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성(城) Das Schloss』(2)
이 작품은 어떤 성(城)으로부터 고용된 측량기사 K가 그 성 밑의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이 성으로부터 고용되었다는 이유로 성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문제는 그가 정말로 고용되었는지를 확인해주는 사람이나 존재가 없다는 점이었지요. 그는 성과 연락이 닿으면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속단합니다. 하지만 성과의 연락은 결코 쉽게 닿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그는 성 밑 마을 주변을 키호테가 편력을 하듯이 돌아다니며 갖은 수를 다 쓰지만, 그의 모든 노력은 무용(無用)한 짓일 뿐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게 이 작품의 줄거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전부입니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 같지요?^^ 하지만 카프카의 작품 대부분이 이렇습니다. 하지만 이를 하나의 은유로 보면, 이해하기 훨씬 수월해집니다. 단적으로 말해 K는 근대 이후의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범인(凡人)들 모습 그 자체입니다.
즉, 우선, ‘나는 성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성에 고용이 되었으니까.’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가 그러합니다. 이는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는 그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지요. 그렇기에 그는 그가 그런 자격이 있다는 것, 즉 성에 의해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당위의 불일치가 발생합니다. 즉, K에게 있어 자신이 성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당위’입니다. 반면, 성 밖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당위는 그가 이 자격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것이 곧 당위입니다.
그렇다면 이 서로 충돌하는 두 당위는 어떻게 봉합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그저 성이 yes냐 no냐 대답만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해결바카라은 K로서는 요원하기 짝이 없는 것일 뿐으로서, 완전히 그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집요한 K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당위를 마을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점점 더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건 일종의 번지수가 잘못된 행위일 뿐이거든요. 그가 자신의 당위를 증명해야 할 대상은 그를 성 안으로 받아들여줄 결정권이 있는 존재, 즉 '성'이지, 성 밑 마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애초에 성을 대상으로 한 이런 존재 증명은 무의미한 짓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일종의 '실존의 진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아날로지, 즉 유비를 들어 볼까요?
예를 들어, <구약>을 보면, 야훼가 누군가에게 은총을 베푸는 양상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즉, 아브라함처럼 커버넌트를 맺은 후 계속해서 시험에 들게 해서 그것을 통과한 경우이거나, 요나처럼 그냥 마음에 들어하는 경우가 그것이지요. 즉, 철저히 신의 의지에 달린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까닭을 나중에서야 역사의 현현을 통해 조금씩 그리고 막연히 깨닫게 되지요. 이를 뜻하는 단어도 물론 있습니다. '섭리' 즉 'Providence'가 바로 그것이지요.
이와 비슷하게, 이 작품에서 ‘성’이란 절대적인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위에서 든 예처럼 종교적인 신일 수도 있고, 가부장적인 슬롯 혹은 관료제와 같은 위계적 조직일 수도 있습니다. 보통 이런 ‘실체’들은 개인들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특히 K와 같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더욱 그러하지요. 그리고 만약 여기서 ‘성’을 일종의 ‘신’과 같은 실체로 본다면, 지금 K가 마치 자신의 당연한 권리인 양 요구하는 있는 건, 바로 ‘신의 은총’입니다. 하지만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이 <은총에 관하여>라는 유명한 서간문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온전히 신의 의지에 달린 것일 뿐, 인간이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당위적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K의 문제는 바로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가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닌, 그 자격을 마치 처음부터 당연히 주어진 것인 양 여기는 그의 태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지점에서 ‘분명 성으로부터 고용되어서 찾아온 K가 스스로를 성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그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이다.’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리고 맞습니다. 이 상황 자체는 분명 ‘부조리’입니다. 분명 K는 정직하고 선량한 청년이니까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율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니체의 유명한 말,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라는 말의 독일어 원문을 보면 이는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지요. 이 말인 즉, ‘(그동안) 있어 왔던 신이 이제는 없다’라는 의미의 존재론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실 신은 늘 있습니다. 물론 이 말도 존재론적인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언제나 신과 같이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의지할 존재를 필요로 하고, 그렇기에 필요하다면 없던 신도 만들어낸다.’라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존재론적인 당위가 아닌 필요에 의한 당위와 관련된 말입니다.
