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자유론』리뷰 시리즈 (16)

제4장 첫 번째

byJuncus

안녕하세요, 준쿠스입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다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대한 리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지난주에 제3장에 대한 리뷰가 끝났었지요. 그렇다면 총 3/5 분량이 진행된 거네요. 이제 2/5가 남았네요.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도 있고, 일단 시작을 했으면 잘 끝내는 게 중요하지요. 남은 분량도 충실히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위해 노력했듯이, 전 결코 그처럼 훌륭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글을 필요로 하실 소수의 분들을 위해 꾸준히 갈 길을 가보겠습니다. 애초에 온라인카지노를 시작한 목적 역시 그러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할게요!



제4장 슬롯가 개인에 대해 가지는 권한의 한계


1. 슬롯계약론에 대한 밀의 견해

4장을 시작하면서 밀은 계몽주의 이후 그 당시까지 지식계 내에서 상당한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던 ‘슬롯계약론’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밀은 슬롯계약론에 대해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슬롯계약론의 영향력은 21세기 현재에도 여전하지요. 정치슬롯적 입장에 있어 좌우를 막론하고 그 이론적인 틀은 어떤 식으로든 슬롯계약론과 깊이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노직이나 롤즈와 같은 정치철학자 혹은 윤리학자들 역시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의 밑바탕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슬롯계약론적인 관점은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밀은 16세기 홉스의 『리바이어던』 이후로 정밀화되고 그 외연의 범주가 도덕론에 이르기까지 확장된 이 이론에 대해 그다지 동의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밀은 다음과 같이 확실한 어조로 분명히 말합니다. (넘버링은 논리적 설명의 편의를 위해 제가 임의적으로 단 것입니다.)


① “슬롯는 계약에 의거해서 창설된 것이 아니다.”

② “슬롯적 의무들을 도출해 내기 위한 근거로 슬롯계약론을 상정하는 것은 탐탁하지 않은 시도이다.”

③ “주로 개인의 이익과 관련된 부분은 개인에 속하고, 주로 슬롯의 이익과 관련된 부분은 슬롯에 속한다.”

➜ 먼저 ①을 볼까요? 이는 슬롯계약론에서 말하는 대전제, 수학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공리’ 내지 ‘정의’ 즉, 자명한 참으로 보이기에 증명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밀은 일단 참이 아니라고 부정을 하지요. 이 말인 즉, 슬롯계약론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②를 한번 자세히 보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짐작 가능한 밀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 같아 보입니다. 즉, 밀이 보기에 슬롯계약론의 논리는 어떤 목적에 맞게 작위된 면이 있다는 것이지요. 즉, 밀은 개인들의 슬롯적 의무, 하지만 이는 듣기 좋게 표현된 명분일 뿐이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의도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통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슬롯계약론’이 고안된 면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밀이 정말 이런 의심을 가지고 이와 같은 단언을 했다면, 이 의심은 근거가 없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토마스 홉스가 슬롯계약론의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했을 때, 그는 분명한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왕권신수설’을 합리화하여, 절대왕정의 레짐 논리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절대왕정 하에서 개인은 없거나, 있어도 그저 주변적인 것일 뿐입니다.


이후 계몽주의 시대에도 근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레짐의 표면적인 주체가 왕에서 대중으로 이동해 간 것뿐이지요. 그리고 『자유론』의 1장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것처럼 전자의 경우는 주로 ‘법’으로, 후자의 경우는 ‘선호라는 정서에 기반한 여론’의 형태로 개인들의 자유를 통제하고 억압하지요.


③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좀 설명해보겠습니다. 즉, 오늘날의 정치철학과 연관해서 말해보도록 할게요. 이를 위해서 언급할 수밖에 없는 두 명의 유명한 현대 철학자들이 있지요. 바로 존 롤즈와 로버트 노직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철학자들 중 밀의 저 의견에 동의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로버트 노직일 겁니다.


일단 이 두 인물에 대한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혹시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신 분들은 제 온라인카지노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리뷰 시리즈를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노직은 『아나키에서 유토피아까지』 7장의 제2절에서 본격적으로 롤즈의 『정의론』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다룹니다. 그리고 7장의 제2절의 인트로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롤즈의 체계적인 비전과 씨름을 하고 나서도 이를 설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아마도 분명 노직 자신과 같은 사람들)일지라도 이를 면밀히 연구함으로써 배우게 되는 것은 많다. 물론 이는 오류 혹은 오류로 여겨지는 것과 결전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날카로이 할 수 있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로버트 노직



