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두 번째
안녕하세요, 준쿠스입니다.
이번 시간에도 지난주에 이어 『자유론』 4장에 대한 리뷰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지난주에 설명드렸던 것처럼 밀은 슬롯계약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인위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지요. 비근한 예로서 제가 노직의 이론을 든 것처럼, 같은 자유주의의 범주 내에서도 개개인들 사이의 평등보다는 개인의 자유 쪽에 더 방점을 두고 있는 입장에서는 정의를 위해 슬롯적 기제를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설계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결과적으로 효용보다는 해악이 더 많이 유발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보는 입장의 바탕에는 인간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라고 보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밀 역시 이에 가까운 시각을 가진 자유주의자이자 공리주의자입니다.
한편, 기본적인 스탠스는 자유주의자이지만, 자유와 평등 사이에 어떤 이상적인 균형점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견지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바로, 현대철학자의 경우 롤즈와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이런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해 낙관적입니다. 몽테스키외나 로크와 같은 슬롯계약론을 주장한 철학자들의 시각도 이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둘 모두 인간 본성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적어도 중립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루소의 경우는 좀 독특합니다. 일종의 대안적인 경우? 혹은 제3의 경우일 수도 있는데, 지금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니 그냥 넘어갈게요.
슬롯계약론은 뭐랄까, 방법론적으로 매우 유용한 면이 있지요. 또한 설명력도 분명 강력한 면이 있어서, 오랜 시간 동안 강력한 이론으로 영향력을 끼쳐 왔습니다. 하지만 밀은 이를 딱 잘라 거부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부정하는 것으로만 끝내서는 안 되지요. 그러면 전혀 설득적이지 않으니까요. 슬롯계약론의 가진 유용성에 최소한 등가적인 대안은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물론 밀은 그렇게 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 다룰 내용이고요.
2. 자유를 위한 행동의 원칙
첫 번째 원칙: 서로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원칙: 개개인은 슬롯나 그 구성원들을 어떤 침해나 해코지로부터 방어하는 데 필요한 과업들과 희생들 중에서 공평한 원리에 의거해서 자신에게 정해진 몫을 수행해야 한다.
① 이런 의무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슬롯가 그들에게 이를 강제해서라도 이행하도록 만드는 것은 정당하다. -> 법적인 강제
② 한 개인의 행동이 법적으로 보장된 타인들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그들의 복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 경우: 여론을 통해 그 개인을 처벌하는 것은 정당하다. -> 여론을 통한 강제
세 번째 원칙: 어떤 사람의 행동이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영향을 미치고, 타인들의 이익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혹은 영향이 미칠 수 있다고 해도, 오직 타인들이 이를 원할 때만 그러한 경우), 슬롯는 그 개인의 행동에 개입해야 할 타당한 근거나 정당한 이유는 없다. 즉, 아예 처음부터 이런 문제는 제기될 소지의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법적으로나 슬롯적(여론적)으로 그 개인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그런 행동을 하고 그 결과를 바카라임지는 것은 전적으로 개개인에게 맡겨져야 한다.
➜ 지난주처럼 이번 시간에도 이 문제에 관해 존 롤즈가 제시하는 정의의 원칙과 대조해 보며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원칙을 볼까요? 이 첫 번째 원칙은 법으로 친다면 일종의 ‘헌법’ 비슷한 겁니다. 즉, 이 문제와 관련된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는 것이지요. 이런 대원칙을 밀은 ‘개인들은 서로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인 즉, ‘개인들의 이익은 최대한 보장이 되어야 한다.’ 뜻이겠지요.
반면, 롤즈가 제시하는 정의의 기본 원칙이자 전제는 무엇이었지요? 그것은 바로 ‘슬롯적 협동’이지요.
그렇다면 이 두 철학자는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출발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각각, 밀은 ‘개인의 자유’를 롤즈는 ‘개인들 사이의 협동’을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은 곧 인간의 본성이라는 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요.