니체의 저 말 역시 저는 이와 마찬가지의 의미로 읽힙니다. 즉 ‘신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라는 뜻인 것처럼 저는 읽힙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당당히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또 다른 신적인 존재, 바로 ‘초인’에 대한 믿음 때문이지요. 즉 믿음과 의지의 대상이 신에서 초인으로 대체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초인’의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신화’로 완성됩니다. 카프카의 『城』을 읽다 보면, 이 ‘성’의 존재가 매우 신비롭게 여겨지는 까닭 역시 바로 이러한 점에 기인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K가 직면하고 있는 부조리와 이와 관련된 그의 어쩔 수 없는 범인(凡人)으로서의 한계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또 다른 대조를 하나 끌어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의 ‘시지프’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시지프’의 이야기는 분명 ‘신화’가 맞습니다. 까뮈의 ‘시지프’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과는 좀 다른 맥락에서의 초인입니다. 그는 어떤 불경죄로 짓고 신들로부터 그 벌로써 끊임없이 바위를 언덕 위로 굴러야 할 천형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가 힘들게 바위를 언덕 위에 올려놓으면, 그 바위의 무게로 인해 다시 그 바위는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그렇게 시지프는 이 무용해 보이는 일을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벌을 받습니다. 말 그대로 완전한 ‘부조리’의 단단하기 짝이 없는 차꼬가 그의 운명에 채워져 있는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바위, 이 부조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성을 대하는 K의 태도와 완전한 대조를 이룹니다. 까뮈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볼게요.
“나는 나의 부조리(不條理)에서 세 개의 결과를 이끌어낸다. 즉, 나의 반항(反抗), 나의 자유(自由), 그리고 나의 정열(情熱)을.”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산에서 내려올 때, 중지하고 있을 때이다. 바위 곁에서 기진맥진한 이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내 종말이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내려오는 것을 본다.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그리하여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 이는 의식(意識)의 시간이다. 그가 언덕 위를 떠나 차츰 제신(諸神)의 소굴로 내려가는 순간순간마다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을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바위보다 즉, 그의 부조리보다 한결 강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시지프와 K는 시작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이 부조리에 대한 자율성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입니다. 즉, 시지프는 바위를 굴리는 것을 온전히 자신의 자율과 관련된 문제로 만들어 버리지만, K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노력을 하면 할수록 그는 성의 은총, 즉 성의 재량권에 더욱더 의지하는 꼴이 되지요. 시지프는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그래서 그 천형으로부터 속죄받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 말인 즉, 시지프는 자기소외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그의 비범성의 본질입니다.
반면, K는 끝없이, 거의 맹목적일 정도로 인정을 갈구합니다. 그가 성 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목적 자체가 애초에 ‘인정받았음에 대한 증명’을 얻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이 말인 즉, K는 자기소외의 끝없는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범인(凡人)입니다. 초인(超人)은 결코 자기소외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전혀 모르는 성질의 것일 뿐입니다. 그를 증명하는 건, 시지프처럼 그 자신이지,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닙니다. 반면, K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의 은총을 갈구합니다. 제가 K를 정직하고 선량한 범인(凡人)의 전형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형(典型)에는 많은 분들이 동병상련을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매우 실제적이니까요.
어떠셨나요? 카프카의 『城』은 쉽게 읽히지 않는 작품으로 여겨지지요. 하지만 이렇게 읽으면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번 기회에 여러분들도 다시 한번 카프카의 작품들 중 하나를 골라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城』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매우 짤막한 단편이니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으실 겁니다. 오히려 꽤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 어떤 작위나 위선이 전혀 없는 순수 그 자체의 작품들이니까요.
이번 글은 이 정도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다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이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주에 뵈어요!