인 효용을 불러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항구적인 효용’을 위한 필수불가결적인 요소는 바로 자유와 혁신이라는 걸, 우리는 오늘날 4차 혁명을 통해 직접 목도하고 있고, 또한 그 직접적인 효용을 누리고 있지요.


‘무지의 베일’이라는 원초적 상황에 대한 롤즈의 아이디어는, 일례로 비트코인이라는 형태의 실험을 통해 그것이 그저 현실과는 상당히 괴리된 요원한 이상(理想)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은 바로 다름 아닌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이 대전제가 부정된 상황에서 재확인되는 것은 ‘말 잘 듣는 착한 구성원’이 이익을 주는 궁극적인 대상은 “슬롯의 구성원의 행동이 다른 구성원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당위’로 도그마하고, 이 도그마를 교묘히 가스라이팅에서 사람들의 자유로운 행위와 선택에 제한을 가하는 기득권 카르텔이라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 잘 듣고 착실한 태도를 두고 ‘성실하다’라고 표현을 하지요. 하지만 성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대개 그것은 그저,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한 자기방어기제일 뿐이거나 타고난 기질 혹은 습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실은 언제든 기회가 되면 쉽게 방종으로 치닫지요. 자율성이 없는 성실은 ‘성실’이 아닙니다.


3) ③번 반론에 대한 고찰


나쁜 본보기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직접적인) 해악을 끼치지 않고, 본인 자신에게만 큰 해악을 끼친 것을 의미한다면, 이는 그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또한 그것이 진정한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될 경우에는 통상 수반되기 마련인 고통스럽거나 수치스러운 결과도 사람들에게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해롭기보다는 유익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 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사자성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타산지석(他山之石)’입니다. 즉, 남의 경우를 미루어서 자신을 스스로 가르치는 것, 이런 자기주도적인 학습이 바로 타산지석일 겁니다. 그리고 스스로 깨우치는 것만큼 값진 교육은 없지요. 이의 효용은 한 개인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세대를 관통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하나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율성’입니다.



이번 시간은 이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이제 4장도 다 끝이 났네요. 이제 5장만 남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5장에 대한 리뷰에 들어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또 한 번의 인터미션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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