위에서 설명을 드렸다시피, 밀과 롤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시각이 좀 다릅니다. 밀은 확실히 밝혔지요. 자신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회의적이라고요. 반면, 롤즈의 『정의론』에는 이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읽어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매우 합리적으로 추측은 가능하지요. 제가 보기에, 롤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적어도 노직이나 밀보다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두 번째와 세 번째 원칙으로 넘어가 볼까요? 첫 번째 원칙이 헌법과 같은 가장 기본적 전제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원칙은 이 첫 번째 원칙에 비추어서 그 바운더리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먼저, 두 번째 원칙을 보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이익을 가장 중시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미루어 남들 역시 자신들의 자유로운 이익을 중시여기겠지 하면서 이를 존중해주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고 자명합니다. 바로 자신의 자유로운 이익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기적인 것이지요. <성경>이나 <논어>를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이 하기 싫고, 당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권고 혹은 충고 말이 있습니다. 이걸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인간의 이기적인 경향성은 분명 자연스러운 것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기심이 제어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자기들이 손해를 보지요. 왜냐하면 여기 탐스러운 나무가 하나 있는데, 하나 같이 나무의 열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싸우다 보면 나무 자체가 죽어 없어져 버리니까요. 아마도 사람들 중 누군가가 내가 못 가질 바에야 그냥 베어버리는 게 낫지 하고 나무를 댕강 잘라 버릴지도 모릅니다. 왜 한국 속담이 이런 말이 있잖아요?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요즘처럼 적나라한 세상을 보면 이 말은 정말 진리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기심과 자유에 어느 정도 제한을 둡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를 집단의 원칙으로 만들어가지요. 이 역시 아마도 어느 정도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두 번째 원칙’입니다.
이 ‘두 번째 원칙’은 ‘첫 번째 원칙’을 인간슬롯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적용하는 일종의 ‘실천의 원칙’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밀은 다음의 두 가지 방식, 통시적으로 가장 전통적이고, 공시적으로는 인간슬롯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을 제시합니다. ‘법과 여론’에 의한 제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매우 간명하고, 자연스럽지요.
그럼, 이제 이 지점에서 롤즈의 경우를 대조적으로 끌어와 볼까요? 먼저 방금 든 과실수의 예를 여기에서도 들어보겠습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이에 대해 롤즈는 밀과는 좀 다르게 해석할 겁니다. 즉, 사람들이 그 나무에 열린 열매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원칙을 상정하는 목적을, 밀과는 달리, 그것을 ‘가능한 한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에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밀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 저기 위에 쓰여 있는 두 번째 원칙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밀은 분명히 밝히고 있지요 그 목적은 그저, ‘개개인이 슬롯 내 다른 구성원들을 향해 행할 수 있는 어떤 침해나 해코지로부터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이 말들은 분명 서로 완전히 다른 말들입니다.
밀이 ‘공평함(이 말 역시 '평등'과는 다른 말입니다. 이 두 말은 그 맥락적인 뜻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매우 커질 수도 있는 말들이지요. 그러니 잘 구분하는 게 중요합니다.)’을 강조하는 건, 이 나무에 달린 열매를 배분하는 방식이 아닌, 그 나무에 달린 열매를 더 많이 가지려고 그 나무에 대한 타인의 권리, 그리고 그 나무가 항구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는 장기적인 슬롯적 효용을 침해하는 개인들에 대한 제재 방식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원칙’입니다. 사실, 이 세 번째 원칙과 관련된 문제가 가장 골치 아프고, 복잡하며, 논쟁적인 것들이지요.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해, 밀은 이 세 번째 원칙에 관해서 첫 번째 원칙의 한계 내에서만 언급하고 있을 뿐, 그 이상 상세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이는 일반화하기에는 변칙적인 사례들이 너무도 많을 것이 충분히 예상 가능했기 때문일 겁니다. 반면, 롤즈의 정의에 관한 이론은 바로 이 세 번째 원칙과 관련된 문제들일 일반화하기 위한 지난한 설명에의 시도로 가득합니다.