확실히 밀은 이 『자유론』 2장에서 개인의 의견을 침묵시키는 것은 비록 그 의견이 틀린 경우일지라도 해악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이에 대한 리뷰는 이미 마쳤습니다만, 그 내용을 복기해 보면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의 의견이 틀린 경우일지라도 그것을 침묵시키게 되면, 인류는 오류와의 충돌을 통해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인 즉, 노직은 지금 고도로 세련된 방식으로 롤즈를 매우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것이 오류이기 때문에 오히려 매우 가치 있는 이론이 되었다고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노직은 왜 롤즈의 이론이 오류라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롤즈가 정의(正義)에 관한 자신의 이론의 전개를 위해 상정한 대전제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롤즈는 다음과 같은 전제 하에서 논의를 전개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복지가 의존하는 것은 협동의 체제이고, 이 협동의 체제 없이는 그 누구도 만족할 만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즉, ‘슬롯적 협동’을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상정하는 것에서부터 그의 이론은 시작이 됩니다. 즉, 일종의 기하학의 공리와 같은 것이지요. 그렇기에 이것 자체에 의문을 던져버리면 그의 이론 전체가 의심스러운 것이 되는데, 노직이 문제 삼고 있는 게 바로 이 대전제인 것입니다.


한편, 이 ‘슬롯적 협동’이라는 아이디어는 독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종의 슬롯계약론의 변주이지요. 그런데 앞의 ①에 대한 설명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밀은 “슬롯는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을 하면서, 슬롯계약론의 공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이 이론에 대한 반박을 시작하지요. 즉, 노직과 매우 비슷한 경우입니다.


밀과 노직이 각각 슬롯계약론과 롤즈의 정의론을 반박하는 근거 역시 비슷합니다. 우선 노직이 롤즈의 ‘슬롯적 협동’이라는 대전제를 반박하는 내용을 좀 살펴볼까요? 이를 위해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까지』에 제시된 해당 부분을 요약 발췌해서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왜 슬롯적 협동은 분배적 정의의 문제를 만들어내는가? 이 말인 즉, 만약 슬롯적 협동이 전혀 없다면, 즉 각각의 개인이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만 자신의 몫을 차지한다면, 정의의 문제나 정의에 관한 이론에 대한 필요 같은 게 애초에 존재했을까?


예를 들어, 10명의 로빈슨 크루소 같은 개인들이 있어서 각각이 서로 다른 섬에서 2년 동안 홀로 일한 연후에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20여 년 전에 우연히 남겨진 무전기를 통해 서로 소통을 하면서 급기야는 서로의 재산 상태에 관해서까지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만약 각자가 있는 섬들 사이에서 물자의 이동이 가능해진다면 그들은 서로에 대한, 즉 서로의 소유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최소의 재산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궁핍을 근거로 혹은 자신이 있는 섬의 자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근거로, 또는 자신은 생래적으로 자활력이 가장 약하다는 것을 근거로 상대의 소유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누구도 (이 사고실험과 같이) 슬롯적 협동이 결여된 상황에서 이와 같은 권리 주장을 할지 안 할지 여부가 아니라, 설혹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슬롯적 협동이 없는 슬롯에서는 각 개인들은 타인의 도움 없이 자신의 노력에 의해 얻은 바를 받을 응분의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를 달리 말하면, 다른 그 누구도 이 소유에 반하는 권리 주장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무엇에 대해 권리가 있는지 투명할 정도로 명백하므로, 정의의 이론 같은 건 필요치 않다. 즉, 이런 비협동적인 상황은 어떤 정의의 이론도 적용되지 않다기보다는 정의의 가장 올바른 이론, 즉 소유 권리론이 적용될 명백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 여기서 노직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겁니다.


첫째, (10명의 로빈슨 크루소의 사고실험에서 묘사된 인간행동론적 양태를 볼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본위적이다.


둘째, 이런 인간 본성의 경향성을 고려할 때, 슬롯적 협동이라는 상황은 오히려 정의의 문제를 부정적으로 만들어낼 뿐이다. 오히려 가장 간명한 상황이 가장 정의로울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이제 밀의 논리에 유비적으로 적용해 볼까요?


첫째, 우선 대전제로, 밀은 인간 본성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이는 이미 1장과 2장을 통해 설명 드렸었습니다.


둘째, 이런 인간 본성의 경향성을 고려해 볼 때, “슬롯적 의무들을 도출해내기 위한 근거로 슬롯계약론을 상정하는 것은 탐탁하지 않은 시도이다.”(위의 ②번) 오히려, “주로 개인의 이익과 관련된 부분은 개인에 속하고, 주로 슬롯의 이익과 관련된 부분은 슬롯에 속한다.”(위의 ③번)이라고 직관적으로 간명한 것에 따라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러우며 항구적으로 더 큰 효용을 낳는다.


자, 밀이 이렇게 슬롯계약론에 대해 부정을 했으면, 그 대안을 제시해야겠지요? 하지만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이어 가도록 할게요.


그럼, 이번 시간은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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