하나의 예로 이 대조를 보여 보겠습니다. 밀은 이 세 번째 원칙에서 슬롯가 개인의 자유에 개입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달고 있지요.
‘어떤 사람의 행동이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영향을 미치고, 타인들의 이익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혹은 영향이 미칠 수 있다고 해도, 오직 타인들이 이를 원할 때만 그러한 경우)’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롤즈와 밀의 입장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결정적인 분기점입니다. 즉, 롤즈는 ‘슬롯의 구성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조건적으로 서로의 이익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기에 ‘평등’에 대한 요구는 매우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그 결과, ‘차등의 원리’니, ‘한계생산이론’이니 여러 가설과 이론들이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하지만 밀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대하고 복잡한 이론의 해결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그냥 단칼에 잘라서 해결했다고 하는 영원한 미제, ‘고르디우스의 매듭’의 사례처럼 말이지요.
『정의론』에 제시된 롤즈의 아이디어를 화폐 시스템에 적용한 게 바로 ‘비트코인’이라고 하지요. 저는 그 사토시 나카모토? 맞나요? 아무튼, 그 미지의 인물이 썼다고 하는 이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의 관한 논문을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일단 저는 컴퓨팅 시스템에 관해서는 눈 뜬 장님 같은 사람이거든요.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또한 투자에 관한 것도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돈’ 정확히 말해 “‘돈’이라는 시스템”에 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제 타고난 성향과 그나마 좀 가지고 있는 재능에서 발로된, 말 그대로 철학적인 관심입니다. 돈만큼 인간학적인 대상은 세상에 없으니까요. 돈 속에는 인간의 모든 게 담겨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만약 비트코인의 창시자가 정말로 롤즈가 제시한 ‘원초적 상황’과 같은 걸 대안적 화폐 체계의 기반으로 상정하려고 했다면, 결과적으로 이는 실패한 시도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노직이 던진 매우 sophisticated한 냉소, 즉 ‘왜 슬롯적 협동은 정의의 문제를 굳이 만들어내는가?’라는 말이 계속해서 떠오릅니다.
우선, 블록체인 기반 체계를 통해 ‘무지의 베일(이에 대한 설명은 『정의란 무엇인가』 리뷰 시리즈에 설명해 놓았으니, 이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신 분들은 그 리뷰 시리즈를 참고해 주시기 가랍니다)’이라는 원초적 상황이 실제적으로 정교하게 마련된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제 비로소 ‘돈’이라는 슬롯를 돌아가게 하는 혈액과 같은 실체적인 믿음 체계를 가지고, 이 일견 매우 유의미해 보이는 정의(正義)에 관한 이론을 실제로 진지하게 실험해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도출된 사실이 알려주는 것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롤즈가 예상한 결론이 현실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림포스의 신들 혹은 만화 <원피스>의 천룡인들처럼 세상 위에서 군림하는, 돈을 찍어내는 권리를 독점한 극소수의 기득권 카르텔로부터 독립된 탈중앙화된 화폐 시스템은 결국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또한 평등에 원칙에 의거해 그 돈이 즉, 비트코인이 적절하게 배분된 것도 아니니까요. 오히려, 반대로 소수가 독점하는 초고가의 안전자산이 되어버렸고, 롤즈가 그렇게 문제 삼던 슬롯적 불평등은 오히려 더욱 심해졌지요. 또한 롤즈가 무엇보다 경계하면서 비판했던 것이 ‘우연한 행운 등에 의해’ 불평등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이 상황은 더욱더 아이러니합니다.
지브리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면, 자기 나름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노인이 자신의 증손자인 주인공 소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世界は 生き物だ.”
‘세상은 생명체와 같다’라는 그의 말의 진실성은, 그가 천국을 꿈꾸며 데리고 왔던 물새들과 알록달록한 잉꼬들이 식인(食人)을 하는 전도된 유토피아를 통해 방증(傍證)되지요. 즉, 그가 타락했다고 여겨서 버리고 온 바깥의 세상이나 그가 새로 만든 그 세계나 결국에는 똑같아진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말 그대로 이키모노(生き物), 즉 ‘살아 숨 쉬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 말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프로이트식으로 표현하자면 리비도libido가 곧 데스트루도destrudo라는 뜻이겠지요. 즉, 일단 판이 깔리면 사람들의 살고자 하는 이기적인 본능은 그 판이 작용하는 자발적인 기제가 되지만, 동시에 그 판을 부수는 죽음에의 충동도 됩니다.
롤즈는 정의의 원칙을 게임의 법칙에 비유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간과한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바로 그 게임의 법칙은 본질적으로(그리고 자연적으로)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소수의 선점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배타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점,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합의했다고 해서 그 법칙을 준수하는 게 아니라, 그 법칙이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가 매우 유효하게 있을 때까지만 그 법칙을 따른다는 점을 간과한 것 같습니다. 즉, 인간 본성에 관해 너무 안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화폐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달러 패권을 예로 들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요즘 환율이 심각하지요. 제가 이란이나 베네수엘라를 보면서 느낀 건, 미국의 군사력도 놀랍지만, 무엇보다도 달러의 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행동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는 것 같거든요, 즉, 우선 달러 거래 제재 등을 통해 해당 나라의 화폐 가치를 완전히 바닥 치게 만들어서, 인플레이션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하게 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게 만듭니다. 그러고 나서 기다리지요. 자신들이 개입할 명분이 현상화될 때까지 말입니다. 즉 유효할 정도로 매우 많은 사람들이 빵을 달라고, 혹은 ‘자유’를 외치면서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다른 잡코인들이 다 휴지조각이 된 것은 바로 비트코인의 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이지요. 이 말인 즉, 그 휴지조각이 된 코인들의 가치는 블록체인이라는 무지의 베일에 의한 공정한 슬롯적 협동에 관한 합의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코인들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다름 아닌 비트코인이지요. 바로 원화의 가치가 달러에 의해 결정되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제가 보기에, 게임의 룰이란, 롤즈가 말한 방식처럼 ‘합의’라는 불완전한 믿음에만 온전히 의지해서 작위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속 마히토의 할아버지가 말하는 것처럼 일종의 거대한 ‘生き物’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또 그 잉꼬들과 와라와라들과 인간들과 펠리컨들처럼 각자 자신의 이익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들이 있지요. 그리고 그 게임의 룰을 결정하는 소수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을 자발적으로 짜내려 가는 것은 그 게임판에 있는 존재들 전부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을 보면 야훼가 이런 말을 합니다.
“My Spirit shall not always strive with man for that he also is flesh(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는 그들이 육체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는 노아를 불러서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한 뒤, 세상의 모든 것을 홍수로 쓸어내어 버립니다. 제가 여기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아무리 신이라도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구는 것을 하나하나 고치게 만들지는 않고, 그냥 내버려 두다가 임계의 순간이 왔을 때, 한 번씩 그 판을 크게 흔들면서 정리를 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내버려 두고 또 똑같은 일은 반복이 되지요.
그렇다면 신은 왜 중간에 개입을 하지 않을까요? 이런 궁금증이 들지 않습니까?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그게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또 그게 더 효용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신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는 완전무결함이지요. 이 말인 즉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겁니다. 또한 게임의 판을 만든 자에게 부여된 배타적 권한은 바로 그 판을 없앨 수 있는 힘이지요. 우리가 '신'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창조'와 '처벌'이라는 개념들을 떠올리는 건 바로 이 때문일 겁니다.
현실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밀이 말하는 개인의 자유에 관한 원칙도 이상적인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롤즈의 경우보다는 훨씬 실제적이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잘 방증(傍證)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나 글이 또 길어졌네요. 저는 글을 즉흥적으로 쓰는 편이고 또 그런 글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진실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그러니 양해 부탁드려요. 천천히 읽어주세요.
그럼, 이번 글은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